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민망함과 찝찝함

1. 민망함

내 글에는 “우리는 이러해야 한다”는 꽤 강한 주장이 들어있다. 대부분은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좀 킁킁댄 결과, 가르치려드려는 냄새가 살짝 풍기기도 한다.  열심히 타자를 치는 이유가 ‘답답해서 이 말은  꼭 해야겠어’, ‘이런 게 고민이야’,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라기 보단, ‘옳은 말을 써야만 해’, ‘혹시 내가 이렇게 한쪽 면만 보는 걸로 오해하면 어떡하지’ 쪽으로 치우쳐 있을 때가 있다. 경험이 아니라 추상적인 단어들의 집합으로 그 뜻이 표현될 때는 그 치우침이 확연히 느껴지곤 한다. (더 많은 관점들을 고려하고 고민하는 글이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런 글을 쓰려하는게 민망한 것 같다. 게다가 거기에 깨달음을 얻은 도인같은 말투로 끄적거려놨으니, 더욱더.

2. 찝찝함

횡설수설하게 될 듯 하지만, 일단 여기서 출발해야 겠다.

어떤 말은 해도 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할까?


  • 이 답을 알아야 하는 이유 내가 이걸 알아야만, 나만의 철학과 논리 기준을 갖추어야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이 답에 따라 내가 어디서 불편해지고 불편해져야 하는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를 접하기 전에는 ~년이나 좃나같은 말들이 지금과 같이 불편하진 않았다. 동성연애자라는 단어도 처음에는 동성애자랑 뭐가 다른지 몰라 아무렇지 않다가 그 맥락(동성애을 정체성으로 보지 않고, 동성애자를 그저 변태적인 연애나 하는 사람으로 칭하며 쓰여왔던 역사가 있다)을 알고 불편해졌다가 요즘은 또 별로 불편하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 단어을 쓰는 이들은 동성애자로 고쳐써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을 거란 생각에)


  • 예전에 어떤 친구가 농담처럼(으로) 자기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했다. 난 그건 마치 이성애공간에서 당당하게 “난 동성애를 혐오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럼 말은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외국인들 앞에서 이런말을 하는 건 아니고 말하는 건 자유니까 강제할 수는 없지 않냐고 했다. 난 내가 입을 손으로 막지는 못하겠지만 계속 이런 말을 쓴다면 모임에 “우리 이런 말을 쓰지 말자”고 건의할 거라고 했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인데) 어쩌면 그 친구는 ‘난 누가 자기가 동성애 혐오자라고 해도 상관 없어. 차라리 내가 말을 맘껏 할 수 있는 쪽이 나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사실 그 모임에서 어느 쪽이 더 편한지에 따라 다수결로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다. 공감과 이해는 없고 또 다시 소수의 불편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겠지?


  • 17. 혁명가들이 무시무시한 진지함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연인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젊은 베르테르가 농담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스탈린이 농담을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둘 다 필사적일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이다.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의 상대성, 사회나 관계에 내재된 모순, 욕망의 다양성과 충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자극물 위를 미끄러져 넘어갈 수 있었고, 그것을 비스듬하게 바라보며 눈을 찡긋할 수 있었고, 실제로 말을 하지 않고도 비판을 할 수 있었다…….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알랭 드 보통,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92쪽»

    가끔씩 내가(혹은 누군가가) 어떠어떠한 말을 쓰지 말았으면 좋다고 주장/간청할 때 무시무시한 진지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확실히 난 “다양성으로 인정할 수 없”을 만한 걸 “필사적으로 강렬히” 반대하고 한다. 그 절박함과 진지함이 우리를 숨막히는 공간으로 밀어넣는다. 나도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싶지 않다. 농담으로 받아넘기고 싶다. 하지만 난 누가 자기 옛 애인을 “게이같은 년”이라고 욕할 때, “누가 나 불러?”라고 받아치지 못한다. 한다쳐도 농담으로 받아줄지도 의문이다. 내가 부족한 건 재치도 용기도 아니다. 권력관계. 글쎄다. 커밍아웃하고도 잘 지내는 사이이고 내가 후임이 아니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농담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내가 부러운 건 농담이 아니라 농담할 수 있는 위치다.

