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를 읽고서-고민 계속

객관적인 것이란 뭘까? 더 설득력 있고, 믿으만한 사실들의 “근거”는 무엇일까? 어떠한 근거와 논리로 나는 설득 당하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이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자연 과학(물리학, 수학, 화학 같은 거)은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을 지녔다.  실험을 통해 어느 누가 해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실’들을 발견했다. 기압이 같은 상황에서 기체는 온도가 올라가면 팽창한다 같은 사실들 말이다.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에는 여러 요인(원인)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하나를 밝혀내기 위해 그 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다른 요인들을 통제하는 방식, 그렇게 여러 요인들을 밝혀내는 방식을 신뢰했다. 그게 나에게 과학이었고,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사회과학, 인간과 관련된 과학들(심리학, 사회학, 생물학)은 여러 요인들이 독립적으로 작용해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고 보기에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고, 관계도 복잡했다. 동성애의 ‘원인’에서 특히 이런걸 많이 느꼈다. 생물학적인, 심리학적인, 문화적인 설명방식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다. 왜 “나”에게 타당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을까? 전문가 집단이 과학적인 절차를 통해 실행한 연구였기에 나와 별 관련이 없는 내용이었다면 ‘그런가 보다’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연구대상이 되자, 그 연구결과들이 직접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자(커밍아웃하면 나에게 이런 연구결과들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난 내가 왜 대답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또 열심히 대답한다), 그 연구가 가지는 정치, 사회, 문화적 측면들이 확 들어왔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주의 사회에서 인종적 차이점의 “순수한 묘사”는 실제로 순수한 정보로 기능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인종차별주의적 가정들은 그러한 “정보”의 “합리적인”응용의 범위를 확연하게 축소시킬 것이다. 더구나 그런 문화 안에서 인종적 차이점에 대한 관심 자체가 인종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적 보고들은 그것이 열등이나 우등이 아니라 차이점들만 묘사하고, 사회정책에 대해 어떤 추천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능한 한 최대한 가치중립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인종 위계적인 사회에서는 바로 이런 종류의 연구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인종차별적 목적에 쓰이게 되리라고 무리 없이 예측할 수 있다(이것은 그런 연구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런 연구에 대한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그 가능한 결과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반대 주장이다).

모든 이가 그 연구결과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 그런 종류의 연구를 객관적 탐구라고 지칭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더구나 일부 사회과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가난, 곤궁, 고문, 또는 잔혹감 같은 사회적 사건들을 가치중립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이런 현상에 직면했을 때 모든 진술은 찬성 아니면 반대 둘 중 하나로 간주된다. 즉, 가치중립적인 제3의 입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건들을 묘사하는 데 객관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연구결과를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로 전락시키는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관찰자인 독자는 자신의 지적만족을 위해 다른 이의 고통과 불행을 소비하는 것이다. 어떤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과학적 방법은 인간에 대한 어떤 절차를 과학적 실험이라 하고 어떤 것을 고문이라 해야 할지를 정해줄 어떤 기준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149쪽, 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세상을 이루는 권력관계들을 읽게 되면서 과학(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도 그 망에서 완벽히 벗어날 순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권력들과 동조하고 심지어 그 권력의 일부분이 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예로, 미국 본토에서 아직 안전한 것으로 판정되지 않은 피임약들을 푸에르토리코에서 먼저 실험을 거치게 함으로써, 미국본토 여성들이 수많은 푸에르토리코 여성들의 건강을 더욱 위험한 상태에 빠트리는 대가로 스스로의 재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여성들은 적어도 한 명의 저명한 의사이자 의학연구자인, J. 마리온 심스에 의해, 실험용 산부인과 시술에 사용됐다. 더구나, 그는 수백 건의 실험을 하는 내내 그 당시 사용됐던 마취제를 쓰지 않았다. 그의 “환자들” 중 두 명은, 한 명은 노예였고 다른 한 명은 아일랜드 출신 빈곤여성이었는데, 실제로 삼십여 번의 시술을 받았다. 의료연구에서 빈곤계층의 사람들을 과학이나 의료 실험들에 사용하는 것은 널리 퍼져있는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유럽계 미국인들 중 빈곤계층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을 행위들을 유색여성들에게 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과학연구를, 의심할 바 없이 과학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시도되었을 연구를, 우리는 실험이라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고문이라고 봐야 하는가? 도대체 실험과 고문의 차이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기준이 과학 안에 있는가? 그런 방식으로 획득한 연구결과들을 보고하거나 그에 대한 도덕적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한 과학자의 책무들은 무엇인가? 이런 용어들과 문제의식들이 비평가들이 최근의 의료문헌들에서 “나치 의사들”이 강제수용서의 유태인 포로들을 이용하여 실험한—독일시민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증신시키기 위해 실시된 실험들—결과를 기록한 보고서들을 일상적으로 인용하는 경우들에 대해 논의할 때 거론되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포로들을 얼음물 속에 빠트리고 그들이 죽어갈 때까지의 특징을 관찰하는 것은 독일의 해군들과 공군들이 북해에 빠졌을 때 생존할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런 실험들이 시행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최근의 논의들에서 이 문제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런 실험들에서 얻어진 결과를 이용할 것인가의 문제도, 이 “연구”를 통해 생산된 “사실들”을 아는 것이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제기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쟁점은 그렇게 생산된 유용한 정보를 이후의 과학 보고서들에서 인용해야 하는 것인가와 어떻게 인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반복하자면, 그것은 실험결과인가 아니면 고문결과인가? 그리고 우리는—혹은 과학은—이 둘 간의 차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용어들은 제 3세계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재생산 실험들을 논의할 때도 적용되어야 하는 용어들이 아닌가? «같은 책 302쪽 »

