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애 욕망

Homosexual Desire in Revolutionary Russia: The Regulation of Sexual and Gender DissentHomosexual Desire In Revolutionary Russia,

Dan Healey저

이 책의 각 장 결론과(9장만 빼고) 맨 마지막 결론 장을 번역해 보았어요.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닌지라 정확한 건 직접 책을 보아야 할 거예요. 아 그리고 이 책에는 그 당시의 규범에 맞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들(sex and gender dissent, intermediat sex, sexual anomaly 등)이 풍부하게 나오는데, 이게 글을 읽는데 조금 불편할 수 있어요. 뭔 소린지 말이예요. 그래서 저는 대충 다 요즘말로 하자면 성소수자로 생각하고 읽었어요. 그냥 조금 편하게 읽으시라고. 그리고 또 하나. sodomy나 pederast 다 남색 즉 요즘말로 하면 남성간 동성애를 이야기하는 것이긴 한데,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다른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에 sodomy는 그냥 소도미로 pederast는 남색으로 번역했어요. transvestite도 요즘 사용하는 이성복장선호자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워 그대로 트랜스베스타잇이라고 번역했구요. 번역은 쉽지 않군요.

목차

서문

1부 근대화 시기 러시아의 동성간 에로스

1. 타락한 이들의 Artel'(노동자 협동조합)

-전통적인 남성간 섹스와 동성애 하위문화의 출현

2. “우리의 서클”

-근대화 시기 여성간의 섹스

2부 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애 욕망 통제하기

3. 에둘러서 하기와 선택의 자유

-소돔사람(sodomite)과 남성역 여성동성애자(tribade) 단속하기

4. “퀴어 문제”와 근대성의 언어

-1917년, 동성간의 사랑에 관한 법 개정

5. 성도착자냐 아님 도착 행위냐? (Perversion or Perversity?)

-의료, 정치, 그리고 소도미(sodomy) 비범죄화 이후의 성과 젠더 거부(sexual and gender dissent)에 대한 통제

6. “무한한 수의 중성(intermediate sexes)”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과 문화 혁명

7. “동성애자가 공산당의 당원이 될 수 있나요?”

-소비에트의 강제적 이성애 만들기

3부. 동성애자의 존재과 지속되는 사회주의

8. “현장에서 잡힘”

-스탈린 법정에서 동성애 사회악으로 만들기

9. 에필로그 굴락(Gulag: 옛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과 진료소에서의 혹독한 시련들

결론

부록: 소도미를 금지하는 법에 의한 희생자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1부 근대화 시기 러시아의 동성간 에로스

1. 타락한 이들의 Artel’(노동자 협동조합)

-전통적인 남성간 섹스와 동성애 하위문화의 출현

제정 러시아 시기에 도시의 남성 동성애 하위문화는 전통적인 고유의 남성적 섹슈얼리티로부터 발전되었다. 남성 동성애 세계는 국가 외부의 이질적인 것이라보다는, 활력 넘치고 자원이 풍부한 사회의 한 부분이었다. 이런 동성애 하위문화가 외국에서 수입되었다거나 공산주의자의 잘못된 통치로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은 이성애주의자(heterosexist)와 국수주의자(nationalist)의  맹목적/배타적 애국심(chavinism)이었다.

러시아 짜르 말기 전통적인 남성 사회 계급 제도에서의 친밀한 관계는(예를 들자면, 주인과 종처럼), 이 사회의 오래된 남성적인 성문화에 속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여성스러운 자기이미지라던가, 한정된 성적 지향을 공유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 처럼, 특정한 집단에 대한 일체감 같은 것이 없었다. 권력을 가진 개인들은 쾌락을 얻기 위해 동성 간의 에로틱한 행위에 탐닉했고, 복종하는 위치에 있던 이들은 개인적인 이득이 없더라도 “그러려니”하면서 마지못해 따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틀맨의 장난”을 참거나 반긴 많은 이들이 항상 보상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성문화는 남성적인 성욕 배출에 대한 대중과 엘리트의 관대함, 남성의 “음탕함”의 “정상적인” (여성 매춘부를 통한) 배출이 비싸고 성병으로부터 위험할거란 인식에서 발전했다. (남성간 에로스에 대한 서구의 시각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관대하지만, 과장되어선 안 된다. 일기와 다른 자료들에서 드러나듯이, 계급에 개의치 않고 성행위를 하는 러시아 남성들은 종종 이런 행위들이 “죄를 짓”는 거라고 느끼곤 했다. 아무리 반복적으로 행한다더라도 말이다.

이런 전통적인 성행위 패턴과 비교할때, 근대적인 동성애 하위문화는 급속한 도시화, 시장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의 확산,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더이상 개인적이지 않는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하위문화에서 구성원들은 계급, 나이, 학력의 장벽을 넘어 말투나 본 기억(mutual recognition)을 통해 서로를 인식할 수 있었다. 동성애 세계의 주민들 몇몇은 대담하게도 여성적인 태도, 몸짓, 여성복장을 취했다. 다른이들은 1908년에 “동성애 복장”으로 여겨지던 빨간 스카프나 손수건처럼  조금 더 신중한 상징을 이용했다. 동성간 성적인 관계를 맺는 몇몇 남성들은 그들 스스로를 tetki 또는 “우리 부류”라고 칭하면서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 (“여성 혐오자” 또는 “돈을 위한 남색꾼”과 같이)은 이런 주변화된 정체성을 거부하고, 그들의 감춰지고 위반적인 목적들을 위한 정상적인 남성성을 개발했다. 상업화 또한 이 특별한 시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러시아 짜르 말기에, 목욕탕의 artel’(노동자 협동조합)의 노동자들에 의해 행해지던 “장난”은 좀 더 효율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면허받아 운영되는 여성의 성판매와 비슷한, 목욕탕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는 그러나 꽤 유명했던  남성 매춘이었다. “여성 혐오자들의 파티”와 tetki 에 의해 운영되던 술집은 “우리같은 부류”를 통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1917년 이후, 혁명적인 법 제정은 동성애도 관대하게 봐 줄 수 있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남성 동성애 세계가 공간을 사용하던 방식은 일상을 재구성하려던 공산주의자들의 목표와 일치하지 않았다. 호텔방이나 목욕탕 탈의실, 레스토랑 밀실, 시 낭독을 위한 회관 또는 유흥을 위한 카바레 같은 상업적인 공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사라지면서 남성 동성애자들은 비좁은 사적 공간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것을 소비에트 정책이 “사람들을 화장실로 몰아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공적인 주변 지역들은 생생한 도시 남성동성애자 하위문화의 지리적 표현으로서, 잘 정착된 성애화된 영역이었다. 1917년 이후, 남성동성애자들과 그들의 파트너는 공중화장실이나 공원, 가로수길과 같은 곳을 계속해서 이용했다. 왜냐하면 그런 곳들이 그들이 익숙한 신호로 서로를 알아보고 만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방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동성애 문학 전통의 창시자인 부르주아 Mikhail Kuzmin도, 1924년 가을 Leningrad의 거리에서 “귀여운 외모”의 젊은 “프로페셔널”을 만났던 일화를 혁명 이전의 자극적인 “모험”으로 회상하고 있다.

