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있다

군대에 있다. 끌려왔다. 감옥은 더 힘들것 같아서 왔다. 군대는 싫다. 꼭 있어야 하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나라가 뭔데? 북한이 쳐들어올까봐? 이게 지키고 있긴 하는 걸까? 난 평화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군대가 싫다.

더이상 인간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무기로 다루어질 뿐. 내가 적용받는 법도 다르다. 헌법에 의해 우리는 민간인(인간)에게는 보장되는 권리들을 박탈당한다. 어디에만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두 정해져있다. 정치적 의사표현을 해서도 안되고,(사실 어떤 의사표현을 해도 안 된다) 외국에도 마음대로 못 나가고, “나가서 싸우다 죽어라”라고 하면 그래야 한다. 위반시 처벌받는다. 윗 대가리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유 따윈 묻지 말고. 건강한 꼭두가시를 원한다.

군대는 남성의 절대적 우위, 규칙, 계급 엄수, 맹목적 복종, 권위 존중 등과 같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모델이다. 군대는 체질적으로 여성을 혐오한다. 흔히 개인, 신체, 협조, 생명 존중, 동정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성은 군대의 규칙, 구조 목적을 파괴한다. «236쪽, 와카쿠와 미도리, 전쟁과 젠더-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특히 훈련소에서 강력하게 느꼈다. 군대가 살포하는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정상가족 이데올로기들. 그냥 “중심적”인 게 아니라, 성소수자를 성폭력가해 변태로 취급하고, 그들이 원하는 신체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병신이라 욕하고, 여성을 지켜줘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로 열등하게 만들고, 정상가족만이 ‘정상인’을 배출할 수 있다는 독설들. 군대만이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억압의 원인은 아니겠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매우 강력하고 적극적으로 차별/억압을 실천하는 공간임은 분명하다. 군대에 오는 20대의 권력을 가진 부모를 만나지 못한 비장애인 남성들. 그들은 분명 희생자다. 충분한 보상따위는 없다. 있을 수 없다.

국가와 공동체, 가족과 여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남자의 숭고한 사명이며 전쟁을 두려워하는 남자는 나약한 쓰레기라는 신화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남자 아니는 어릴 때부터 투쟁과 적의와 공포를 배우고, 힘과 승리를 추구하도록 길러진다.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이러한 인격을 형성한 남성들이며, 그들은 타인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타인이 자신의 이익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한다. 거기에 국가나 고향이라는 미명이 붙으면 남성들은 집단적 폭력을 무조건 시인하고 만다. 지금 부시 정권하의 미국에서, 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익 추구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집단은 타자와의 공존, 친밀한 관계, 평화 같은 다른 가치들을 나약한 것이라고 비웃는다. «256쪽, 위의 책»

보인다. 갇혀있는 이 곳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면 만만한 동네북이 되어 괴롭힘 당할까봐 떨고 있는 그들이. “남들 다 견딘 군대조차 못 버틴 낙오자가 될거냐”고 등 떠밀리고 있는 그들이. (뭐, 밀리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알아서 가는 이들도 있고, 신나서 앞서 달려나가는 이들도 있다.) “타자와의 공존, 친밀한 관계, 평화”와 같은 가치들을 내팽겨쳐야만 버틸 수 있음을 배우는 이 곳. 어느새 “나약함”이 되어버린 그 가치들은 이제 그들이 세상을 읽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구를” 지키는 것일까?

우리? 국민? 우리는 누구고 국민은 누구지?

리어든은 지금의 국제적인 안전보장 제도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그것이 ‘인간’이 아닌 ‘남성’ 중심의 개념에 서 있다는 것, 둘 째는 개인과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집단이 아닌 ‘국가’를 위한 안전보장이라는 것, 셋째는 진정한 안전보장이란 전 세계의 인간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지금의 안전보장은 국가 간의 분쟁이나 적대 관계만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편파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263쪽, 위의 책»

리어든이 묻듯이 “지금까지의 안전보장은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에 의한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었는가. 군사행동에 의한 환경파괴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거대 산업을 가진 국가가 그렇지 못한 지역의 환경을 파괴해왔던 것이 아닌가. 환경 정책을 세우는 데 기업의 편이 아닌 인간, 민간 여성이 어느 정도 참여해왔는가” “생활과 복지에 대한 공공 예산의 분배는 적절한가. 개발이 가져다주는 이익의 분배는 공정한가. 남녀 간의 자원 분배, 노동의 기회 균등은 실현되고 있는가. 경제활동과 개발에서 젠더의 차별은 없는가” “국가는 어떤 때 군사적으로 대응하는가. 국가 차원에서는 어떤 대책이 세워지고 있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군사적으로 대응할 때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이런 질문은 과연 “누구”를 지키는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나에게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난 이란에서 처형당하는 동성애자들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북한에서(그리고 남한에서) 굶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된 안전 설비 없이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군대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무엇일까?

