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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자 남성은 주종 관계를 확실히 해둬야 마음이 편한 모양이다. 자기가 주가 됐든 종이 됐든 간에. 그 장단에 맞춰 주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놀랍다는 생각만 든다. 그들이 원하는 ‘형’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말을 놓고 명령을 하고 성질도 내는 내 모습은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장단에 맞춰줌으로써 내가 얻는 이득은 그들이 부리는 꼬장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허점을 보이거나 ‘다소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그들은 내게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나보다 만만한 상대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한 살이라도 더 많고 나름의 고학력자이기 때문이다. 나이와 학력이 주는 이 특례를 내가 끝까지 거절해야만 했을까. 여기는 내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불가능한 조직이니까,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으로 혼자 위안할 수밖에 없는 걸까?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따위를 운운하며 훈련병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보면 저들이 정말 그렇게 강한 충성심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높은 계급일수록 강한 애국심과 충성심을 갖고 있을지는 몰라도 의무 복무를 하는 병사들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군대라는 조직은 아랫 부분이 가볍고 허술하고 윗 부분만 무거운 피라미드라는 것인데, 그런 모양새를 가진 조직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우국충정이라는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20대 남성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텐데 과연 군대는 무슨 방버을 써서 이 조직을 안정감 있게 유지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전에 써놓았던 것처럼 군대에 가야 철 든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자기가 군대에서 철 들었기 때문이고 이미 철 든 사람에게는 군대는 별 필요가 없다. 아, 이제 앞으로 내 앞에서 ‘군대를 안 가서 어쩌고’ 하는 인간들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듣고만 있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되었다. 근데 어째 씁쓸하다, 젠장. 이미 알고 있었던 걸 난 왜 몸으로 지금 체험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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