2. “우리의 서클”

-근대화 시기 여성간의 섹스

짜르 시기와 소비에트 러시아 초기의 여성간의 관계는 여성 일반의 역할과 기회의 변화를 반영했다. 증가하는 수의 여성들과 그 가족은, 이주하는 남성들처럼 가부장적인 촌락공동체와의 끈이 약해지고 끊어졌으며, 출신 지역에 따른 소속(zemliachestvo) 또는 artel'(노동자 협동조합)은 (성적인 행동을 포함한) 전통적인 형태의 감시를 수행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다. 만약 도시에서의 독립적인 생활 기회가 성차별적인 법적 불이익이나 의료-법 관리(짜르 체제 하의 면허받아 시행되는 매춘)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지만, 동성간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들이 있었다. 하층 계급 여성들 간의 사랑에 관한 적절한 자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고, 도처에 존재한 단 하나의 직업이었던 성매매를 고려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특히 면허를 받은 성매매 업소에서의 동성간 관계는 보호/용인되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동성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또는 기회)는 고객 또는 성판매여성에 의해 명백히 요구되었다. 소비에트 초기의 남성을 대상으로 상업화된 사적 공간의 사라짐은 여성들 간의 섹슈얼리티 영역을 열어주었다. 신경제정책(NEP)시기에 성을 판매한 여성들은 더욱 불안정한 공간에서 일을 했고, 이 위험한 사업을 하는데 있어 감정적이고 성적인 관계를 포함한 서로를 보호하는 공생관계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들 간의 “레즈비언 사랑”은 더욱 구분되어 있었다. 이 여성들은 그녀들의 개인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볼셰비키였다면 의무적으로) 숨겼다. 레즈비언 하위문화를 살필 때, 여성이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1920년대의 모스크바는, 여성간이 관계가 표현될 수 있었던 엘리트 살롱 문화, 성매매로 평판이 나뻤던 상업적인 술집이나 카페가 있던 파리나 베를린 같은 수도가 아니었다. 러시아 레즈비언 하위문화는 경제적 결핍으로 억제되었고, 1917년 이후로는 부유와 쾌락에 대한 정치적 불신에 의해 억제되었다. (가정 내의 공간으로 공적인 무대를 만든) 반공개적인 환경의 살롱은 1920년대를 통해 침체되었고, 공포스러웠던 1930년대 중반에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마음의 여성들이 모인 서클과 네트워크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정을 무시하고 그녀들을 주부로만 여기는 체제를 이용했다.

“남자다운” 복장과 태도의 암호는 성적인 관계를 원하는 도시의 여성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군사기관과 학술 또는 문화 조직내에서는 남성스러운 여성에 대해 관대했다. 이는 “여성 동성애자”라는 자의식을 가진 몇몇의 여성들이 돈을 벌어 생활을 영위하고 자신의 재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여성들은 외관상으로는, 혁명에 의해 여성들을 위해 시행된 공적인 차원의 사회 경제적 물가안정책(valorization)을 이용했다. 교육과 직장은 결혼하지 않고 애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한 사회주의자 명망가들의 비판으로부터 빗겨나갈 수 있도록 했다. 아직 발달되지 못한 레즈비언 하위문화에 소작인 계급 출신 여성은 거의 없었다. 지방에서는 여성을 사랑하는 도시 여성도 “남성화”된 복장을 과시하는 대신, 체제순응적인 여성성으로 되돌아갔다. 아마도 레즈비언 사랑은 도시에서의 삶을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초기에 이런 근대화가 진행된 도시는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남성과 달리 러시아 여성들은 성애화된 지역을 지정하고 동성간 욕망을 공적인 공간에서 풀어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그녀들의 욕망을 표출할 곳을 찾았는데; 그건 그녀들의 몸이었다. “남성화”된 여성 연기를 통해서, 아님 보다 전통적으로 완벽한 남성 정체성으로 가장하여, 몇몇의 여성들은 이성애만이 전부라 여겨지는 문화의 제한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범의의 것으로 만들었다.  만약 욕망이 “적극적인”과 “수동적인” 방식으로만 생길 수 있다면, 여성을 향한 정열적인 사랑은 “적극적인”으로 곧  “남성적인” 것으로 구성되었다. 익숙한 양성구유자나, 생물학 실험으로 약속된 유토피아적인 성전환과 같이 다양한 젠더 가능성들을 빗질하고 다듬어서, 그녀들은 생물학적인 성을 버리지 않고도 다른 젠더를 가질 수 있었다. 여성의 남성성이 자기 긍정이고 심지어 해방과 (강직함으로 이어지는, tverdost’)정치적 각성의 상징이라면, 이는 모성의 본질을 주장하는 이들들에게 잠재적인 경보였다.

2부 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애 욕망 통제하기

3. 에둘러서 하기와 선택의 자유

-소돔사람(sodomite)과 남성역 여성동성애자(tribade) 단속하기

러시아 제국의 동성간 사랑에 대한 규제의 특징은 에둘러서 하기로 볼 수 있다. 보수적인 유럽의 도덕 규범을 부과하려고 법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효력은 거의 없었다. 법 실행은 베를린이나 파리 당국처럼 단속하는 방식(함정 수사, 지속적 감시)이 없이는 실질적으로 힘들었다. 공공질서를 유지하는데 초점을 둔 러시아 경찰은 소도미를 적극적으로 체포하는데 투여할 자원이 없었다. 법 개정(The Great Reform)은 (유럽 대륙의 법체계 모델인) 공개 법정에서, “소도미” 또는 “레즈비언 사랑”을 증명하는 법의학 기술에 관심을 가진 의료-경찰을 고무시켰다. 이런 현상은 법의학 부인과학(gynecology)이 면허를 필요로 하는 이성애 성매매를 관리하기 위해 의료-경찰 위원회를 설립한 것과도 뼈대를 같이 한다. 법개정에도 불구하고, “소도미” 사건들에서 (“레즈비언 사랑”사건들은 무시되었다) 증거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경찰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 와서야 경찰과 법원이 남성을 강간한 “남색가(pederast)”를 검증하는데 있어 관례적으로 법의학을 사용하였다. 이런 분야의 전문가에 대한 요구는 신중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Merzheevskii 와 V.M.Tarnovskii가 이 주제에 관한 전문가로 남았다. 20세기 처음 몇년간 러시아 정신의학은, 이따금씩 법의학이 러시아 의료 담론에서 동성간 사랑에 대해 해석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에 도전했다. 러시아 짜르 시기 말기에 “동성애[homosexuality]”(점차 이렇게 칭했다)의 형법학 주요 텍스트들에는 소돔사람(sodomite)과 여성동성애자(tribade)의 몸에 대한 묘사가 나오지 않는다. 국내와 서부유럽 모두 이러한 현상의 최신의 설명방식인 정신의학을 선택한다. 정신의학은 남성간 폭력적인 성폭행 사건의 정보제공자로서, 법원에서 전문가의 위치를 유지한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소도미를 규제하는 일 체가 동성간 사랑을 의료화시키지는 않았다. 권력자들은 원칙적으로 성폭력을 발견하고 처벌하는데에만 관심을 두었다. 폭력과 불안의 시기였던 1905년 이후 몇년간, 법집행은 동성간 관계에 대한 이전의 경향을 배신했다. 고위층은 면죄를 하는식으로 제정 러시아 법원의 친구들은 감춰줬다. 얼마되지 않은, 그것도 남성강간 같은 사건의 경우에만 St. Petersburg와 Moscow에서 집행되었다. 동성애자를 위험한 외부인으로 만드려는, 러시아판  Wilde나 Enlenberg와 같은 본보기성 재판은 없었다. 한편 남성간 상호적인 성관계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면서, 제정 러시아의 남부와 동부 가장자리에서는 경찰의 대처 방식이 모습을 갖추었다. 러시아 중심부에서는 성적 거부(sexual dissident)를 설명하는데 “정신이상”을 사용할 만한 의사들도, 이 지역에서는 “선천적인” 남색이라는 의학 모델 적용을 거부했다. 도덕적인 법, 불공정한 집행, 관리를 위해 떠들던 모순적인 이론들: 이런 요인들은 러시아 짜르 시기 말기에 활발한 논쟁을 발생시켰고, 곧 붕괴하고 개정될 법의 형태를 결정짓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퀴어 문제”와 근대성의 언어