‘국가는 상상의 산물이다. 현실적으로 불평등과 착취가 존재함에도 국민을 항상 수평적이고 깊은 동지애를 지닌 존재로 상상한다. 이 상상의 산물 때문에 과거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이 서로 죽이고 때로는 스스로 죽어간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는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층적인 다양성과 신분제도의 비등질성, 각각의 가정의 개별성을 부정하여 균질적인 개인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85쪽, 위의 책»

앤더슨은 “국민이란 마음속에 그려진 상상의 정치 공동체”라고 말했다. 그것은 국경에 의해 한계가 그어지고, 국경 너머에는 다른 국민이 있다고 여겨진다. 국민은 문화적 창조물이며, 출판 자본주의, 국어의 제정, 순례 등의 요인이 그 일체감을 유지, 강화해왔다. 물론 국기와 국가는 국민에게 내셔널리즘을 불어넣는 상투적인 수단이다.(……)”종교적 공동체가 세계의 세속화에 의해 사라져 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집단화해 국민으로 형성된다. 이 집단의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으로 생겨나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근대의 ‘종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내셔널리즘의 언설이 대량으로 발생하며, 사람들은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 패쇄된 내셔널리즘의 언설 공간이 젊은이가 국가를 위해 생명을 내걸고 전쟁터로 나가는 충동을 발생시키는 장이 된다. 이 장 안에 들어가면 언설에 불과한 정치적 허구가 자명하게 보인다. 장군들이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그들이 이 폐쇄적인 언설 공간의 외부를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셔널리즘의 선전에 등을 돌리는 것은 충성을 버리는 것이므로 때로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179쪽, 위의 책»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에서 “나라”는 국가를 말하는 건가? 나에게 “나라”는 조선을 연상시킨다. 일제에 침략당한 역사로 상상되는 나라. 독도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월드컵, 올림픽에서 상징되는 나라. 태극기. made in Korea, 세계수출 몇위의 한국. 지금 써놓은 것만 보자면, 국가/나라는 나에게 그리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나? 아! 군대. 이건 직접적으로 국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전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국가는 분명해진다.

군대 동원 방식-채찍과 당근

정말 거의 대부분은 군대에 오기 싫어한다. “남자는 군대에 가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군대에 이미 갔다왔거나,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당신이 가지 그래?”라고 하면 금새 말이 달라질 걸. 그러니 군대에 안 가려는 사람들은 감옥에 쳐넣고, “국민의 의무이기에/가족을 지키기 위해/여자친구를 지키기 위해/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진짜 사나이가 되기 위해”서라며 억울함을 잠재우려 한다.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전쟁론>에서 이제는 옛날처럼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으라고 젊은이들을 선동한다. 그는 ‘개인을 넘어서는 용기와 긍지’라는 장에서 젊은 남성들에게 묻는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그리고 원피스를 입은 10대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남자하고만 결혼해야 한다.” «99쪽, 위의 책»

훈련소에서 고무신들이 보내온 영상편지를 모두에게 보여주는 시간이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이상화된 ‘여자친구’를 통해 이 고생을 보상받고 싶게 한다. 스파르타처럼 동성애를 군대에 적극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전쟁시 더 열심히 싸우고 군생활도 즐겁게 하지 않겠습니까? 아님 같이 손잡고 도망가려나? 하긴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두고 싸우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동원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구로부터” 지키는 것일까?

1차 세계대전 초기였던 1914년 크리스마스 때 영국군과 독일군이 선언한 비공식 휴전은 내장의 감정이 도덕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다. 원래 양국 군대의 의도는 크리스마스를 지낸 뒤 전쟁을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전 기간 동안에 양국 군인들은 서로를 알게 되었고 일부는 크리스마스 식사를 함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군인들은 상대를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게 되었다. 결국 군인들은 크리스마스 휴전이 끝난 뒤에도 더 이상 서로를 죽일 수 없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가 2002년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에서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우선 상대방을 비인간화하지 않고는 비인간적인 전쟁에 직접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144쪽, 개리 마커스, 클루지»

그에 따르면 전쟁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가 아니라 이미 누가 적인가 하는 정치적 결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전제 위에서 독자적으로 행동과 사고를 규정하고 적대의 가장 극단적인 현실인 전쟁을 일으킨다. 친구-적 관계를 근거로 인간들은 피를 흘리고, 생명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을 살육하도록 강요당한다. 그렇다면 평화란 무엇인가. “이 같은 전재의 가능성이 남김없이 제거되고 소멸한 세계, 최종적으로 평화로워진 지구란 친구와 적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즉 정치가 없는 세계다.” «114쪽, 와카쿠와 미도리, 전쟁과 젠더-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적이 정해지면 어느순간부터 분노, 혐오, 경멸, 공포, 파괴, 지배욕, 광기와 같은 감정들이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되면서 “왜 적인지”, “적일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적은 적이 아닐 때도 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해 가장 훌륭한 최선책이 전쟁일 수는 없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더 많이 얻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친구와 적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유토피아 중에서도 유토피아 인 것 같아 상상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친구와 적 사이의 그 넓은 공간을 채워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어떠한 것들이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질수 있을까? 그렇게 나누어지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왜 적이고 왜 친구일까? 적이 친구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적이 되기도 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렇게 친구와 적이 상황이나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까?

