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문화의 가부장성 비판과 “게이 혹평하기” 사이 어딘가

 일레인 쇼월터가 지적했듯이 “여자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남성은 잔지 “투찌”—여자보다 더 여자를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특별히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 담론에 참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노력은 거부하는 그런 남성—가 돼버리곤 했었다.

각주) 투찌는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에서 여성 복장을 하고 다니는 남성 주인공으로, 여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여성보다 자신이 더 많이 안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이런 입장을 비판할 수 있으면서도 “게이를 혹평하는 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404쪽» 

예전에 썼던 글인데,

 농담.

 커뮤니티에 들어와서 주로 게이들끼리 하는 이런 저런 농담들 (“언니 동생하자.”, “야 이년아.” “저년이 미친 년일세.” “한 번 하는데 얼마?” “싸구려.” “오늘 밤은 조금 팔려야 할 텐데.”)1) 속에서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웃으면서 놀았다. 음담패설이 게이의 입에서 나올 때, 속을 뚫어주는 쾌활한 무엇이 있었다. 이성애자 남성들이 득실대는 공간에서 벙어리나 거짓말쟁이가 되는 수밖에 없었던 나의 욕망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쾌감이었을 게다. 코미디 프로를 보고 웃는 느낌은 아니었다. 뭔가 복합적이면서도 색깔이 계속해서 바뀌는… 술집에서 ‘누가 우릴 어떻게 볼까’하는 공포, ‘알면 어쩔건데’하는 자포자기+용기, 금지되었던 여성적인 말투와 행동을 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자기비하,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가치와 질문들을 “식이 되냐, 안 되냐”로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전복, +α. 이 모든 것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서 다가오는 해방 비슷한 무엇이었다.

 커뮤니티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동성애자로서 훌륭히 정체화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왜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더 이상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닐 때 이 사회가 이상한 건데, 그걸 언어로 풀어내지 못했다. 거기서 나는 여성주의를 만났다. 그리고 여성주의를 배우면서 나의 언어가, 이 사회가 가진 백인, 이성애자, 중산층, 비장애인, 남성 중심성을 함께 보게 되었다. 내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마냥 약자인 것만도 아니고, 있는지도 몰랐던 내가 누리던 기득권의 위치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속적인 용돈과 부모님을 모셔야 할 걱정이 없는 나의 경제적인 위치나, 여성만 골라 죽이는 살인마들이 뉴스에 간간히 나오는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공포 없이 편안하게 살아온 남성으로서의 위치, 길을 걸으며 턱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비장애인으로서의 위치.

그러면서 이제껏 이곳에서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농담들 중 어떤 것들은 내가 기득권 위치에 있었기에 웃고 떠들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년 저년”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맥락이 있고2), 그 말들로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저 옆에 앉아있다손 치더라도) 같이 웃을 수 없었겠구나. 다시 그 기억들이 떠올라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성애자들의 공간에서 그런 것처럼.

 동아리에서 남자둘이 붙어있는 사진을 찍어서 “커밍아웃”이라고 이름 붙여놓고는 “커플 탄생 축하난다”는 식의 리플들이 달린 적이 있었다. “희화화되는 것이 기분이 나쁘군요. 정말 연애관계라도 웃긴 건가요? 아니면 연애관계가 아니라는 확신아래 맘껏 웃고 있는 건가요?”라고 리플로 쏘아붙여 줬지만, 그건 내가 선배였기 때문에, 그 공간에 더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3) 나에게 중요한 부분이 농담의 추임새로 들어가는 공간에서 나는 편할 수 없었다.

‘동성연애자’라는 단어가 공공연히 쓰이는 곳이 불편한 이유는 그 사람이 동성애자들을 욕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아마 별 생각 없이 썼을 것이다. ‘동성연애자’라는 단어가 이제껏 동성애자를 그저 그런 연애나 하는 사람4)으로 우습게 봤던 역사 속에서 쓰여 왔음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보여 불편하다. ‘당연히 모를 수 있다’고 나의 사회적 약자로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화를 삭힌 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도 ‘그게 무슨 큰 문제라고. 별것도 아닌 걸로.’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면 힘이 빠진다. 동성애자로서의 나의 삶과 일상의 즐거움, 고통, 설렘, 분노를 이야기해도 그저 ‘비정상’적인 소수의 이야기로만 볼 게 뻔해서 입을 닫는다. 마음을 닫는다.

 어쩌면 이 글이 그저 “농담도 못 하겠네”, 머리 아픈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 같은 시대에 “돈 걱정 없고, 시간 많은 애가 지 잘난 맛에 훈계하려 하는 구나”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진심이 가 닿았으면 좋겠다. 이 글이 냉소가 아니라,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희망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각주

1) 이런 식의 농담을 하면서 노는 문화는 게이 문화라 할 수 있을 만큼 게이 커뮤니티에 널리 퍼져 있다.

2) 물론 게이들이 이런 말을 쓸 때는 친한 여자친구 사이에서 정겹게 “야 이년아. 왜 연락 안 해?”처럼 애정을 담아 쓰는 맥락과 비슷하다.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이런 단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맥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게이도 그냥 남성으로 보이곤 하기에) 비하의 의미로 느껴질 수 있다.

3) 다행히 동아리에서는 내 리플을 보고 그 사진과 글을 삭제하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했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너무 고마웠고, 아직도 그 동아리는 나에게 소중한 공간으로 기억된다.

4) 그러니 커밍아웃해도 아무렇지 않게 “결혼은 할 거지?”라고 묻지요.

  이 글의 초안은 커뮤니티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꽤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부분은 “게이를 혹평하는 것”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쉽게 싸잡아 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섬세하게 비판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이 정치적 복수성(political pluralism)에 의하면, 페미니즘의 가치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 정해지지 않는다. 이는 여성에 대한 억압에 맞써 싸우는 걸 약화시킬 것이다. 비슷하게, 게이 운동의 가치는 페미니스트 투쟁에 얼마나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 레즈비언과 게이에 대한 억압에 대한 정치적 투쟁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있다.

«Homo Economics 의 Michael P. Jacobs, Do Gay Men Have a Stake in Male Privilege?에서 발췌»

가끔씩 게이문화의 가부장성에 대해 비판하면서 게이커뮤니티 자체의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여겨질 말들을 듣거나 했던 것 같다.

Leave a comment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