-1917년, 동성간의 사랑에 관한 법 개정

1905년 혁명 이후 준-헌법의 검열이 안정된 짜르 지배하 마지막 몇년간, 자기 존재를 의식하는 동성애자의 목소리가(그리고 그 패러디가) 전위예술문학, 기사, 풍자, 과학 논문에서 나타났다. “퀴어 문제”는 대중에게 알려졌다. 유럽과는 다르게 “제 3의 성”에 대한 관용과 존중에 대한 대담한 외침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요구들은 웃음거리가 되거나 상스러운 비꼬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사업가들은 자유로워진 분위기를 이용해 이론적인 책자들을 출판하였다. 사심없이 냉정한 의학 서적으로 쓰여진 이 책들은 사실상 러시아와 유럽수도들의 동성애 하위문화를 관음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국내에서와 외국에서 모두, 유명한 과학 서적들은 글을 읽는 일반 대중들에게 “성적인 정신 병리학” 또는 “제3의 성”에 대해 점차 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유럽의 “동성애”에 대한 뒤끓는 관심은, 구식의 제멋대로인 소도미를 금하는 법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을 동반했다. 러시아에서는 동성애자가 아닌 자유주의 법학자들이 이 법에 반대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목소리였다. 자유주의자들은, 비위에 거슬리는 하나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금지하는 법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다른 형태의 부도덕한 행위들처럼 이를 사적인 공간으로 제한시키고 교육으로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의거한 법의 뼈대에서, 합의된 성적인 행위들은 성인의 사생활의 권리라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는 Duma 군주제나 1917년 2월 공화제에서나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7년 10월 혁명으로 인해 자유주의 대변의 동성애자 해방은 구석에 쳐박혔다.

승리를 자랑하는 러시아의 사회 민주주의는 성인간의 성관계에 대해서 자유주의적 권고를 하는 한편, 성에 대한 새로운 사회의 사회주의적 주장을 기대하는 등, 여러 충돌하는 전통들을 함께 날라왔고, 이는 급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와 근대 의학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러한 긴장은 이후 10년간 동성간 사랑에 대한 혁명적 접근을 특징지운다. 이러한 주장들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장 적절한 규제의 형태에 대한 동의는 존재했다. 잠시지만 사회혁명당(Left Socialist Revolutionary) 법학자들이 사법인민위원회(Justice Commissariat)를 잡고 있는 동안, 새로 제안된 형법에서 합의단 소도미를 금지하는 항목을 계획적으로 삭제하였다. 2년 뒤 볼셰비키 법 전문가가 법전을 편찬할 때에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개인의 불가침의 성적인 자율권 침해에 대해, 세속화되고 근대화된 언어로 만들어진 법이 드디어 승인되었다. 신체적 행위를 표현하는 종교적인 용어들은 법의학과 형법상의 담론으로 대체되었고, 범죄의 범위도 단수내졌다. 이 새로운 체제에서 합의된 성인간의 소도미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으로, 동성애의 지위는 명확해졌다. 소도미 금지의 폐지는 진실로 정치적인 진보였다. 파리 혁명때 남성간의 사랑을 비범죄화한 이후로 소비에트 러시아야 말로 주목할만한 정권이었다. 이 시기에 소도미와 비슷한 “범죄들”에 대한 형벌들은 독일의 경우(“부자연한 악”에 대한) 15년형에서, 영국의 경우(“비역buggery”에 대해) 종신형에 이렀다. [이러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열정적인 법체계와, 동반한 성범죄의 의료화는 경찰, 법학자, 의료관계자들에게 성과 젠더 거부자를 계속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5. 성도착자냐 아님 도착 행위냐? (Perversion or Perversity?)

-의료, 정치, 그리고 소도미(sodomy) 비범죄화 이후의 성과 젠더 거부(sexual and gender dissent)에 대한 통제

유럽의 발달된 성과학과 내분비학을 뒤따르던 몇몇의 초기-소비에트 정신의학자들은, 혁명적 가치들과 이어진 그들의 학문분야에 도움이 될까하는 마음으로 동성애를 연구하였다. 동성간 관계에 대한 형법의 침묵은 이전까지 경찰이 지배한 이 영역에 의학이 들어갈 기회를 만들었다. 국제적인 성 개혁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과, 성과학의 지도자격인 Hirschfeld와의 친밀함은 건강인민위원회(Health Commissariat)에 의해 장려되었다. 성적인 예외자들(anomalies)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면서, 정신의학자들은 짜르 시기 전임자들과는 다르게 지원받게 되었으며, 전형적인 근대 학문으로서의 성과학이라는 명성을 소비에트 연방 외부에서 높일 수 있었다. 성적 중간자들(intermediaries)은 호르몬에 의해 그런 것이라는 Hirschfeld의 주장도 정신의학자들이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혁명적 야망을 실현하는데 있어 잠재적인 통로를 마련했다. 성적인 예외들의 원인을 알아내는 Steinach의 획기적인 연구를 받아들이고 반복하면서, 정신의학자들은 개척분야인 내분비학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법에도 불구하고, 그들[성적인 예외자들]의 모순적인 정치적 잠재력은 동성애에 대한 생물학적인 기반의 문제를 다루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 딜레마에는 방법론적인 한계가 두드러졌다. 환자의 병력에 의존하는 정신의학자들이 문제적인 동성관계를 하나의 주장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사례를 찾기 힘들었다. “동성애자”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Leningrad의 정신의학자 한명은 Hirschfeld의 인구통계학적 분석으로 추정하건데, 소비에트 러시아에 한 2,3백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더 큰 방해물은 인신론적인 것이었다. 흩뿌려진 수십개의 역사적 자료들을 끌어모아 사회에 실재하는 사람들을 비평하는 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920대에 “동성애자”에 대한 많은 수의 연구들을 정리한 정신의학자는 없었다. 1921 “남색꾼들의 클럽” 현장 급습의 여파로 인한 Protopopov와 Bekhterev의 기사들 이후로, 소수의 정신의학자만이 비교가능한 다수의 동성애관련 사례들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는 많은 샘플들을 가지고 한 양적인 연구가 아니라, 몇몇의 환자들의 일화를 바탕으로한 분석이었다. 성적 다양성을 연구하고 대중을 교육하는 Hirschfeld의 성 연구소의 러시아 판은 없었다. 체계적인 양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성 연구 위원회의 소비에트 사회위생학자들은  그들의 성과학 연구를 이성간으로 한정시켰다. 여기에 포함된 유일한 일탈(deviance)은 매춘 여성이었다. 소비에트 의학 문헌에 나타난 동성애 연구들은 대부분 진료소의 사례 몇개에 의존하거나, 형사상 정신의학기관을 통해 알게 된 개인들에 의존했다. 혁명기 러시아의 정신의학자들은 동성애자들을 적극적으로 찾기 보단 우연히 만났다.

이런 수동적인 태도로 인하여, 1920년대 “소비에트”를 건설하기 위해 사회적 예외자(social anomalous)를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들이 양적인 방법론을 사용한 것에 반대, 정신의학자들은 양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회위생학자와 법학자들은여성 매춘과 자살과 같은 사회적 예외들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질문서, 조직된 설문, 통계자료수집을 사용했다. 이런 도구들은 연구자들이, 개인의 사례를 사회현상으로 연결시키고, 건강인민위원회와 이러한 주제에 흐르는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당원들이나 정치 선동가들에게, 중요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포장시켜주었다. 연구 주제의 중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어느정도 널리 행해지고 (계급, 젠더, 교육 등과 같은 구분지표를 통해) 사회안의 놓여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개개인의 사례들이 전체의 일부분이 되면서, 연구 주제는 확고한 정치적 타당성을 얻게 되었고, 의사들은 스스로를 사회분석가 즉 “의사-사회학자(vrachi-sotsiologi)로 소개할 수 있었다.