 입장론은 이성과 과학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비판에 대해 “이성”이나 “과학”은 없으며 단지 추론과 연구 전통들, 제도들, 실천들의 개별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단히 동경의 대상이 되는 사상들과 연구 전통들일지라도 모두가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사상은 언제나 어떤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시작하여 어떤 특별한 역사적 목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성과 과학의 몇몇 형식들의 진보성은 그들이 제시한 사회적 목적들과 가치들에서 나오며, 이런 역사적 특징들과 관계없이 그 가치들이 무엇이든 연구자들이 구체화시키기만 하면 진보성을 띠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이성은 진보적 본능들과 수구적 본능들을 둘 다 갖고 있다. 역사적 조건에 따라 이 충동들이 방출되기도 하고 금지되기도 한다. «같은 책 279쪽 »

과학과 이성이 진보적이라는 건 명백한 거짓이다. 과학(“추론과 연구전통들, 제도들, 실천들의 개별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들”)이 사회/정치적인 영향에 똑 떨어져나와 존재할 수는 없다.

과학은, 사람들이 그것을 해야 하기에, 사회 속에  깊숙이 박힌 활동이다. 과학은 육감, 비전, 직감에 의해 진보한다. 시대에 따른 그 변화의 많은 부분은 절대적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렇게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맥락들의 변화들을 반영한다. 사실들은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정보 조각들이 아니다. 문화 역시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지에 영향을 끼친다. 더구나 이론들은 사실 위에 부과된 상상력이 풍부한 통찰들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상상의 원천 역시 아주 문화적이다.

«Stephen Jay Gould, The Mismeasure of Man, 21~22쪽» 같은 책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과학은 설득의 근거로써 타당한 ‘사실’들을 만들어내는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는 걸까? 그저 힘의 논리에 끌려다니는 보잘것 없는 꼭두각시 인형일까? 나는 이제껏 내가 좀더 “덜 왜곡되고 덜 편파적인 지식”들에 설득되어 왔고 그런 지식들을 생산했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사심 없고, 보편적인 것으로 행세했던 서구의 남성중심적 부르주아 집단들의 지식추구 실천들보다 더 객관적인 과학들을 필요로 한다.

샌드라 하딩은 이제껏 객관적이라고 칭해졌던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객관성이란 개념을 버리지는 않는다.

객관성은 귀중한 역사를 갖고 있다. 내가 원하는 세상과, 경험적 사실로 존재하는 실제 세상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권력이 도덕과 정치의 영역에서 그건 경향을 보인 것처럼 지식추구의 영역에서도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객관성 개념은 그 의미와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구분의 기준들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 오늘날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연과 사회 세계들의 규칙성들과 그 토대를 이루는 인과적 경향들을 찾으려는 시도들에 반대하는, 강력한 이해관계들이 포진해 있다. 어떤 집단들은 기업 농업이나 집안의 정의 가꾸기에 살충제를 뿌리는 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공식적인 조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떤 집단들은 서구 엘리트들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는 경제 생산을 고집하는 것이 제3세계 농민들과, 미국 내 흑인 하위계층, 특히 양쪽 모두에 속해있는 여성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토론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더 강한 객관성을 이룬다는 생각은 자신들의 행동과 주장을 일치시킬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제도들이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고군분투할 때 과거에도 유용했고 오늘날에도 유용할 수 있다. «같은 책 242쪽 » 

대신 “강한 객관성”을 주장한다. 