“군대는 보다 민주적이어야 한다”만을 주장하면 되는 걸까?

사토 후미카는 몇 편의 논문에서 여성 병사에 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밀하게 분류하고 있다. 전쟁과 여성을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상징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매우 흥미로운 분류다. 먼저 전통적인 남녀차별론자, 역할 분담론자들이 있다. 전쟁은 남자의 일이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야 한다는 이분법에 따라 여성의 군대 참가를 부정하는 것이다.(……)둘째는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남녀 역할에 근거한 평화주의자들이다. 여성의 모성적 본성에 입각해 비무장과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는 군 간부 여성, 내셔널리스트, 평등파 페미니스트, 애국 여성들이다. 이들의 구성은 다소 복잡하지만 군 내부에서의 남녀의 평등한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것은 물론 전쟁의 전면적인 긍정에 바탕을 둔 남녀평등이다. (……)사토가 분류한 마지막 그룹으로 그녀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반군사적 페미니스트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합법적이고 국가적인 폭력 조직인 군사 체제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249쪽, 위의 책»

그런 걸 상상했었다. 광주항쟁 때의 민병대처럼 민주적이고 자발적인 예비군. 거기에 성소수자라던가, 여성, 장애인처럼 사회적 소수자의 배재가 없는 우리를 지키는 조직. 국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합법적인 폭력조직일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는 사토 후미카의 분류에서 셋째에 가까웠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마지막 그룹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반군사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관심이 많다.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키기 위해 폭력은 필수적이고 그 자체를 문제시하면 이상에 빠진 몽상가일까?

폭력은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옳은지 그른지만 물으면 되는 것인가? 폭력 자체가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폭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자연법과 실정법이 그것이다. (……) 자연법은 “목적의 정당성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지만 실정법은 “수단의 적법성이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한다”. “현대 유럽의 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은 개인이 지닌 폭력을, 법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으로 간주한다.” 반면 국가가 지닌 폭력은 합법화되어 있으며 종종 ‘정의’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모순을 폭력 그 자체가 지닌 모순은 아니다. 폭력은 개인이 행사하면 범죄가 되고, ‘자폭 테러’나 ‘게릴라’에 대해 미국이 말하는 것처럼 ‘악마의 행위’가 된다. 그런데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면 왜 정당한 것이 되는가? «170쪽, 위의 책»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꽤 오래전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전쟁터에 발가벗고 플룻을  불며 평화를 호소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왜 발가벗는 건지. 영화 미션과 포카혼타스의 영향인가?) 이게 해결책이 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리 쉽게 “폭력은 수단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에게 분명한 건 폭력자체에 대한 고민을 멈추는 순간, 아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여지가 커진다는 것이다.

뭘 할 수 있을까?

우선 군사화는 정치·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가능성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군사화는 군국주의로 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산업화, 사회화, 글로벌화 등과 같은 어떤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저지할 수도 있다.” 이 군사화는 “자민당 후보나 군사기지에 있는 자치단체의 수장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의 미세한 과정, 어떤 영화나 패션, 또는 마음이 끌리는 남성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왜 전쟁 이야기가 매력적인지, 어째서 그것이 강한 어조와 높은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지, 거기에 어떤 용기가 묘사되어 있는지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군사화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상상력조차도”. «259쪽, 위의 책»

리어든은 그 답은 시민운동에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보다 많은 시민이 전쟁을 막는 운동에 참여할 것, 안정보장을 탈군사화, 다시 말해 비폭력과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 개념을 바꿀 것,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할 것을 요구한다. 다양한 운동에 관계하고 있는 여성들은 그를 위해 장기적인 시야를 지니고 국경을 넘어서 서로 도와야 한다고 리어든은 말한다. 여기에서 리어든이 제안하는 환경보호, 인권 문제 개선, 성폭력 근절, 인종차별 철폐, 아동 복지, 평화 옹호, 여성의 주류화 등을 위한 모든 운동은 언뜻 제각각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기존의 권력 지배적·폭력주의적·이익 우선적 특징을 지닌 가부장제적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간 중심의 협조적 패러다임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요구와 연대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266쪽, 위의 책»

 사실 한참 무기력/무관심했었는데, 요즘은 같은 부서가 아니지만 신병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웃음 띈 표정을 더 던지는 편이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는 편지를 써줬다. 내가 신병 때 어떠했는지, 내가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기를, 잠 잤으면 좋겠다고, 같이 힘내자고. (내가 잘 안 먹는 간식)이 나오면 신병들을 먼저 챙겨주려 한다.

권위주의에 무심하게(대놓고는 못하니까) 저항하고, 약자에 공감하는 거. 평등한 친밀감 속에서 즐거움을 만들어 가는 거.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평화를 만들어 가는 한 방식이 되지 않을까.

 

-천안함 실종자와 남기훈 상사, 그 가족들, 구조되었지만 상처받은 생존자들, 그리고 뉴스에 나오지는 않지만 군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 상처만 받고 위로받지는 못한 많은 사람들. 이 순간 진심을 담아 그 고통을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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