동성간 욕망과 젠더 불일치(nonconformity)의 주요 원인이 호르몬 때문이라고 주장하던 정신의학자에게도 물질적인 부족이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소비에트 생물학 실험의 고질적인 문제는, 모든 종류의 연구에서 동물 또는 사람의 건강한 조직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두번째 대학(Second Moscow State University)의 선도적 생물학자 M.M Zavadovskii에 의해 수행된, Steinach의 남성 “동성애”를 치료하기 위한 이식실험의 반복은 실패로 돌아갔다. Zavadovskii는 절차에 의심을 품으면서, 동시에 이식을 위한 적절한 조직의 부족으로 실험이 실패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28년 Khar’kov의 Kirov도 Efrosiniia B에게 행했던 이식 실험에서 “우리는 이 실험에 요구되는 양질의 난소를 구할 수 없었다”며, 불만을 이야기했다. 서구 유럽 국가들처럼, 소비에트 연합의 성 호르몬에 관한 연구의 방향은 종종 실험 재료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구하고 잘 다룰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었다. 평화시기에 인간의 난소와 정소 조직을 공급받기는 매우 어려웠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리적인 조건이나 경제적 한계로 말미아마 고릴라나 원숭이의 생식선을 구하는 것 또한 제한되었다.

결과적으로, 일시적 효과가 있던 젊어지게 하는 치료와는 달리, 생식선을 이식해 성적지향을 바꾸려던 Steinach-Lichtenstern의 시도는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1920년대 초반 유럽 중부와 동부에서 오스트리아의 대발견을 반복해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어서야 이 분야의 생물학자들은 이 기술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성적 취향 변화가 관찰된 소수의 사례는 암시받기 쉬운 환자에 끼친 의사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여겨졌다. 생물학자가 아니라 의사였던 Hirschfeld는 성적인 중간자들이 내분비학에 의한 것이라고 계속해서 믿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선천적인 동성간 사랑이 그가 주장하는 해방의 근거를 이루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말기에 몇몇의 소비에트 정신의학자들은 언젠가 생물학자들이 생식선 속에 성적 지향에 대한 숨겨진 매커니즘을 밝히기를 계속해서 기대하고 있었다. 신경제정책(NEP)시기 러시아에서, 생식선 이식에 필요한 재료 부족과 이식실험 실패는, 이 수단을 자원도 없는데 낭비만 발생시키 것으로 만들었다.

성과 젠더 거부자들에 대한 질문이 법에서 의학으로 넘어가자 여러 딜레마들로 의사들은 조심스러워졌다. 명백한 정치적 안내 없이, 의료적 개입이 어떤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지 의사들이 어떻게 아는가? [일상의 성과 모든 문제들과 신경증을 치료하는] “소수자(minor) 정신의학” 방법들을 이용해 성적인 부적응자들이 새로운 사회의 완전한 자격을 갖춘 시민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가? “개인의 부적합”을 치료해야 하는가? 아님 성적인 예외들의 비밀을 밝혀내 “부적합한 자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세상”을 건설해야 하는가? 다른 사회 부적응자들과 달리, 동성애에 대한 정치적 의미는 분명하지 않았다. 자살은 명확히 새로운 사회이 손실로 간주되었고, 여성을 사는 현상(매춘)은 경찰, 사회주의 노동자, 의료 전문가로부터, 반응이 모순적이긴 했지만 공통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으로 여겨졌다. 볼셰비키가 사회적 지형을 조사하고 맑수주의자의 목표로 변화시킬 구상을 하던 1920년대에, 성과 젠더 거부는 이 맥락의 영향 아래서 다양화 반응들을 불러일으켰다. 의사들은 모든 종류의 성적 부적응자를 의료화할 때 신중히 자신의 지위를 영리하게 계산했다. 

6. “무한한 수의 중성(intermediate sexes)”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과 문화 혁명

촌락 소비에트 위원회 일원이 떠난 후, [교회] 종소리에 의해 두번째 모임에 여성들이 불러모아졌다. 집단 농장을 철거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같은 모임에서 여성들은 마을의 대표와 비서를 선출했다. 대표는 Starodubtesva Varvara Moiseevna로 보통의(middling) 농부였고, … 비서인 Vasil’evna는 (뇌물로 직위를 박탈당한) 굴락(kulak)의 딸로, 선거 이후에 남자 옷으로 차려입고[pereodelas’] Antonenko Vasilii Vail’evich로 이름을 바꾸었다.

-OGPU(비밀경찰)의 요약에서. 1930년 3월 14일 Butovsk근처에서 있었던 여성들의 집산화 방해 공작.

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에 문제에 있어서 의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볼셰비키 상상력에 있어서 “동성애’는 하나의 개념이나 현상이 아니었다. 이는 1920년대 동성간의 관계와 젠더 거부 규제를 고려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이 이슈는 다양하게 읽혔다. “동성애”나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복장도차)”은 하나의 관념적인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새롭게 변화하는 정치적 규범에 따라 넓은 범위의 영향을 받았다. 계급과 혁명에 대한 충성도의 영향력은 지대했고, 소비에트 연합 국적 또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과 젠더 거부에 대한 의학적 이해와 혁명기 러시아의 특정한 의료적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해방적인 분위기는, 충성의 문제가 없는 도시화된 근대적 지역의 시민들에게만 한정되었다. 여기를 벗어날 경우에는 의학이 아닌 정치적인 프리즘을 통해 성과 젠더 거부를 바라보았다. Natal’ia Starodubtseva가 자신의 마을을 집산화시키려는 세력에게서 승리한 후 취한 행동을 별난 것으로 그린 비밀경찰에 의해 기록을 통해 이러한 한계를 볼 수 있다. Natal’ia 는 세계를 뒤집고 Vasilii가 된다. (동기가 뭐건 간에) 그녀의 젠더 저항은 “남성화된 종류”의 “복장도착”으로 해석 될 수 없었고, 되지도 않았다. Natal’ia/Vasilii는 계급의 적이었고 상거래를 하는 부농의 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핵심은 경찰이 그녀의 반역을 어떠한 용어로 결정짓는지 중요했다. 이 글을 쓴 이와 가정되어진 독자들에게 호르몬의 원인이나 성 정신의학 담론은 완전히 외계언어로 들렸을 것이다.

1930년, 볼셰비키 적들에 의해 행해지는 “동성애” 또는 “남색”에 대한 반대 담론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정교회 지도자들과 소비에트연합 주변 지역의 “역행하는”행동들이 주요한 목표물이었다. 이 담론에 공통되는 주제가 있다면, 그건 공산주의자들이 해롭고 위험하다고 여긴 것들을 어떤 식으로 byt(일상생활 또는 삶의 방식)와 관계시켜야 하는가였다. 유럽중심부의 “현대” 속에 있는 “옛 삶의 방식의 잔여물”이나, “역행하는”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미개한 문화의 존속”은 모두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협했다. 수도원의 “남색꾼”이나 우즈베키스탄의 bachi[소년들이란 뜻으로 유랑극단에서 속해있는 소년들을 일컷는다. 그들은 극단 선생님으로부터 시와 춤, 노래를 배우고 남성 매춘 소님을 받는다.]를 알선하는 매춘업자들은 유혹/종교적 지시/계약을 통해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 젊은 남성의 에너지를 바람직하지 않은 비뚤어진 생활방식으로 바꾸었다. 생물학적인 호르몬 불균형, 복합적인 환경의 영향을 강조, 정신병의 발달이라는 설명 방식들은 (종교적이거나 경제적인 동기에서나) 혁명에 충성하지 않은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들은 비뚤어지게(perverce) 양육하는 것은 볼셰비키들에게 byt삶의 방식의 즉각적인 결함으로 여겨졌다.

