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있어

‘힘’이 있어

나의 어릴 적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는 엄마의 멍 든 등에 파스를 발라주는 것이다. 정오 가량의 햇빛 아래에서 너무나도 무거운 고요 사이로 간간히 들려오는 엄마의 흐느낌. 바닥에 뿌려진 유리조각들을 피해 조심조심 걸어가 그의 등에 파스를 발라주었다. 그 파스냄새와 그 적막함 그리고 너무나도 밝은 햇빛. 아마 죽을 때까지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 날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밤에 나는 형과 손을 잡고 이불 밑에 숨어 흐느끼거나 어느 날은 너무나도 무서워서 침대 밑에서 잠들어야 했다. 죽을 만큼 무서웠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나를 언제나 지배했고 그럼에도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살았다. 웃어야만 했다. 나를 해치지 말아요,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예요.

생각해보면 난 참 착한아이였다. 지금도 속은 착하다고 언제나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말이다) 중학교 때까지 정말 착한 아이였던 것 같다. 착했다. 언제나 두려워했고 그래서 말 잘 들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웃어주는 그런 아이였다.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그렇게 지내다가 고1이었던 거 같다. 그날도 난리가 났고 물건과 비명이 집 안을 날아다녔다. 중간에 서서 말리고 있던 중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폭발할 것 같았고 그래서 옆에 있던 도자기로 만들어진 장식품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잠시였고 그가 이상한 괴성을 지르면서 나를 밀쳐댔고 몇 번 밀쳐지다가 나도 밀쳐버렸다. 그는 어디에 부딪혔는지 머리가 조금 찢어져 피를 보셨고 나에게 박치기를 해댔다. 나는 입술은 다 터지고 엉망으로 엄마랑 형이랑 같이 쫓겨났고 막내 이모 집으로 갔다. TV를 트니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그 날이 9.11이었던 것이다. 그 이미지와 그 날의 일들이 얽혀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버렸다.

결과가 어쨌든 내 입술이 다 터졌다하더라도 나에게 그 날은 승리의 날이었다. 내 ‘힘’을 발견한 날이었으니까. 내가 그를 당황시키고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를 때려눕히진 못하더라도(그러고 싶지도 않고) 내가 그의 세상, 그가 꿈꾸는, 그가 강요했던, 그만의 세상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난 그의 세상의 중요한 ‘부품’이니까) 그때 이후로, 내 ‘힘’을 발견한 이후로 날 건드리는 놈은 가만두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하지만 천성이 그런지, 아니면 그러한 폭력과 아버지의 폭력이 겹쳐져서 인지 그래본 적은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자기방어훈련은 내가 그때 느꼈던 그 ‘힘’을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까? 그 ‘힘’이 물리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 ‘힘’은 그런 물리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강요되어지는 각본, 대사들을 쭉쭉 찢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난 너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난 나를 지킬 수 있어. 나는 지금 당장 상처받는다 하더라도 치유할 수 있어. 난 힘이 있어.

웹진2 내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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