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을 타자로 재창조하기

여기에 인용된 글들은 모두 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의 11장 우리 자신을 타자로 재창조하기 에서 따왔습니다.

자신을 타자로 재창조하는 과정은 많은 노력과 세심함, 고통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타자로 재창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 사회는 언제나 주류가 되라고, 권력자가 되라고만 할 뿐이다. 읽는 내내 자신을 타자로 재창조하기 위해,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 애쓰는 저자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이렇게 마구잡이로 인용한다.

여성들이 남성페미니스트들의 기획을 합법화시키는 데 시간을 써야 하는가? 유럽계 미국인들이 인종의 역사에서 올바른 편에 서고 싶어 하는 욕구를 해결하는 것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도와주어야 하고, 이성애자들이 이성애주의를 새롭게 생각하는 것을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도와주고, 부자들이 빈곤층의 착취에 반대하는 것을 가난한 자들이 도와야 하는가? 여성들을 협조자라는 그들의 전통적인 역할, 남성들의 보조자라는 그들의 기존의 위치로 돌아가기를 강요하는 것은 최악의 지침이 아닌가? 많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차라리 트럭에 치여 죽기를 바랄 것이다. 더구나 그런 지침에 평생 헌신하는 것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엄청난 지적, 사회적 박탈감과 함께 환멸을 느끼게 하는 음울한 삶에 처하게 할 것이다. 그러한 기획에 저항하는 “인식론적 분리주의자”적 태도는 그 자체로 귀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나는 모든 페미니스트가—결코 그들 대다수가—그녀의 시간을 그렇게 사용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비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결코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여성만을 위한”페미니즘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누릴 여유도 없고 바란 적도 없는 사치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것 아닌가.

 트럭에 치어 죽기를 바란다는 데서 빵 터졌어.

유럽계 미국인들이 제 3세계 출신의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이 제공한 분석들을 사용하여 유럽계 미국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은 페미니즘에 사치가 아니라 필수라고 여겨질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이들이 생각할지도 모르듯이 백인 자아도취의 행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그들의 삶의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또 그들과 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다. 나는 이 담론에 정확히 유럽계 미국여성으로, 참여하려 한다. 나는 내가 어떻게 다른 백인들과 유색인종들과 연결되는지를 배움으로써, 유럽계 미국 여성으로서의 나의 신념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배움으로써, 나의 정체성, 나의 인종적, 사회적 위치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한다. 내가 추구하는 자아의 이해는, 내 자신을 제 3세계 출신 사상가들이 창조한 분석들 속에 유럽계 미국 사람으로 위치시킴으로써, 그다음 그들이 제공한 설명들의 도움을 받아—그렇지만 여전히 내 자신의 다른 사회적 위치에서 나온—나의 세계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분석을 계속한 결과,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인종적 위치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애쓰지만, 제 3세계 출신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우리 주장들의 타당성은 누가 그것들을 주장하는가와는 관계없어야 하지만, 누가 무엇을, 언제, 누구에게 말하는가는 여전히 중요하다.



첫 번째로 페미니스트 지식의 주체—이러한 덜 편파적이고 덜 왜곡된 기술들과 설명들의 행위자—는 복합적이고 심지어 모순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여성들은 부자 또는 가난한 자, 흑인 또는 백인, 이탈리아인 또는 중국인, 이성애자 또는 레즈비언 등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문화적 형태로만 존재한다. 문화적 형태에는 과학 지식의 생산자 대 소비자, 딸 대 또 어머니이기도 한 자 등도 포함된다. 이런 여러 가지 삶의 많은 면에서 서로 상충—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반대—되지만 각자는 잠재적으로 페미니스트 지식의, 자연적 및 사회적 삶의 덜 편파적이고 덜 왜곡된 기술을 위한 출발점이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사상이나 지식은 단순히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발언”이 아니라 다중적이고 흔히 모순적인 인식들이다. 페미니스트 지식의 주체로서 “여성들”이라는 집합은 다중적이다.(생략)

따라서 그리고 두 번째로, 입장론의 논리는 해방적인 페미니스트 지식의 주체가 또한 다른 모든 해방적 지식 기회의 주체이기를 요구한다. 레즈비언들, 빈곤여성들, 흑인 여성들 모두가 여성들이기에 페미니즘은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가 서로를 구성하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파악해야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주변화된 여성들에게 해방적일 뿐만 아니라 지배집단 여성들에게도 그들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최대한 과학적이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사고가 “최상의 신념들”과 남성들로서 남성들의 이기주의에 봉사하는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페미니즘과 지배집단 여성들의 좁은 이기주의 사이를 구별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해방적 운동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생략)