이 반대 담론들의 젠더를 고려하는 작업(gendering)은 1929년도 초반 건강 인민위원회의 의학 전문가 위원의 트랜스베스타잇에 대한 이상적인 전망에 영향을 미쳤다. 함축적으로 정신의학자들(과 생물학자 Kol’tsov)은, 그녀가 군복을 입고만 있다면 ,의학과 생물학적인 증거를 들어, 트랜스베스타잇의 “권리”를 지지하였다. 그녀의 지도력을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녀의 젠더 불일치/그녀의 남성성으로 인해 존중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녀에 대한 전망은 긍정적이었다. 이와 반대로 남성성이 부족한 남성의 경우, (동성애자와 접촉한 후 군대를 회피하는 신병과 같이) “정신병의 감염(mental infection)”의 희생자 또는 (투르키스탄의 “불운한 bachi”처럼) 경제적 착취가 후진성과 합쳐진 걸로 여겼다. 그들은 여성화에 대한 공포를 암시적으로 드러냈다. “남성화”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차분히 이야기하는 반면, [여성화]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위원회의 토의 밑에 놓여있는 것은, 남성의 “중간성”은 잘못된 일상생활(byt)이라는 양육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일탈행위(deviation)은 분명 예방이 가능했다.(적은 수의 선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트랜스베스타잇” 여자의 경우는 더욱 깊은 “생물학적”인 요인이 작용해 다루기 어렵다고 보았다. 호르몬 주입으로 여성성을 되찾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트랜스베스타잇” 여자를 사회에 조화시키기 위해선 동성간 결혼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남성이 되려는 여성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최후의 접근은 젠더화된 이상주의(gendered utopianism)였다. 하지만 병으로 여겨진 [트랜스베스타잇]남자들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빠져있거나, 비극적으로 남성성을 잃어버렸다. 사람의 성을 바꾸려는 수술을 통해 젠더의 메커니즘을 통제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는 문화혁명의 분위기에서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정신분석학과 생물학의 관계자들은 성을 바꿔달라 요청하는 “트랜스베스타잇”을 일차적으로 보호감독하고 공무원들에게 상담해주는 행정상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기대에 따라 의료 종사자들은 Konstantin을 Ekaterina로 바꾸는 것보다 더 큰 이상주의를 보여주었다.

인문학을 “생물학화”시켜버리는 것에 반대한 5개년 계획(The Five Year Plan)과 캠패인을 통해, 그리고 지적인 작업들의 계급의식과 당에 열중하는 경향들에 의해서, 다양한 사회 문제들은 의학의 영역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동성애”나 “트랜스베스타잇”이 이러한 개혁 작업에 들어가 있는지 눈에 띄게 드러나 있진 않다. NEP신경제정책 시기 “의사-사회학자들”에 의해 측정되고 계산된 자살, 성매매, 노숙자 문제들과는 달리 [동성애나 트랜스베스타잇]문제는 한번도 양적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정신의학자들과 건강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은 어떤 사례들은 “중간성”의 “병리학”적인 요소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성/젠더 거부 문제를 구체화하는 통계학적인 연구나, 연구자가 계획적으로 “사회 예외”를 계산해서 만든 수치화된 도표를 찾을 수 없었다. (호르몬을 통해서든, 정신분석을 통해서든) 다양한 진단들이 경찰의 강제력을 잃자, 환자들 “개개의 부적합”한 일화들로 채워진 산만했던 담론공간은 점차 축소되었다. 성과학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 성 정신 병리학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회에서 “동성애”와 “트랜스베스타잇” 자리는 없었다. 1931년 Osipov는 “동성애자”들이 “음모를 꾸미기 위해 모인다”고 기술했다. 근거없는 불안에 의존해 “국가가 남색꾼(pederast)들을 지지할 것”이란 그의 예견은 비참하게 무너졌다.

7. “동성애자가 공산당의 당원이 될 수 있나요?”

-소비에트의 강제적 이성애 만들기

젠더와 가족관계에 관한 스탈린주의 시스템의 특징이었던 통합주의(syncretism)은 1930년대 동성간 사랑 부분의 소비에트 건설에 있어서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짜르시기의 얼룩(varigated)들과 신경제정책 시기에 성/젠더 거부자에 대한 접근 방식은 5개년계획 시대의 슬로건과 절박한 경제 사정에서 합쳐졌다. 스탈린주의는 여성동성애와 남성동성애를 구분하는 본래의 혁명이전의 시각을 부활시키고 강화시켰다. “근대” 소비에트 공화국에 적용되었던 볼셰비키의 첫번째 형법의 성범죄에 관한 젠더-중립적인 언어는 1933-1934년 새로운 소도미 법에서는 사라졌다: 이는 성혁명의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후퇴는 NEP 법에 선례가 있었다. 이는 “근대화된” 중심부가 아니라, “이러한 문화의 존속”으로 명백히 젠더화된 범죄 목록이 있는 “역행하는” 공화국들에만 적용된 것이지만 말이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성직자의 동성간 범죄기소는 과거의 “잔존”들, 결점들이 사회에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역행하는 “미개한” 사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급에 의한 것이라는 또다른 볼셰비키의 선례를 제공한다. (세속화되고, 의료화된 젠더를 고려하지 않는(gender-blind) 근대성이) 혁명적인 사법이 성범죄를 다루는 방식을 제시할 거라는 열망은 선진적인 “국가”(러시아와 “문명화”된 사회주의 파트너들)의 선진적인 대중(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남성동성애에 집중된 관심은 항상 남성에게 선진적인 역할을 부여했던 러시아 막시스트들의 생각을 반영했다. 남성과 여성 프로레타리아 모두 명목상으론 평등했지만, 혁명의 시작부터 스탈린주의자들의 시스템 통합에 이르기까지, 당의 활동가들은 정치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여성들을 두려워함과 동시에 혁명의 상징인(iconography) 볼셰비키의 운동이 남성적인 것으로만 비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건강한 젊은이들, 붉은 군대 병사들, 선원들, 그리고…학생들”의 타락은 “남색꾼”의 유혹 때문이라는 생각은 이같은 선진적인 남성들의 장점들을 역사적인 임무로부터 빗나가게 했다. 1933년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당 내부의 “이중 사기꾼(double dealers)”과 “변절자(turnouts)”들을 내쫓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체제의 지도적인 기관들에서 이 두 요소는 모두 사라져야 했다. 그래야만 “정신병의 감염”을 줄일 수 있고 새로운 남색이나 정치적 배신 사건을 피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주요도시의 사회적 정화 작업도 같은 의도가 밑에 깔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선진적인 계급, 젠더, 도시들은 눈에 띄지 않는 사실이나 살롱에 출몰하는 “부르주아 타락자(degenerate)”들을 버리고, 이전 계급의 찌꺼기들은 사라지도록 스스로의 삶을 탈바꿈하여야 했다.

이 각본에서 여성의 역할은 지지받는 것이었지만, 계급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복잡하고 모순적이었다. “역행하는” 지역의 집산농장 농부나 프로레타리아 여성들은 1930년대 공적영역으로의 진입과 임금노동을 보다 많은 수가 요구받았다. 이 범위의 여성들에게는 집밖에서 직업을 갖는 것을 방해하는 가부장적인 남편과 아버지로부터 해방이 장려되고 강요되었다. 그녀들은 남자같이 변했다. 몇몇의 경우에는 “남성화”되었다고 여겨졌다. 한편 부인-활동가(wife-activist) 운동은 사회주의 성과를 기반으로한 엘리트를 위한 여성적이고 유물론적인 이상을 추구하였다. 두 개의 충돌하는 규범이 불안정한 도덕적 평형 상태로 공존했다. 하나는 자기개조와 생산성 향상이라는 영웅적 행위였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삶에 맞춰 문화를 바꾸려는 책임감있는 관심이었다. 이 두 역할 상이에 강제된 모성이 다리를 놓았다. 모성의 예찬을 통해 거친 작업현장이나 비행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지나친 “남성화”를 되돌리도록 요구할수 있었다. 모성의 경험은 공상적 사회개혁론자(do-gooder)로서 잠재적으로 섬세한 역할의 부인-활동가들로 하여금 앉아서 공장일을 하는 여성들(women at the factory bench)과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을 주었다.