“강한 객관성”은 하딩이 제기한 가장 괄목할 만한 개념이다.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비판하면서 제기된 강한 객관성은 초역사적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지식은 사회적으로 위치지어진다는 전제를 갖는다. 그런데 지식이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생산되면 이 중에서 어떤 지식이 가장 객관적인 지식인지와 그걸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지의 문제가 곧 제기된다. 하딩은 여성들의 삶에서 시작하는 연구는 지배집단 남성들의 삶에서 시작하는 연구보다 덜 편파적이고 덜 왜곡된 신념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어떤 사회적 상황이 가장 객관적인 지식을 산출해 내는지 결정할 수 있는 역사적 기준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주변인인 여성들의 삶과 타자들(제 3세계 여성들, 레즈비언들 등)의 위치는 덜 왜곡된 지식을 산출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강한 객관성”은 여성들의 삶을 지식생산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상대주의를 극복하게 하는 논리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450쪽 옮긴이 해제에서 »

<‘브레인 섹스’를 읽고서-고민시작> 에서 내가 한 비판들이 단순히 뭘 잘 알지도 못하는 동성애자의 과민반응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연구들의 이성애중심적인 기반들에 대해서, 가치중립적인 척하는 지점들에 있어서 분명 논리적으로 비판했다고 생각하고 그 비판들을 포함한 연구가 진행되었을 때 “강한 객관성”에 보다 근접하지 않을까?

“어떤 지식이 가장 객관적인 지식인지 그걸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난무하는 주장들간의 힘겨루기로 결정되는 건 아닐테다. “내가 하는 말이 곧 진리이니라.”가 아닌, 민주주의의 과학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하는 걸까?

 앞의 장들에서 논의를 펼칠 때, 나는 다음 두 가지 입장들을 피하려고 했다. 하나는 도나 해러웨이가 “신이 내린 묘책”이라 불렀던 묘책을 행하기 위해 “무관점의 관점”에서 사고를 시작하려는 전통적인 서구의 경향이다. 초월적 또는 비역사적 토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경향은, 역사적으로 위치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주장에 반대하는, 그런 관점의 가능한 더 큰 정당성을 결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편협성으로 흘러가게 된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비역사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적 경험의 즉흥적 의식이 더 그럴듯하거나 덜 잘못된 신념을 판별하는 유일하게 정당화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편협성으로 흘러갈 것이 분명한 경험적 토대주의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각 관점들에서 잘못되고 신비주의적인 껍질 속의 쓸 만한 알맹이를 골라내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지식주장의 정당성을 그 주장을 하는 자들과 따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점이 전통적인 견해에서 얻을 수 있는 바람직한 유산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인식론, 과학, “사실들”의 결정의 영역에서 “힘이 정의다”를 신봉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그리고 비록 전통적인 견해 자체는-이 알맹이를 비역사적 토대주의의 찌꺼기 속에 끼워 넣음으로써-과학과 지식 추구에서 “힘이 정의다”를 지지하는 것으로 끝날지라도 그 유산은 귀중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누가 무엇을 언제 말하는가 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를 만든다. 사람들이 권력관계의 서로 반대편에 서서 말할 때는 약한 쪽 삶의 관점이 강한 쪽 삶의 관점보다 더 객관적인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 더구나 더 약한 쪽이 그들의 경험을 분명히 표명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때까지(대개 위험한 행위이긴 하지만), 우리들 누구도 그들의 삶의 관점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같은 책 388쪽 »

하딩은 “여성들의 삶의 관점과 타자들의 위치에서 생산되는 지식”이 그 기준일수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여성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뭔소리인지 감이 안 온다. 그래도 방향은 분명하다.

그들은 “그들의 가설들을 분명히 밝혀야 하고, 그들의 연구방법에 솔직하며, 사려 깊으며, 조심스러워야 하고, 각 연구와 그 의미의 해석에 개방적이어야 하고, 그들의 업적과 그 결론에서 있을 수 있는 함정들을 분명히 하고, 그 연구결과들을 과학적, 비과학적 대중에게 전달할 때 사용하는 언어에 책임을 져야한다.” 더 나아가서 과학에 대한 페미니스트 접근법들은 “자연의 착취와 파괴, 인류나 다른 종들의 파괴를 가져오고 인간들을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또는 국적을 이유로 박해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과학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같은 책 430쪽»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더욱 타당해 보이는 설명들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를 향하는지가 궁금했다. 많이 복잡한 질문이었는데, 이 책 덕분에 조금 정리가 되었다. 연구를 하면서 먹고살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는데, 그 삶의 형태를 가늠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샌드라 하딩이 주장하는 게 그녀의 언어에 들어나는 것 같다. 정확한 언어. 글투가 재밌지는 않지만 그 모든 것(하나도 놓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아는 전부를 다 알고 있는 느낌)을 차분이 다 써내려가는 그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보니 너무 많이 인용하는 거 같긴 하다. 저작권에 걸리진 않겠지?

One thought on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를 읽고서-고민 계속

  1. 진화론에 맞서는 창조설화 옹호론자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네요.
    그렇게 조금씩 일그러트리고 왜곡시키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불확실한 것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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