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대신 이 년 저년

가뭇가뭇, 또 수염이 자란다. 또래 애들보다는 늦게부터 나기 시작한 수염이고, 덥수룩하게 자라지도 않지만 그래봐야 수염일 뿐이다. 아무리 적다곤 해도 며칠에 한 번씩은 면도를 하는 수밖에 없다. 수염이 자라는 것은 끔찍하게 싫지만, 그렇다고 면도를 부지런히 하지는 않는다. 키스 할 때 따갑다거나, 보기 지저분하다거나, 아무튼 누군가의 지적이 있기 전까지는 그저 내버려 두고만 있는다.
귀찮아서는 아니다. 의식하고 싶지 않아서다. 수염이 자라는, 남성의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염이 자란다고 해서 어라 너 남자구나, 하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으니 신경을 쓰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다. 남성들과 어울려 다니지도 않고, 특별히 남성성이 두드러지지도 않는 내게 있어, ‘남성의 몸을 갖고 있음’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면도인 것이다.
그런 탓에, 가끔씩 하는 면도 역시 기괴한 꼴을 하고 있다. 면도기와 면도크림, 아니면 비누거품만으로도 몇 초면 끝낼 수 있는 것을, 괜히 면도기를 쓰지 않느라 몇 배나 되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면도기는 고사하고, 멀쩡한 전기 면도기마저 어딘가에 묵혀 둔 채, 눈썹칼을 갖고 면도를 한다. 맨살을 칼날로 긁어대는 통에 코밑은 화끈거리고, 제 용도가 아닌 탓에 말끔히 면도가 되지도 않지만 굳이 굳이 그것을 고집한다.
우아한 플라멩고처럼 생긴 분홍색의 칼이다. 비록 남성의 몸을 갖고 있지만, 남성들처럼 살지는 않는다는, 혼자만의 작은 증거다. 물론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애지중지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다. 웃옷을 벗은 모델이 얼굴에 잔뜩 크림을 바르고 한껏 멋을 부리며 면도하는 모습을 수염을 깎을 때마다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에는, 이런 식의 자잘한 증거들이 필요하다. 나의 몸이 내게는 아무런 증거가 되어 주지 않는 탓에, 행동이나 습관에서 나타나는 증거들이 필요한 것이다.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기대기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컵을 쥘 때 새끼 손가락을 펴거나, 웃을 때 입을 가리거나, 그런 것에서 시작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쯤 의식적으로 만든 습관은 다행히 지금까지도 잘 이어지고 있다. 우습게도 그런 습관들은 ‘여자 같은 남자’라는 호명을 통해 뜻하지 않게 남성의 몸을 갖고 있음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묘한 자긍심을 주기도 한다.
여성 정체성을 가지면서는, 또 다른 증거가 필요해졌다. 이전까지는 그저, 스스로가 보기에 ‘여자 같은’ 구석들이 있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여성으로 존재해야 했다. 몰래 하는 면도나, 혼자만 신경쓰는 자잘한 버릇들이 아니라, 나와 타인 사이에 오가는 증거가 필요해 진 것이다.
그래서 늘 ‘언니’라는 말이 부러웠다. ‘여자들끼리'(물론 ‘여성주의자끼리’의 성질이 크지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이름을 나도 하나쯤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남성의 몸에서 나오는 언니라는 말은 그런 의미를 갖기 어렵다. 최소한 내가 아는 남성들 중 ‘언니’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장난으로 사용한다. 악의가 없다고는 해도, 거기에는 무언지 모를 비하의 느낌이 깔려 있다.
아아, 그래서 나는 엇나가고 말았다. ‘여자들끼리’의 또 다른 호명, ‘년’을 선택해 버린 것이다. 어쩌면 델마와 루이스 쯤 되는 활동적인 여성상에 대한 클리셰 중의 하나일 뿐이겠지만, 친근한 사이의 여성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년이라는 말 역시 ‘언니’와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남자가 사용하면 ‘욕’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남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단어―그 말을 입에 올려 본 것이다.
애인에게, 혹은 그만큼 친한 몇몇 친구들에게, 때로 이 년 저 년 하면서 논다. ‘놈’은 욕이 아닌데 ‘년’은 욕이라는 사실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알지만, 그것이 한 편으로 내게 위안이 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욕을 서로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연대감의 일면이다. 연대라는 것은 약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이기에, 내가 그것을 누릴 수 있음은 우습게도 내게 위안이 된다.
일단은, 다행히 괜찮더라. 뜻하지 않게 과격한 사람으로 비치게 되기도 했지만, 내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더라. 그래서 기뻤다. 신이 나서 한창 쓰고 다녔는데, 요즘은 좀 사그라들었다. 내게 이 년 저 년 소리를 들은 친구는 괜찮았는데, 친구가 아닌 사람이 놀라더라, 아니, 싫어하더라. 실은 그 사람이 옳았던 것이겠지만, 삶의 증거 하나를 잃는 기분은 씁쓸했다.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자에요, 하는 말을 들은 상대가 나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하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격지심이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듣는 ‘실수’들에 대한 노이로제다. 하루종일 의심하며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니 증거가 필요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무엇이 과연 좋은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무언가 나를 증거할 수 있을지.

웹진2 내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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