“기괴하게 혼합된” 스탈린주의자들의 가족정책은 출산 증가에 몹시 의존하는 강제적 이성애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불안과 충동으로 이루어진 이성애는 새로운 소비에트 엘리트들이 원하는 출세주의자를 “배양”하기에 족한 불안정한 혼합물이었다. 남성동성애자 하위문화는 건강한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순결을 위협했고, 반정부적 선동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거꾸로 가는 러시아의 잔존인 패배한 부르주아지, 귀족, 성직자, 타락한 찌꺼기들은 살롱과 소굴에 숨어 남성 성매매와 “소도미를 직업으로” 행하는 것을 촉진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떨어진 출산율에 이어 정신병 감염이 위협적인 원인이 되는 듯 했다. 섹슈얼리티가 불안정한 남성은 “정상적인” 방법을 가르쳐줄 잠시동안의 교정 노동이 필요하였다. 여성의 경우 여성동성애자들 사이의 가시적인 조직이 없었기에 이같은 위험을 겪지 않았다. 드물거라 짐작컨데, “정상적”인 젊은 여성을 먹이로 한 이례적으로 “남성화된” 여성은, 의사에 의해 발견되고 필요하다면 법의 개정없이도 격리할 수 있었다. 한편 “정상적”인 젊은 여성에게는(레닌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의 사랑할 자유는 “자녀를 출산하는… 진지한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상기시켰다. 생물학적인 그녀의 몸이 “정상”의 상태를 보증했고 모성의 예찬은 섹슈얼리티의 목적을 일깨워줬다.

3부. 동성애자의 존재과 지속되는 사회주의

8. “현장에서 잡힘”

-스탈린 법정에서 동성애 사회악으로 만들기

여기에 서술된 대부분의 법정 드라마는 모두 보이지 않는 뒤에서 행해졌다. 1920년대 성직자와 수도사들의 성범죄를 대상으로한 공개재판과는 다르게, 이는 볼셰비키의 가치들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교화를 목적으로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또한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 스탈린의 사회주의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Nights of Long Knives의 마지막 Röhm의 스캔들처럼 억수같은 동성애혐오적인 수사들 속에 당의 중요인물을 쓸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런 과정들은 큰 공개재판으로 진행되지 않고, 사건에 관련된 이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동성애자에 대한 스탈린시기의 재판은 미시적인 정치 환경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구축되고 심어진 젠더, 섹슈얼리티, 의학, 법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피고인, 그들의 변호사, 판사, 비전문가 재판관 보좌역(lay assessors), 소송대리인들은 강제적 이성애로 발전된 새로운 규칙에 맞추어 자신의 역할을 맡았다. 강제적 이성애는 아버지에 의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거나, 어머니에 의한 본능적이고 헌신적인 모성이었다.

왜 적은 수 때문에 그많은 노력을 투여하는가? 이 개인들의 직업과 계급상태를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모스크바 소도미 재판 포본의 36명의 피고인들 가운데, 26명은 화이트 칼라 사무원 또는 전문적인 관리자였고, 3명은 성직자 또는 성직자였던 이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숙련되고 생산적이었으며 인정되는 계급을 배경으로 두었다. 얼마 안되는 예외를 제외하면, 이들은 새로운 소도미 금지 법을 뒷받침하는 사법인민위원회의 장관인 Nikolai Krylenko의 1936년 연설처럼 “낮은 사회적 지위의 어중이떠중이(declassed rabble)”이거나 “착취 계급의 찌꺼기”가 아니었다. 대신 이 남성들(과 Stepanova)은 존중받는 도시 노동자이이자, 스탈린주의자들의 조치가 사회주의 기술관료 엘리트로 만들어버릴 지식인 사교집단 출신이었다. 이러한 재판들에서 모든 정당들은, Krylenko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그리고 일상생활(byt)을 새로운 자세로 성장시키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다.” 뒤에서 벌어진 이같은 논쟁에서 소비에트 사법부는 특히 남성성 변형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스탈린주의자들이 강제적 이성애를 만드는걸 도와주었다. 주요한 관심사는 가로수길의 남성동성애자 하위문화와 여기에 가담하는 “갱생가능한” 심지어 가끔씩 “정상적인” 남성들이었다. 동성간의 관계는 경찰이나 시민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심문에 의해 묘사되었고 이를 의사들이 평가했으며, 검사에 의해 기소되었고, 사적인 편지와 일기가 공개되는 와중에, 가끔씩 그들의 고갱이 교정될 수 있다고 호소하던 변호사들에 의해 함축적으로 변호되거나 용서받거나, 부인되었다. 이는 당연히 엄청나게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시스템에 잡힌 사람들은 늘 창피해했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매우 자주 비공개 법정에서 불려지고 재정의된 성정체성으로 인해 감옥에 갇혔다.

그녀의 젊은 친구를 괴롭힌 Stepanova에 대한, (비굴한 V.P.Serbskii 법의학 정신의학 연구소와 해악(처녀성 뺏기 defloration)에 대한 부인의학적 평가에 의해 제공된) 정신의학적 분석을 통해 소비에트 사법은 의학적이고 법적인 용어를 통해 Stepanova가 레즈비언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공하였다. 법정에 세워진 여성간의 관계같은 드문 사례의 경우, 법학자와 의사들은 이러한 생소한 현상을 해석하는데 있어 법 역사학자들과 법의학 부인의학자들의 오래된 관례들 참고로 하였다.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여성젠더 역할을 고치는 작업을 구체화하였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궁극적으로는 모성이라는 목적으로 바꾸는 데 큰 관심을 표했다. 강제적 이성애를 강화시키려는 열망은 특히 성적인 성숙을 정의하는 논쟁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누가 “성적인 성숙함”을 정의하는가는 정부가 (젊은 시민들에게 성적인 문제에 대한 자율권을 주는 시기) 즉 동의를 할수 있는 나이를 결정했다. 1934년 법의학 부인의학 지침은 성적인 성숙함(항상 여성으로 젠더화되었다)을, 인구증가를 주장하는 이들의 말마따나, 새로운 생명을 출산하고 기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정의하였다. 스탈린주의의 성 질서내에서 여성의 자율권은 독신으로 남거나 임신을 감수하는 정도를 넘지 않았다. 1940년에 법학자들은 젊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쾌락이나 감정적인 충만함등과 같은 걸) 제외한 모성으로만 그 합법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재판들은 이전 성적인 차이점이 있는 범죄 행위에 대한 관대함과 결합하여 스탈린주의 젠더 정책의 “기괴한 혼합”에 기여했다. (성도착이라는 정신병리학적 모델을 만들어낸) 정신의학자들에 의해 제안된 적대적인 병리화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충분하지 않았다. 1934년 정신의학자 Harry Whyte에 의하면, (정신심리요법의 도움이나, 의심할 바 없이 엄청난 의지로) 동성간 욕망과 사회의 삶을 조화시키려한 진찰받던 “정직한 시민 또는 훌륭한 공산주의자들”이 감옥에 가게 되었다. 남성일 경우에는 특히나 그랬다. 스탈린주의 법체계에 구축된 성정체성에 찍힌 낙인과 수치는, 법원의 속박으로부터 조심스럽게 감춰진 한정된 공간에서나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결론

복잡하고 난해하기는 하나, 새로운 동성애 성도착의 지형적 지도은 19세기 말기와 20세기 초반 인종, 젠더, 성정체성의 형성이 하나의 계획으로서의 문명화(civilization)라는 것을 반영하고 뒷받침해주고 있다.

-Rudi C. Bleys, 성도착의 지형학: 서부밖의 남성-대-남성 행위와 문화인류학적 상상력, 1750~1918


동성애에 관련해서는 러시아의 순결함(chistota)을 유지합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전통이 있습니다. 남성간의 이러한 관계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라고 합시다!