  • ‘남녀관계’, ‘이성간에’, ‘여자친구’. 이성애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런 말들은 문제적이다. 바꾸고 싶다. 그런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내가 불편하고 짜증나야 할까? 안 그러고 싶다. 다들 열심히 웃고 떠들며 놀고 있는데 나 혼자 안드로메다 한바퀴 돌고 와야 하나? 만약 저 말들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나는 저 더러운 꼴등을 방기하는 걸까? 결국 이 안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서서히 자기 안으로 침잠하게 될 다른 이들의 고통을 나의 편안함과 맞바꾸는 걸까?


  • 어떠한 말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쓰지 말라고 이야기 될 때, 나는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움츠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죄책감이 들고, (주류적인) 무식함에 반성했다. 그 후 처음 든 생각은 도대체 어떠한 말까지 쓰면 안 되는 걸까? 그 경계가 궁금했다. 매우 쉬운 해결책이기도 했고, 말 자체가 상처가 되니까 그 말을 안 하면 상처를 받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 말은 깊고 튼튼한 뿌리를 가진 나무의 잎사귀에 불과하다. 그 잎이 잘려도 다른 잎이 자랄 수 있다. “이 말은 나에게 이러저러해서 상처가 돼.”라고 말할 때에는 그 뿌리를 나와 같이 봐주길 바라는 거다. 말에 얽매여서 나의 언어를 제한하는데 초점이 집중될수록 잎사귀 잘린 앙상한 나무밖에 남지 않는다. 뿌리를 보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시켜 꽃을 피워낼 수 있어야 한다. 말을 하다보면 어쩌면 시작은 실수하고 상처주는 일 투성이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이 사과하고 용서하고, 말하고 듣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상처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침묵이 답이 될 순 없다.


  • ‘여자친구’란 단어를 쓴다고 항상 불편한 것도 아니다. 게이인 나를 그나마 배려하려 노력하는 친구가 쓸 때에는 넘어갈 수 있다.(안드로메다까지 안 가고 천장에만 갔다가 돌아온다.) 하지만 군대에서 그 단어를 수십번쯤 듣고만 있을라치면 안드로메다를 폭파시켜 버리고 싶다. 의미도 없이 말 앞뒤에다 씨발을 붙여대는 건 직접 어떤 사람을 미친년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그러려니하고 넘길 수 있다.


  • 여성주의를 배우면서 ‘아줌마’라는 단어가 남성중심적인 맥락에서 집에서 애나 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는 여성으로 해석되는 지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할 때 아줌마란 단어가 (특히나 남성의 입에서) 나올 때, 우리는 불편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아줌마란 단어는 사용하지 맙시다. 이러저러한 맥락이 담겨져 있으니까요.”라고 주장하진 못했다. 그저 “저는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아줌마란 단어보단 여성 노동자란 단어를 사용합니다.”정도로 나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어떤 말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고 자신의 해석을 밀어붙여 그 말을 하나의 해석으로 ‘완성’시켜버리려는 것은 독재자나 독재자를 탐하는 자만이 가능한 시도이다. 언어를 하나의 의미로만 고정(박제화)시키려 할 때 우리는 더 많은 목소리를 삭제하게 될 거다. 결국 언어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못하니까.


  • ……



4 thoughts on “나의 민망함과 찝찝함

  1. 혹시 안드로메다로 간다, 혹은 갔다왔다.
    이런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건지 아는 사람 있나요??

    응답

    1. 주로 언행이 4차원적인 걸 표현하는 걸 안드로메다로 간다는 걸 표현하다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런 느낌을 표현하려는 것까지 확장된 것으로 알고 있는…

    2. 나도 그런 의미로 쓴 거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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