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설득

1.혐오

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jonathan haidt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지만, 강력한 도덕적 직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장면을 살펴보자.

 줄리와 마크는 남매 사이다. 그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프랑스로 함께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밤 그들은 바닷가 근처 오두막에 단 둘이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둘은 한번 사랑을 나눠보면 재미있겠다는 이야기를 죽고받았다. 적어도 둘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줄리는 이미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만전을 기하기 위해 마크도 콘돔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둘은 사랑을 즐겼고, 그렇지만 다시 사랑을 나누지는 않기로 하였다. 그들은 그날 밤의 일을 특별한 비밀로 간직하였으며, 그것은 그들을 서로 더욱 가깝게 느끼도록 하였다. 여러분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사랑을 나눈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인가?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왜 잘못일까? 하이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위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매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잘못됐다고 즉각 말한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그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근친 교배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러나 줄리와 마크는 이중의 피임조치를 취했다. 사람들은 줄리와 마크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그들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도 모르겠네요. 왜 잘못됐는지 저도 설명을 못하겠어요. 하지만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알아요.”

 이처럼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하기 난처한 경우를 가리켜 하이트는 ‘도덕적으로 말문이 막힘’이라고 부른다. 도덕적으로 말문이 막히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세부 사항을 자세히 뜯어보지 않고 전체적인 상에 주목하는) 숙고 체계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그리고 갈등이 생길 때면, 흔히 그렇듯이 이기는 쪽은 선조 체계다. 설득력 있는 이유를 대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뭔가 역겨운 느낌이 우리에게서 좀처럼 가시지 않는 것이다. «145쪽, 개리 마커스, 클루지»

동성애 혐오도 비슷한 것 같다. 사고, 이성의 영향이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는 즉각적인 반응.

<동성애자 남성을 향한 혐오의 이해Towards an understanding of disgust reactions to gay men, Matthew P. Paolucci, 2008>라는 논문에서 봤는데, 혐오에는 두종류가 있다고 한단다. 순수한 혐오랑 도덕적 혐오. 순수한 혐오는 독처럼 해가 될만한 오염물질에 대한 반응으로 구역질 같은 걸 일으킨다. 도덕적 혐오는 개인의 이해를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연결된 감정이다. 순수한 혐오는 똥같은 오염물질에 의해 유발되는 반면, 도덕적 혐오는 근친상간이나 위선같이 심리적인 오염에 의해 유발된다. 또한 도덕적 혐오는 순수한 혐오와는 달리 분노라는 감정이 수반되는 특징을 지닌다. 똥을 보고 분노하진 않는 것처럼.

이 연구에 의하면 동성애남성 혐오 또한 도덕적 혐오에 속하며 분노를 수반한다. 하지만 재밌게도 남성과 달리 여성의 경우에는 분노가 없이 혐오의 감정만 있다고 한다. 또한 여성스러운 남자에 대한 경멸은 동성애혐오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문화가 다르고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급변하기에 이와 같은 결과는 내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했을 때와는 많이 다를 것 같지만, 혐오라는 감정 그것이 가지는 생물학적인 기반은 분명한 것 같다. 반사적인 느낌. 나도 남자들이 키스하는 것이 역겹다고 느낀 기억이 난다. 근데 그것이 어떤 것과, 어떤 과정을 통해, 혹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활발히 연결되는지는 환경이나 문화의 영향일 것이다. 그 과정이 궁금하다. 아이들은 언제부터 똥을 더럽다고 “느낄”까? 언제부터 남매가 키스하는 걸 보면 “혐오”를 느낄까? 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어른이 두 개의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한 상자를 들여다볼 때는 기쁜 표정을 짓고 다른 상자를 들여다볼 때는 아주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 다음 아기 쪽으로 상자들을 밀어 놓는다. 물론 아기들은 한 번도 상자 안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어른이 기쁜 표정을 지었던 상자 쪽으로는 거리낌이 없이 다가가지만 어른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상자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기는 다른 사람이 행복감이나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어떤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어떤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지도 안다.  «62쪽, 앨리슨 고프닉/ 앤드류 N. 멜초프/ 패트리샤 K. 쿨, 요람 속의 과학자»