-Valentin Rasputin, British  Channel Four 텔리비젼에 나온 인터뷰, 1991년 초반

러시아의 20세기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틀을 짜려는 최근의 시도들은 이 국가가 만들어낸 특이한 종류의 근대화에 관심을 집중했다. 두가지 중요한 주제들로 문제가 설정되었다. 하나는 (유럽의 궁극적 목표에 역사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는) “문명화로서의 스탈린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시장을 대체하고 그 자리에 전통적인 가치들을 집어넣은 “새로운-전통적” 사회였다. Stephen Kotkin는 스탈린주의를 주체성(subjectivities)을 구성하려는 결의와 경제뿐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면을 재정의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이 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의심스럽거나 권리가 유보되더라도 “볼셰비키로 말하는” 방법을 배운 다수의 협동을 통해 “자본주의가 아닌” 문명화를 세우려고 했다. 그들의 창조는 “유럽 역사에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Terry Martin은 소비에트 국가 건설 계획을 공산주의 근대화 과정의 특징으로 조사하면서(스탈린주의자들의 공식에 의하면 “국가의 형태이나 내용은 사회주의”로 이해되지만), 소비에트 근대화가 이같은 흐름속에서 진행됐다고 결론지었다. USSR소비에트 연방의 비러시아인들에게는 국가적 자의식이 깨어나 위험한 역사적 단계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조치들이 취해졌다. (왜 위험하냐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을 혼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적극적인 조치” 프로그램들과 “지속적이고 기계적인 인종 분류하기”를 통해 국가주의/민족주의를 확고히 하였다. Martin이 쓰기를: “근대화는 소비에트의 목표였지만: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 신전통주의를 낳았다.”

Kotkin과 Martin에게 새로운 정체성 구성은 근대화하는 사회의 필수 요소였다. 볼셰비키가 물려받은 짜르제국을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하고 교육시키는 소비에트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문명화(civilization)가 창조해낸 동성애 정체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장 시작부분의 Rudy Bleys “성도착의 지형”의 인용문, 어느 지점에 이러한 정체성들이 놓여 있었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문명화의 수단으로서, 러시아 동성애 정체성은 얼마나 효과적이었나? 만약 이러한 정체성들이 합쳐지지 못하고,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이 초래되었다면, 신전통주의적 특징들이 두드러진 근대화시기 동성간 성욕(eros)에 대한 러시아 경험은 어떤 한계를 지녔나? 인용문에서 보여주듯이 Valentin Rasputin에 의한 선택적이고 동성애혐오적인 기억상실증은 신전통주의로 굳어진 성향의 증거라 읽을 수 있나?

Eve Sedgwick이 이야기하듯이 동성애 정체성에 대한 서구의 개념이 “급진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모순(a radical and irreducible)”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러시아 제국과 후기 소비에트연방의 경우 이 모순은, 이 거대한 정치 형태가 “문명화된 곳”과 “미개한 곳” 경계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타협될 수 있었다. 유럽의 “성도착의 지형”의 전부를 이 하나의 정치적 실체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러시아의 유럽도시들에서는 매우 공격적으로(with lunges and lags) 동성간 사랑을 예외 또는 병으로 이해하는, Sedgwick의 “소수자화 시키기minoritizing”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인들이 중심적인 대도시가 아닌 지역을 볼 때에는 해석이 달랐다. 제국이나 소련에게 있어서 주변지역이었던, 자주 “미개하”다고 불린 비-슬라브인(non-slavs)들에게는 남색이 지방특유의 것이라는 해석을 “보급”시키는 것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같은 이원론적인 “성도착의 지형”은 20세기 초반의 성과 근대화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사고에서 불충분했다. 그들의 지도는 서구 유럽세계의 발전하는 산업도시들, 전통에서 거리두기, 무기력하고 상업화된 기분좋은 자극(titillation)과 극단에 놓인 “미개의” 군락을 이루는 사회들, 모두로부터 구별되는 세번째 요소를 포함했다. 러시아는 문명화의 중대한 국면에 서 있었다. 1909년 사회민주주의자 G.S.Novopolin에 의하면 아직 인위적인 쾌락(artful pleasures)으로부터 순결하긴 하지만:

한쪽에는 피할 수 없는 단골, 성도착자들로 인한 신경쇠약이, 다른 한 쪽에는 불결하고 인위적인 성적 다양성을 격려하는 문화가 일렬로 서서 전진하고 있는 서구유럽이 있다. 하지만 여기선 잠시 잊도록 하자. 우리가 있는 이 땅으로 돌아오라. 예상하는대로, 러시아 사회 주요 부분의 도덕규범, 특히나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순결함(chaste purity)[tselomundrennaia]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이제까지는 열등하고 어리석은 방탕만이 지배했다. 우리는 아직 유행성의 신경쇠약과 세련된 쾌적함(refined comfort)으로부터 멀다. 그리고 덕분에 고맙게도, 우리는 [유행성의] 성도착자들로부터도 멀리있다. . . . 러시아에서의 타락은 아직 미개한[primktivnyi] 성격을 보이고 있다.

Novoplin은 “카프카스 산맥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색(Pederasty)은 러시아 도시의 “부르주아지”와 “귀족 모임”에서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의 “열등하고 어리석은” 쾌락은 유럽의 신경쇠약적인 성도착과 카프카스 산맥과 중부아시아의 동양적인(oriental) 타락 사이 어디쯤 위치했다. 비교적 순결한 러시아는 세부분으로 나눠진 “성도착의 지형”에서 “문명화된” 유럽과 명확히 “미개”하고 “역행”하는 “동방” 사이에 끼워넣어졌다. 이는 러시아 사람들이 그들의 국가를 보편적으로, 본래부터, 순수하게 이성애적이었다고 상상하도록 하였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전통이 있다.”고  Valentin Rasputin이 주장할 때, 그는 의도치 않게도 “성도착 지형” 지도 제작을, 세기의 시작과 함께 상상되고 이후의 사건들로 강제된 국가적 순결함이라는 신화를, 대러시아에 요청한 것이었다.

동성간 관계에 대한 볼셰비키 아이디어의 핵심과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애매모호함, 침묵은 러시아 “성도착의 지형”에 의해 발생한 부조화로 저지되었다. 사회주의자의 근대화 프로젝트와 문명화 임무는 동성간 에로스를 생각하는데 있어 이 시대 인식의 총체였던(epistemic) “소수자화시키기”와 “보편화시키기”를 가로질렀다. 혁명적 기획들이 세워지던 근대화에 대한 확언은 성적인 도덕 규범이 세속화되고 성적인 문제들이 의료화되도록 러시아 도시에 지시됐다. 러시아 공화국의 근대 언어로 쓰여진 혁명적인 형법에 종교적이거나 “부르주아”의 도덕성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소도미를 금지하는 부분은 삭제되었다. 이 삭제는, 성적인 장애 두 극단 사이의 “순결한” 러시아라는 신화, 그리고 포함 성/젠더 거부에 과학적인 이해를 적용해서 근대화하려는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등, 여러 관점을 만족시켰다. 동성간 사랑의 “병리화(Morbidizing)”는 해방적인 목표를 지지했던 이들과 동성애를 병리화시키고 정신의학의 치료범위를 넓혀 동성애까지 포함하려 했던 이들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의 수감을 요구하던 1920년대의 정신의학자조차도 러시아가 그런 성도착으로부터 비교적 순결하다고 상상했다. L. Brusilovskii는 1929년 의학 전문가 위원회에서, 소련에서 성도착은 독일에 비해 “그리 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장애가 러시아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보는 것보다, 빠르게 진행된 해방이 지나치게 “남성화” 시킨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하는 것이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다.