세 번째로, 그러므로 여성들은 페미니스트 지식의 유일한 생산자들일 수 없다. 여성들은 이런 능력을 자신들 특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고, 남성들이 그들이 여성이 아니란 이유로 온전한 페미니스트 분석들의 생산을 시도하기를 거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남성들도 역시 그들의 특이한 사회적 상황에 그리고 거기에 대해 독특한 형태의 분명히 페미니스트 이론이 그 풍부하고 모순된 경향들로 우리 모두—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까지도—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웠던,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들의 삶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남성들의 사고는 여성들의 삶에서 출발하여 남성들이 그 속에서 그들 자신의 삶을 덜 편파적이고 덜 왜곡된 방식으로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객관적인 이론적 틀을 얻게 될 것이다.(생략) 역사학자들은 과거가 현시대의 조직들과 사회적 관습들을 조사하기 위한 더 넓은 정황이나 대비되는 관점을 창조함으로써 현재를 조명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주장한다. 똑같은 이유로 “먼 현재”는 “가까운 현재”를 조명할 수 있다. 남성들의 경우, 여성들의 삶의 시점은 더 넓은 정황이나 대비되는 관점을 창조함으로써, 그로부터 그들 자신의 신념과 행위, 사회적 관계들, 조직들에서 발생하는 제도와 관행들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그들 자신의 삶을 조명할 수 있다. 남성들은 남성우월주의가 금지했던 일종의 자신들의 젠더적 위치의 경험을 창조하기 위해 투쟁해야한다.  



그녀는 그녀가 자라난 남부의 마을을, 남부 연방에 충성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주입시키려던 편파적이고 왜곡된 형상과 그녀가 흑인들의 삶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로 배운 뒤 그 마을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대비시킴으로써, 재형상화 시키고 있다. 마을 외곽의 아름다운—그녀가 어린 시절 자주 소풍가던—나무가, 린치에 대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에 나오던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사실은 많은 “이상한 과일들”(린치로 죽임을 당한 두명의 흑인 남성들을 상징한다)이 매달려있던 그 나무라는 사실과 화해를 하려고 애쓴다. 그녀는 백인, 남부출신, 레즈비언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성의 긍정적인 사용법들을 찾아—남부가 인종차별주의자 남부인에게 의미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분노와 증오와 조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어쨌든, 남성들로서 그들은 여성들에게는 아직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자원들에 접근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페미니즘 안에”있으며 페미니즘을 이용해서 그들의 경력이나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의 여성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알고 있듯이 정치적 투쟁을 지식의 전제 조건이다. 남성들은 그들 남성 동료들의 성차별주의를 그들 동료들에게 솔직하게 비판할 때 진정으로 가부장적 권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효율적인 반인종차별주의적 통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나는 어려운 임무들을 맡아야 한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유색인들이 말한 것을 단지 되풀이 할 수만은 없다. 나는 유색인들에 대해서, 그들의 투쟁과, 그들의 문화들에 대해서 내 자신을 교육시켜야 한다. 나는 내 자신의 무식—철학자 매릴린 프라이가 논한 문화적으로 혜택 받은 백인 무식—도 공부해야 한다. 나는 백인 착취, 지배, 박해, 특권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나는 남성들이 그들 자신에게 특권을 주는 조건들에 대해 만들어 냈으면 하는, 그런 종류의 조건들에 대한 설명들을 내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능력에 기반을 둔 반인종차별주의, 능력에 기반을 둔 남성 페미니즘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고통스럽니 않다면, 나는 아마도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나의 그렇게 많은 생각들과 실천들을 이끌어 온 비의도적인 인종차별적 가설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내가 반인종차별주의 작업의 일부를 시행하려고 시도하는 바로 그 순간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그래서 반역적 정체성이나 사회적 위치를 달성하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작업들이 주는 도전을 즐긴다.



인종차별주의와 계급 착취를 저지를 사람은, 결국은, 나와 같은 종류의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다. 내가 내 인종과 계급에 대한 반역적 감감을 활성화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성차별주의자들을 비판할 때 지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아래로 내려다보며 연구하기”를 권장하는 셈이 된다. 게다가 내가 내 인종에 대해서 단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관점에서만 배운다든지, 또는, 완전히 반대로, 유색인들의 관점에서만 배우게 된다면,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점을 내 자신으로부터 박탈하게 되는 셈이다. 나는 나의 인종적 정체성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정의할 때 능동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셈이 된다. 나는 타인들이 나에게 배정한 수동적이고, 무저항적이며, 비창조적인 역할을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나는 내 자신이 로봇으로, 하나의 물체로, 그들의 연극들 속으로 삽입되는 것을 허용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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