2.설득 

당신은 Y를 혐오하는 것에 대해 X와 논쟁한다. Y에 대한 X의 혐오는 줄어들 수 있다. 당신은 X를 사실과 논리로 설득했다고 기뻐한다. 하지만 사실 X의 혐오가 줄어든 건 그/녀의 혐오와 당신의 사실/논리가 부딪쳤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혐오와 당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부딪쳤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녀와 말다툼을 하면 그/녀는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쓴다. 그/녀가 Y를 혐오하는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면 그/녀의 혐오는 줄어든다. 이 결과는 논쟁의 내용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논쟁이 있었다는 데에서 나온다. «137쪽, Marshall and Hunter Madsen, After the Ball»

뇌 영상을 이용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두 개의 상이한 근원에서 유래한다는 또 다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실험 연구(폭주하는 전차가 다섯 사람을 치어 죽일 위험한 상황에서 오직 당신만이 어느 스위치를 누르면 전차의 선로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선로를 바꾸면 다섯 명 대신 한 명이 죽게 된다. 이런 상횡에서 여러분이라면 스위치를 누르겠는가?) 에서 한 명을 희생시켜 다섯 명을 구하기로 선택한 피험자들은 배외측 전전두피질과 후측 두정피질이라는 뇌 영역에 주로 의존하였는데, 이 영역들은 신중한 추론과정에 중요하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가 하면 다섯 명을 잃더라도 한 개인을 희생시키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정서와 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변연피질의 영역에 더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145쪽, 개리 마커스, 클루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설득하고 싶다면 이성적으로 말하지 말고 흥미롭게 말하라”라고 했단다. <After the Ball>라는 책에서는 10%정도의 사람만이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고, 감정을 조절하기도 한다고 한다. 나머지 90%은 논쟁으로 무언가를 바꾸는 것은 무리이고 대체로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고 한다. 그렇기에 논리를 짜맞추고 설득하기 위해 말말말 글글글을 쓰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이성애자들의 동성애혐오를 약화시키는 방식을 찾자고 한다.(제시하는 방식은 좀 많이 구리다. 적어도 나에게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일단 다른 정치적인 사안들을 분리하고 드랙같은 이미지는 되도록 피하자는 건데, 결국 중산층 모범적인 백인 이미지를 쓰자는 거다.)

요즘 많이 느끼는 건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사람들은 구조나 환경에 자신을 끼워맞추는 것에 익숙하지, 경계를 만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는 데는 무심하다. 내가 약자일때와 강자일때 그 위치에 맞는 역할을 한다. 약자이다 강자가 되어도, 약자일때 강자의 위치를 욕했어도, 강자가 되면 그 역할을 그대로 하는 것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너무 당연하다. (기억력의 문제도 조금 있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사람 저사람 대할 때 다르다. 대하는 방식에서 가치관까지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자신을 이렇게 저렇게 그때그때 꾸미는 것 같다. 이러는 게 살기 유리한 지점들도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주구장창 이야기를 해도 나랑 있을 때만 조심하지 그의 생각이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나랑 피곤하지 않게 잘 지내는 게 목적인 거다. 가끔씩은 말로 하는 설득이 아무런 의미 없기도 하다. 옆에 실재하는 거, 커밍아웃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치지. 사람들에게 일상에 스며있는 뿌리깊은 동성애혐오 문화를 스스로 고쳐나가기를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다. 그저 “그들이 옆에 있어도 상관없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고, 나도 그들이 차별받는 것은 반대하지” 정도에 만족해야 할지도. 최소한 내가 가시적으로 차별받을 때 분노할 수 있는 정도만이라도.

물론 지금까지 내가 만난 많은 친구들처럼 이성애중심주의를 인식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난 끊임없이 이야기할 테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사람들에게는 윗문단 정도만을 요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감정이나 사고체계가 틀린 게 아니라 다를 수 있다. 내 요구가 어쩌면 그들에게는 애초에 버거운 것일 수 있다. 깊은 성찰은 많은 에너지와 시간, 주변 자원 그리고 사고능력을 필요로 하니까. 

그치만 말이야. 또 의외로 쉽게 어느센가 혐오가 없어질 수 있지도 않을까? 시금치를 먹으면 구역질을 하던 내가 지금 시금치를 잘 먹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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