“눈꼽만큼”의 효과도 그들에겐 중요한가 보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에도, 여성들을 본질화시키는 논리는 “여성들의 경험”,”여성들의 활동”, “여성들의 억압”, “여성들의 상황”, “여성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게 하며, 마치 이 사건들과 과정들이 여성들 간의 인종, 계급, 혹은 문화적 차이들과 관계없이 모든 여성들에게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여성들의 삶의 이 같은 국면들을 복수로-예를 들어, “경험들”로-말한다하더라도 본질론화 경향을 비껴나가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의도를 천명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즉, 복수를 뜻하는 “들”은 그 단어를 지지할 어떤 분석도 곁들이지 않은 채 그냥 단어 뒤에 매달려있을 뿐이다. 그것은 “남성들-그리고, 물론, 여성들도”라고 말은 하면서도 단지 “남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던 시대에 관심의 대상이었던 그 가설들과 똑같은 가설들을 만들고, 또 그 주제들과 똑같은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도덕적인” 혹은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그래-사람”에 대한 윤리학이나 경제학이나 법이론의 토론들을 생각해보라). 같은 문제의 또다른 증상은 노동계급과 소수인종의 남성들이 아무리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라 하더라도, 여성들을 억압하는 제도들과 실천들을 기획하고 이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남성들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남성들”에 대한 진술에 자격조건-지배인종, 지배계급, 지배문화의 남성들-을 덧붙여야 함을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노동계급과 소수인종 남성들이 얻는 혜택은 지배집단의 남성들이 얻는 혜택에 비하면 “눈곱만큼”의 효과에 불과하다).

<267쪽, 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정말 그렇다.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코너를 보면 이들이 나온다. 여자들이 밥사는 그날(해방의 그날)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은 능력있는(자본주의 사회에서 곧 돈이 많은) 남성으로서의 위장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당당히 여성들에게도 돈을 쓰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그들은 지금과 같은 성차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 멋있을 수 없다.(없어 보이잖아.) 코너 마무리할 쯤 남성관객들에게 일어서서 다같이 (집회 스타일로) 구호를 외치자고 할 때 그 쭈뼛쭈뼛한 모습들을 보아라. (나에게로 오세요. 더치페이 하고도 연애할 수 있어요. <-이으구, 이 놈의 게이 주책–;)

이들과 함께 가부장제 자본주의를 철폐하면 좋으련만, 어떤 남성들은 이 분노를 여성혐오로 돌리곤 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우리 세대에게 운전면허는 필수다. 운전면허가 없다고 하면 다들 경악을 하며 지금 미리 따놔야 한다며 토씨하나 다르지 않은 말들을 한다. 앞으로 차 운전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 “그럼 여자들이 안 좋아할 텐데”라고 말한다. 그들은 (어떤)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서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런 여성들을 속물이라고 욕한다. <우리결혼했어요>에서 “밥 사줄 때 카드를 꺼내는데, 남자 구실하더라고요”같은 말에 분노하지만 그들도 여성을 하나의 악세서리처럼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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