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나는 여성이다, 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 성별 정체성만으로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 은 아니다. 그 말이 나의 성별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공간에서 여전히 남성으로서―남성답게와는 다르다― 살고 있으며, 남성의 몸이라는 요소 역시 나의 성별 정체성을 구성―그것이 좋든 싫든―하는 일부이며, ‘다른 여성’들과 다른 구석이 많은 탓이다.

그런 나를 위해 비수술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여기에다가 ‘pre-comingout’ 같은 말을 붙인다면, 문제는 대개 다 해결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프리 커밍아웃 비수술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이라는 말 따위가 입에 붙을 리가 없다. 너무 길어서다, 라고 얼버무려도 좋겠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다. 영어라서, 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익숙한 단어들이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거나, ‘트랜스젠더 라는 것―그러니까, 몸과 정체성이 서로 다른 성별이라는 것’, ‘여성(만)을 사랑한다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 몇 마디 말들은, 그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속성일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핍박하는 세상에 살아 가고 있기에 그것들은 나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 자체가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닌 것이다.

곤란한 일이다. 정체성을 담은 한 마디는 나의 삶을 설명하지 못하고, 나의 삶을 설명하는 단어는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하니 말이다. 몸의 성별과 정체성이 다른 나의 상황이 애초에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혹은 애초에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은 설명을 요구하기에, 일단은 비수술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받아 들이고 있지만, 나를 말하기 위해 택한 그 이름이 한 편으로 나를 누르고 있다.

언어의 한계라든가, 불명확함 만이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문제는, 내가 나를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한 편으로는 설명을 요구받는다는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구구절절 이름을 붙이면서는, 내가 실존하는 한 사람이 아니라, 백과 사전에나 실린 희귀종의 표본으로나 읽힌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설명이라는 것은 애초에 명확하지 못한 것, 간단명료하지 않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 요구되는 일이다. 몸의 성별과 정체성이 서로 다르다는 나의 상황이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력 없는 이 세상이 나를 복잡하다고 여기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설명을 위해 그냥 혼자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까 드는 의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걸까, 책 속의 글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웹진2 내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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