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은 아닌데요, 다 말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당신이 원한 거 아니었나요?


어쩌다가, 내가 아는 레즈비언과 내가 아는 이성애자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이성애자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젠더에 관심이 많고, 동성애자의 인권문제가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성애자 친구는 “아, 그랬어?” 라고 대답해주었지만, 그 뒤로도 계속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 아이돌 좋아하고 그러지 않았어?” (‘하지만’으로 문장이 시작된다.) “네, 좋아해요.” “그런데, 전에 내 남자친구랑 같이 본 적 있었잖아. 그 때, 남자친구가 나중에 나한테 너 혹시 여자 좋아하는 부류 아니냐고 몰래 물어봤었거든, 그 때 나는 그냥 너 그런 거 아니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랬었거든. 근데 진짜 신기하다.” “아, 그랬어요?”(이상하게도, 남자애들은 눈치를 채나봐. 여자애들은 모르고 말이야.) “레즈비언은 아니지?”(질문이 부정문이다.) “음, 조금 복잡한데, 여자도 좋고 남자도 싫진 않아요. 그런데 요새는 성적으로 별로 관심이 없는 시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한 동안은 에이섹슈얼인가 고민하고 있었어요.” “여자도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여자 좋아해요.) “그런데, 레즈비언도 아닌데 레즈비언들만 있는 데서 긴장 안돼?”(여자가 괜찮다는 의미는 레즈비언이랑 같은 말이 아닌 걸로 인식하고 있었나보다.) “네?? 아, 그냥 저는 익숙해요.”


원치않는 상황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고, 커밍아웃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환경적으로 커밍아웃을 강요당하는 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를 강하게 이성애자라고 믿는 상황에서는,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반쪽짜리 솔직함이었는데, 그것도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나는 레즈비언이에요.” 라고 완벽한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버린다는 것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에 더이상 어떻게 솔직해야 하는지 두려웠고, 무서웠다.  입안이 꺼끌한 느낌이 들었고,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왜 그렇게 돌려말했을까?’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솔직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알았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잠시간 잊고 있었나보다. 그 순간에 이성애자인 그 친구가 원하는 대답은 너무나 명확해보였고, 그 대답이 너무 견고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억울함이나 허탈함은 나중에 찾아왔지만, 약간의 혐오와 자책감은 그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연쇄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목까지 차올랐었는데’, ‘다음에 만나면 말해볼까?’


‘왜 나는 나를 설명하려고 이렇게 노력해야할까?’, ‘내가 진실하지 않았던 것이 온전히 나의 잘못일까.’,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당신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나요?’ ‘나는 왜 이렇게 남죠.’ ‘왜, 이렇게 무언가 남아있죠.’ 아직 내 안에서 그 날의 대화는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게 대화였는지 질의응답을 가장한 취조였는지도 알 수 없다. 기억하지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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