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라는 노래 구절이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외치는 저항의 노래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의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구절을 부를 때마다 항상 흠찟 했고, 입모양만 부르는 척 했다. 다른 맥락이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이란 “사고 파는”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일만을 지칭하고 그 외의 수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들은 삭제되어 있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교환가치를 아닌 다른 가치들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가사를 듣는 순간 그 공간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을 것 같았다. 물론 일(노동)을 교환가치로만 여기고 그 외의 가치들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먹지도 마라라고 할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그 공간에 있진 않다. 오히려 교환가치만을 유일한 가치로 정의할 때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사람은 자본가 남성일 테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다른 맥락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다른 맥락으로 불편한 사람들이 알아서 이해해주길 바랄때, 유체이탈은 사라지지 않을 터이고 그것이 함께하기 힘든 요인 되곤 할거다.

우선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명제를 살펴보지요.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해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경제 내에서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은 사용가치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리고 ‘반드시’ 교환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본가나 화폐 소유자에 의해 구매될 수 있는 무엇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지요. 노동이 이렇게 가치를 생산해내는 활동으로 제한될 때,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 있게 살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을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치환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욕망은 자신의 활동을 판매하고 싶다는 욕망, 즉 자본에 의해 구매되어 자본에 포섭되고 싶다는 욕망이고, 이런 점에서 노동의 욕망은 자본의 욕망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164쪽»

내가 인권단체에서 적은 돈을 받고 활동을 한다면 나는 가치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그게 ‘제대로 된 직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의아해하곤 한다. 노동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노동자체를 위계화하고 있어서(아무래도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진짜’ 노동이 아닐까 하고) 인 걸까? 좀 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직업을 갖고 싶은 걸까? 자본의 욕망에 벗어나지 못한 거?

언제부턴가 모든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고 노동의 가치가 절대화되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을 노동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에 비판적이 되었다.

경제결정론은 인간 사회란 토대인 경제적 생산관계 위에 정치•법률•사회제도•종교•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경제적 생산관계가 사회 및 사회 구성원들의 삶 전반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입장이로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책, 166쪽»

애벌리는 손상된 몸을 지닌 사람들을 노동의 영역으로 완전히 통합시키고자 하는 입장은 현재에도 적절한 전략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모든 장애인들이 희망할 수 있는 미래의 대안 또한 될 수 없음을 인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노동에 대한 접근으로부터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배제가 장애인 억압의 주요한 측면임을 부정하지 않으며, 고용에 대한 접근을 증가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에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동 영역으로의 재진입이라는 역방향으로만 돌진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새로운 방향으로 시야를 돌려 전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애벌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현재 장애인에 대한 노동의 기회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기존의 복지 체계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진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격감시키면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적인 노동 연계 복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간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는 전체 장애인들이 일정한 수준에서나마 해방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복지 체계가 유지되고 향상되며, 무엇보다도 민주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노동에 기초한 시민권의 보장이 아니라, 개별적 노동과 연결시키지 않고 미성년자를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조건없이 기본 생계비를 보장하는 기본소득의 체계가 장애인들의 완전한 사회 통합에 훨씬 더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노동 중심의 가치가 극복되는 가운데에서만 진정으로 구축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일하지 않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러한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가 단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경제 중심적 체계라면 모든 장애인들에게 해방적 공간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같은 책, 173쪽»

하지만 지금 갑자기(그럴 일은 없겠지만서도) 기본소득의 체계가 이루어진다고 상상해도 그건 뭔가 찝찝했다. 주어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온갖 곳에서 장애인의 경험, 주장들이 터져 나와야 한다. 그것들이 점점 더 커질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활동은 경제적 영역에서의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활동을 당연히 포괄합니다. 정치가들이 경제적인 가치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사회가 그들에게 어떤 대가를, 그것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에서의 완전고용이라는 것이 시장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에서나 가능한 헛된 구호가 되어 버린 ‘제2차 현대’에서는, 억압되어 있었던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활동을 공적으로 복구하는 것이 이중적 의미에서의 적극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시민 노동의 확립은 한편에서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 활동을 확장하여 취업자/실업자의 경계를 해체하고, 자원의 분배라는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규범을 확립하게 합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시민 노동을 통해서 경제에 묻어 들어가 있었던 사회정치적 영역을 다시 끌어내 오고 노동 시민이 아니라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는 것은, ‘인민(시민)에 의한 통치’라는 그 본래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사회를 작동할 수 있게 만듭니다. 폴라니는 근대 시장경제와 정치적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갈등적인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은 현재처럼 시장경제가 정치를 규정하고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같은 책,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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