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

이 글은 연세대학교를 거닐다 주은 <어이거기자네이것좀주어주지않겠나>라는 본격내용없고개념없는잡지 2010년3월 6호에 실린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쓴 답장 형식입니다.

안녕하세요? 편지 잘 읽었어요. 절 구체적으로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편지를 읽으면서 딱 저한테 쓰신 것 같았어요. 저야말로 “애인이 물어볼 때, 당연히 이성을 사랑하는지 묻는 것을 보고 분노”하고 “이상형을 물을 때 당연히 이성을 묻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뭐 혐오감까지는 아니지만) 느낀 사람이니까요. 이성애자들에게 나에 대한 배려를, 이해를 요구했으니까요.

그리고 잠시 뿌듯하기도 했어요. “이성애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성애자들”이 아닌 사람이 있구나. 우리의 외침들이 공허하게 사라진 게 아니라 sicle님과 같은 분이 이런 글을 쓰도록 만들기까지 했구나. 이런 생각들로요. 하지만 이건 연세대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그동안 많은 용기있는 성소수자와 그 친구들, 컴투게더, 총여학생회가 끊임없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요. 다른 “이성애자의 세상에서 20%의 동성애자는 아직까지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겠지요.

전 솔직히 조금 서운했어요. “불합리”하다고 앞에 깔긴 했지만, 왼손잡이랑 동성애자랑 비교한 것 말이예요. 왼손잡이가 소외 당하는 건 맞고 제가 왼손잡이에 대해 배려하지 안하는 것도 맞아요. 앞으로 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정말 동성애가 왼손잡이처럼만 되어도 여한이 없겠어요. 그럼 굳이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숨길 필요도 없을테고, 결혼과 입양을 못하지도 않을 테고, 불효자가 되지도 않을테고, 주변사람들로부터 나를 욕하고 경멸하는 표정들을 일상적으로 마주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제 자신을 혐오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노래방에서 “난 왼손잡이야~”라고 멋지게 노래부를 수 있을테니까요.

사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sicle님이 “동성애를 금기시 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이성애가 당연하다면 그만큼 동성애가 당연하다고 주장하세요. 그것은 동성애자의 권리”라고, “오른손잡이 가위옆에 왼손잡이 가위가 놓인 세상을. 식기를 배열하기 전에 ‘왼손잡이신가요?’라고 물어주는 세상을, 애인이 있냐고 물을 때 ‘동성이야, 이성이야?’라고 물어주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기 때문에요. 그래서 “이성애자에게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지만, 더 이야기할게요.

sicle님은 이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맞죠? “평범한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악시하지는 말아주세요. 평범한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죄악시당하는 세상을 싫어하신다면요.” 저도 뭔가 느껴지는게 있어요. 가끔씩 제가 분노를 표현하는데 서툴렀다는 거랑(이건 안 멋지지만), sicle님이 다른 사람들의 분노와 고통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분이라는 거(이건 멋진 거라고 생각해요).

분노를 이해해달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거겠죠? 네. 저도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세상에서는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다수에게 비난받지는 않아요. 위로받을 공간은 충분히 있어요. sicle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아요. (이건 몰래 귓속말로 드리는 조언인데요) 혹시 주변에 “애인이 물어볼 때, 당연히 이성을 사랑하는지 묻는 것을 보고 분노”하고 “이상형을 물을 때 당연히 이성을 묻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힘드시다면,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세요. sicle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을 쉽게 사귀실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끊임없이 분노를 이해해달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건 강요가 아니예요. 강요가 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힘도 없으면서 “평범한 이성애자에게 동성애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악시”하면서 내 주장(나)을 지키고 싶은 건지도, 강요(존재시키고)하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저는 너무 오랫동안 입이 막혀 있었어요. 수건으로 막히고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서 어떤 소리도 나갈 수 없게 만들었죠. 숨을 쉬기도 힘들고 너무 답답했어요. 머리속에 너무 많은 말들이 쌓이면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죠. 그래도 그냥 그렇게 살아왔죠. 말할 수 있는 건데 그냥 내가 하지 “않는 것”이라고 최면을 걸면서. 하지만 어느순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입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띠고 침범벅인 수건을 빼냈어요. 일단 숨을 가득 들이마셨죠. “안녕? 세상아?”라고 정답게 첫마디를 건네고 싶었는데, 왠걸, “아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어요. 누가 들어도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죠. 그렇지만 그렇게 몇 번 비명을 지르고 나니 조금씩 서툴게 나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사람들이 알아들어요.

예전에 차별금지법에서 성적지향이 빠져서 여럿이 모여 캠패인도 하고 행진도 하고 문화제도 한 적이 있어요. 문화제에서 진행자가 “우리의 적은 누구?”라고 하자, 앞 줄에 앉아있던 10대 성소수자들이 “헤테로~”라고 했죠. (이성애자라는 뜻이에요) 장내에 웃음이 터졌죠. 걱정마세요. 당황한 사회자가 잘 수습했으니까요. 슬펐어요. 그네들이 겪은 차별과 억압이 느껴졌어요. 분명 잘못된 방향이고 서툰 표현이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그네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분노를 이해해주세요. 지금사회에서 분노를 이해하면 당신은 천사가 될 수 있어요.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어요. 갑자기 레즈비언 문화제 때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들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라고 시크하게 말하던 분의 표정이 떠오르는군요.

분노를 이해해달라니,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분노를 이해해? 하시겠지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이야기할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사람들을 함부로 오른손잡이로 가정하지 않을게요. 왼손잡이를 배려할게요. 왼손잡이용 물건들을 만들어달라는 캠패인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노력해봐요. 그래야 꿈만 꾸던 “오른손잡이 가위옆에 왼손잡이 가위가 놓인 세상이, 식기를 배열하기 전에 ‘왼손잡이신가요?’라고 물어주는 세상이, 애인이 있냐고 물을 때 ‘동성이야, 이성이야?’라고 물어주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저 역시도 “올해 모든 일이 잘 풀리시기를 기원할게요. 아울러서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도 올해 행복하세요.” 그리고 sicle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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