다른 한편, 러시아 도시지역과 소련의 유럽중심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볼셰비키의 문명화 작업은 동성간 에로스에 있어 “병리화”하지 않았다. 대신 지방특유의 역행하는 사회/종교/문화적 구성물의 독특한 관습이라 여겼다. 이는 Bleys가 확인하듯이 유럽의 문화인류학 전통의 20세기 사회주의자 버전이었다. “인종”이라는 주제와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소도미” 또는 “남색”과 엮곤 했다. 이 지역에서 “내용은 사회주의”지만 “형태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1920년대 볼셰비키 법률 제정자들은 RSFSR(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러시아 공화국)이 만든 성범죄에 관한 간결하고 근대적인 혁명적 언어를 버렸다. 남부와 동부 공화국들에서 없애고 싶어한 “널리 퍼져있는” 지방의 관습들(여기엔 소도미, 매춘남성에 대한 착취, 남성에 대한 강간이 포함된다)을  목록화하는데 있어 그들[볼셰비키 법률 제정자들]은 문화인류학적인 언어를 선호했다. 사회주의자 표현에 의하면, 그런 범죄들은 지역의 자본가들과 국가 지도자들, 이 지역의 평범한 주민들을 타락시키려는 무리들에 의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러시아 혁명시기의 시작부터 “미개한 관습의 존속이 만들어낸 범죄들”을 근절하기 위한 사회주의자의 “문명화 임무”는, 이 특이한 러시아 “성도착의 지형”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지형에서 RSFSR(과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아마도 예외적으로 아르메니아까지)는 동성간 에로스에 관한 것일 때, 애매한 성적인 근대화가 인정되었고, 이와 반대로 카프카스 산맥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의심할 바없이 “미개한” 악습으로 여겨졌다.

1933~1934년 RSFSR과 다른 “근대화 된” 소비에트 공화국들에서 일어난 소도미의 재범죄화는, 동성간 사랑을 통제하는 신전통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또한 남성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근대적인 상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오직 남성 동성애 활동만을 명명하고 금지하는 결정은, 러시아 법 역사속에서 특히 강화된 언어들을 가지고 있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보수주의였던 시절를 떠올리게 하였다. 이는 신전통주의자들의 교묘한 책략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법규범 속 젠더 평등에 관한 중요한 혁명의 원칙들은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자의 변두리 지역들을 “문명화시키는 임무”를 받아들이고(처음부터 꽤 구체화된 소도미 금지 법이었다), 대도시 중심부에 적용시킴으로써 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부에는 변두리지역 공화국들에서처럼 보편적으로 소도미에 종사하는 “미개한” 사회가 없었다. 새로운 법은 소련의 더욱 “근대화”된 국가 “지역 특유의” 문제에 대해선 제대로 진단하지 않았다. 주요한 소도미 금지 법규의 목적은 소수화시키기였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인 근대화 효과였는데, 남성 동성애자 정체성을 불러내고 다수의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상적인” (이성애)정체성과 대비시켰다. 사회주의가 건설하고 있던 새로운 문명화의 핵심은, “살롱”의 “남색꾼”과 “동성애자들”, 타락한 “정상인” 군인, 선원, 노동자들의 거친 정력을(이것이야말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고갈된” 서구 사이의 차이였다.) “자연적인” 경로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Gor’kii가 쓴 “동성애자를 제거하라-파시즘이 사라질 것이다”는 특정한 행위가 아닌 성정체성을 지적하고 있다. 도시의 하위문화는 소수의 남성으로 문제를 제한하는 이 법의 주제였다. 주목할 만한 건 이 하위문화는 도시 공간을 성애화된 영역으로 사용하였다: Iagoda가 예상하였듯이 “공적인 공간”에서 행해지는 소도미는 두드러진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이 영역들은 특정한 사회적 예외들로부터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이제 상상의 국가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신경쇠약의 (1930년대 파시스트의)유럽과 “미개한” 타락의 동방사이의 순결함 속에 껴있게 되었다.

남성 동성애만이 존재한다는 식의 위장은 스탈린주의 젠더 혼합주의(syncretism)의 신전통주의적인 특징이다. 소비에트 초기 “병리화”에서 “여성 동성애”는 다소 새로운 대상이었다. 그리고 문화 혁명 중에는 이상적인 비전의 주제가 되기도 했지만, 1930년대에는 결국 의학이 “남성화된 여성”에 대한 다른 주장들을 뭉개버렸다. (동성간 결혼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의견을 포함해서) 의료적인 동정이건, 정신병리학에 의한 억압적인 병리화이건 간에, 여성 동성애에 대한 “병리화” 관점은 철저히 억눌려 있었다. 소비에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제 남성우위론자(masculinist)와 인구증가를 주장하는 이들(natalist)의 체제유지를 위한 요구들로 완벽히 종속되었다. 이성애를 강제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모든 담론들을 억압하면서, 스탈린주의는 혁명 후의 안정으로 여성의 성적인 힘(agency)의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탈-스탈린주의(De-stalinization)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편협한 형태의 성 근대화를 가져왔다. 이 성 근대화는 전보다 더 뚜렷한 능력을 가진 과학과 경찰의 방식들이 결합되어 강제적 이성애 규범을 강요했다. (이는 1940~1960년대 영국, 미국, 독일에서의 동성간 사랑에 대한 억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여성 동성애”는 “병리화”된 정체성으로 되살아났고, 어쩌면 굴락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한 전염을 막기 위해서, 전신의학에 의해 병리화되었다. “여성 동성애” 정체성은 이제 다수의 “정상적인” 여성들로부터 분리되어 특정한 소수집단으로 명확히 지정되었다. 그러나 신전통주의는 동성간 사랑을 억압하기위해 젠더화된 체제를 유지했다. 남성간 상호적인 사랑은 범죄로 남았고, 여성간 사랑은 기껏해야 질병이었다.

러시아에 동성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속된 부인은, 동성간 사랑을 대하는 데 있어 소비에트 말기의 두드러진 신전통주의적인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걸 보여준다. 소비에트의 정보 통제는 (“정상적인” 다수에게) 동성애는 서구 자본주의의 타락이라는 인상을 만들었다. 언론에 남성 소도미의 비공개 고소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았으며, “여성 동성애”에 관한 성과학 논문은 전문가들에게만 관심사였다. 전기 문학이나 문화적 현상은 왜곡되고, 이성애화되었으며, 아니면 금지되었다. 후기 소비에트의 러시아인들은 동성간 욕망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세부분으로 나뉘어졌다고 상상된 “성도착의 지형”에서처럼, 그들의 나라를 성적으로 순결하다고 쉽게 결론내릴 수 있었다. 성도착의 서구와 악습에 지배된 미개발 국가들 사이에 위치한 순결한 소련을 만드는 작업은 특히 고르바초프 시기에 소비에트 언론의 AIDS에 대한 관점에 명백히 드러나있다. 동성간 사랑에 대한 러시아 역사와 문화적 기억의 은폐와, 러시아는 서구의 성도착과 “미개한” 타락 둘 다로부터 결백하다는 가장은, (공산주의가 촉진한 살균된 “민간전승의 국가 정체성들”의) 젠더 정치학의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Tery Martin이 주장하듯이, 이같은 국가정체성들은 신전통주의의 예상치 못한 자원이었다. 동성간 관계가 국민 문화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서구에 반대하는 담론에 보다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공산주의 체제인 (쿠바와 중국)에서도, 다양한 정치구조의 (짐바브웨, 이란, 말레이시아 같은) 시장-경제 기반 개발도상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나라들의 이같은 “탈-식민지적(post-colonial) 동성애혐오”는 , 유럽의 성별/젠더 시스템과 서구 성정치학의 주요도구인 동성/이성 이분법적 제도화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반발이었다. 스탈린주의는 이같은 동성애혐오 담론을 선구적으로 개척했지만, 이는 러시아 지식인 계급이라는 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성/젠더 거부에 대한 선택적인 기억상실은, 병든 서구와 타락한 동방사이의 “순결한” 러시아라는 신전통주의 신화를 보존하고 촉진하였다.     

끝.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Leave a comment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