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지금 여기에서

줄줄이 써내려왔지만 지금 여기에서 나는 나만의 방에 숨어있다.

이곳의 권력구조를 좀 더 민주적으로 바꾸기에 나는 너무 미약하다. 그저 조금 착한 선임을 뿐이다. 귀찮게 안하려 노력하는,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항상 책만 읽는, 말도 없고 재미도 없는 다른 부류의 사람.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결국 나만 좀파먹고 말테다. 이렇게 도망칠 수 없는 위계질서에 쩔어있는 곳에서, 멀어질 수도 가까워지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살다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그나마 소통 가능하고 비교적 민주적인 공간(우리집, 대학교)에서 살아왔는지 알겠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처럼 억압적인 공간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겠지. 여기서도 결국 부딪혀야만 한다.

시스템을 바꾸어야 그나마 변화가 지속가능할텐데, 내가 상상하는 방식은 고참이 된 후 후임들을 설득하는 거다. 후임들이 악폐습 같은 걸 고발할 적이 있었는데, 가시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곳은 이곳 사람들끼리 모든 시간을 부딪히며 사는 곳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힘은 잘 닿지 않을 뿐더러, 군대는 근본적으로 위계질서를 바꿀 생각이 없기에 거기서 도움을 받는 한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부당함에 그렇게라도 저항하는 그들의 용기는 엄청나다. 나를 포함한 매우 많은 이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침묵하고 복종한다.

나의 설득이 강요가 될 지, 저항이 있어 나름 토론 비슷하게 될지는 내가 하기에 달렸다. 언행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 시스템의 폐해를 공유하고,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점점 혜택 받는 입장이 될수록 무뎌진다. 나를 포함해, 과연 고참이 되어 지금의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일이 있고 모두가 공평하게 하는 건 결과적으로 보면 맞다. (신참 때 많이 하고 고참이 되면 안하는 거니까.) 하지만 신참에게 일이 몰리면 일만 몰리는 건 아니다. 워낙에 겁에 질려있는 상태이니까 그걸 이용해 먹는 인간들이 있다. 쓸데없는 심부름 시키고 괜히 짜증내고 말이다. 꼽창을 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방을 비슷한 계급별로 쓰고 이런건 군에서 이루어지는 좋은 변화인 것 같다. 정이 없어져서 싫다고 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누구의 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빨래를 할 때 각 방별로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신참들한테 자기 팬티 찾아오라고 땡깡부리는 꼴을 좀 덜 볼 수 있겠지. 병장이 되면 주변 사람들이랑 이야기해봐야지.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다만 언제가 좋을까, 누구에게가 좋을까가 문제다. 아마 일단은 나와 같은 생활관 쓰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럼 더 이상 내앞에서는 노골적인 호모포비아 발언을 하는 일은 없겠지.

여성 혐오/비하 욕설과 성차별적인 발언들은 병장때쯤이나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직접적으로 뭐라고 하기 힘들다. 그래도 이런건 한 번 해볼까 생각중이다. 진실로 궁금한 얼굴을 하고 “그런 욕들을 원래 사회에서도 잘 썼습니까? 아니면 여기와서 배운 겁니까?”라고 물어보는 정도. 그리고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후임 한 친구에게는 편지를 써주기로 했다. 내가 요즘 너무 힘이 없고 우울한 걸 보고 궁금해하길래 말이다. 말로 하기엔 듣는 사람도 너무 많고 그럴만한 공간도 없어서 편지가 좋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구구절절이 써야지.

사실 난 외부자의 위치에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이가 많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생활관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다른 부서가 좌지우지 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쟨 뭔 상관이야? 한 것도 없으면서”라고 생깔거 같다. 지금 걱정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지치지 않고 열심히 해야지.

저번에 한 번은 휴가나가서 친구가 말하는 걸 따라했다. 여기서는 후임들이 말하면 비아냥거리며 어눌하게 따라하면서 놀리는 인간들이 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한 것 같다. 순간 그냥 말투가 귀여워서 따라했다고 속으로 변명했지만 여기 오기 전에는 그러지 않은 걸 보면 배운거다. 의식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미안해 친구야. 무뎌지지 말아야지.

지금은 우울에 빠져 벗어나오질 못하는 상태라 아무런 에너지도 낼 수 없는 상태지만 그래,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계획이라도 짜야했기에 이 글을 쓴다.

2 thoughts on “그래, 지금 여기에서

    1. 자기보다 낮은 사람 괴롭히는 몹쓸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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