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진화심리학에 몇마디 하고 싶었다

 진화 심리학이란, 진화생물학이 유기체의 신체적 또는 생리적 특성들을 적응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게,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의 기억, 지각, 언어와 같은 정신적 또는 심리적 특성들을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설명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에서 자주 발견되는 한 특징은 인간 마음의 하드웨어라 할 수 있는 뇌가 진화했을 당시의 환경과 현대인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환경이 매우 다르다는 주장이다. 인류는 약 150~250만 년 전에 출현했는데, 인류가 생존했던 대부분의 시기는 약 180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까지 지속된 홍적세에 해당한다. 때문에 많은 진화심리학자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뇌 대부분은 홍적세 환경에 적응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83쪽, 개리 마커스, 클루지»

나에게 진화심리학은 “도대체 왜?”를 설명하는 흥미롭고 설득력있는 관점이다. 근데 잘 읽다가도 눈에 띄게 삐끗하는 지점들이 있는데 주로 (아마 대부분 예상하듯이) 섹슈얼리티 관련된 설명들이었다. 보통 이런 식이다. 섹스를 하고 싶은 건 섹스를 즐기는 우리의 조상이 즐기지 않았던 조상보다 번식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섹스를 즐기도록 하는 유전자가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거란다.  그리곤 거기서 설명이 멈추곤 했다. 난 뭐지? 내가 섹스를 하고 싶은 이유는 설명이 안 되는 거다. 게다가 실제로 이런 설명 자체가 동성애는 비정상, 자연의 섭리에서 어긋나는 돌연변이라는 식의 주장들을 뒷받침해온 것도 사실이다. <클루지>라는 책에서 우리가 섹스를 즐기는 까닭에 대해 훨씬 설득력있는 설명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우리의 쾌락 탐지기들은 우리 선조들의 환경에서 바람직했을 특정 자극들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전자에 별로 기여하는 것이 없는 수많은 다른 자극들에도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섹스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까닭은 (분별 있는 진화심리학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예상하겠듯이) 우리로 하여금 섹스를 즐기도록 만드는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제는 섹스가 출산으로 이어지거나, (이것은 관련 기제를 가장 엄격하게 조율해 놓은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또는 연애중인 커플의 결속에 기여할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실제로 이것은 거의 아무 때나, 거의 모든 상황에서, 둘이든 셋이든 혼자든, 동성 간에든 이성 간에든, 생식에 기여하는 구멍을 통해서든 그렇지 않은 신체 부위를 통해서든, 상관없이 작동한다. 우리가 유전자의 번식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기여하는 일 없이 섹스를 할 때마다 우리의 유전자는 바보 취급을 당하는 셈이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비록 섹스가 동기 부여의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들은 종종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일부러 고안해낸 방식으로 섹스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성애자들은 정관 수술을 받고 남자 동성애자들은 에이즈의 시대에도 여전히 무방비 상태로 섹스를 하며, 소아성욕자들은 감옥과 공동체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들의 관심을 추구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번식과 어버이 쌍의 결속을 위한 섹스만 빼고) 엄청난 실수다.

물론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다양한 변형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 동성애에 대해서는 그것의 적응적 가치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어느 설명도 특별히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예컨대, ‘동성애자 삼촌’ 가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에 따르면 동성애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동성애자들이 흔히 자기 형제자매의 아이들에게 상당한 애정과 관심을 쏟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더 타당한 설명은 동성애가 성행동의 다른 변형들과 마찬가지로 진화에 의해 (출산에) 좁게 초점이 맞춰지기보다 (친분과 교제를 향한) 폭넓게 조율된 쾌락 체계의, 다시 말해 이미 엄격하게 적응되어 있던 한 기능 이외의 다른 기능을 위해서 함께 선택된 쾌락 체계의 결과라는 것이다. 유전적 특징과 경험의 혼합 속에서 사람들은 온갖 형태의 다양한 것들을 쾌락과 연관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런 바탕 위에서 행동이 이루어진다. «206쪽, 위의 책»


삐끗하는 다른 지점은 진화심리학적인 설명이 내게 연상시키는 보수적인 언어다. 진화심리학은 우리가 “왜” 이러한지를 설명했을 뿐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어떤 변화가 가능한지/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이렇게 된 생물학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이유에만 집중하기에 “지금이 최선”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나보고 비약한다고 뭐라 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이유를 대자면, 인간은 “맥락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편번호 기억 대신에 우리는 일종의 ‘맥락 기억’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 위하여 맥락이나(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알려주는) 단서를 사용한다. 이것은 우리가 특정 사실을 필요로 할 때마다 마치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음, 뇌야 안녕?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1812년에 일어난 전쟁에 관한 기억이 필요하거든. 나에게 뭐 줄 것 없니?” (……)맥락 기억의 또 다른 결과는 우리가 들은 (또는 보거나 만지거나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은) 거의 모든 정보가 좋든 싫든 몇 가지 다른 기억들을 (종종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촉발한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사소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연구 대상이었다. 실험 결과 ‘교수’, ‘지적인’ 같은 단어를 미리 접했던 사람들은 ‘축구장 난동꾼’, ‘어리석은’같이 덜 고상한 표현들을 접했던 사람들보다 지적인 과제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러한 예비효과가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심대하다. 예컨대 문화적 편견이 특히 두드러진 상황에서 소수집단의 행동은 예비효과 때문에 더 악화될지 모른다. 실제로 다른 조건들이 같다고 할 때, 백인과 흑인에 대해 똑같이 선의를 가지고 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부정적인 인종적 편견이 예비되는 경향이 있다. «39쪽, 위의 책»

이렇기에 진화심리학의 언어들이 보수적인 경향과 만나는 것 또한 분명한 것 같다. 그냥 그래서 가끔씩 삐끗했다는 거다.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마지막으로 모든 걸 다 무작정 진화로 설명하려는 거.

무엇에서든 적응적인 가치를 찾아내었던 볼테르의 핑글로스 박사를 연상케 된다. “잘 관찰해보면 알 수 있듯이 예컨대 코는 안경을 걸치기에 알맞게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걸치고 다닌다. 다리는 명백히 긴 양말을 신기에 알맞게 고안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긴 양말을 신고 다닌다. 돌들을 깎아서 성을 쌓으려고 생긴 것이다.” «243쪽, 위의 책»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이란 학문도 마찬가지로 완전할 수 없고, 여러 주장들 중 더 설득력있는 설명을 찾아가는 과정이겠지만. 조금 터무니없는 가설들을 들이대기도 하는 것 같다. 음악이 구애의 목적을 위해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이 구애를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떤 특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특성이 그런 목적을 위해 진화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느끼는 이런 지점에 진화심리학자들이 더 엄밀한 잣대를 부여하고 만들어가겠지만. 사람들이 너무 진화심리학을 좋아해서 그런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진화라는 개념을 너무 대충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3 thoughts on “한번쯤은 진화심리학에 몇마디 하고 싶었다

  1. 지금이 최선이라는 뉘앙스는 작성자분이 멋대로 생각하신 거고요. 본능이라고 옳은 것은 아닌데 그걸 전혀 구분을 못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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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화생물학을 통해 우리가 왜 이러한지를 탐색할 수 있고 그런 탐색으로 유전학적인 문제를 풀어가 미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진화생물학적인 해석말고 그럼 어떤것으로생물학적 변천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함? 그리고 보수적인 언어로 해석 하면 왜 나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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