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맞지 않았’다고도 했다. 맞았으면서도 ‘맞지 않았’고 때린 사람이 어줍잖게 사과를 할 때도 ‘아니 맞은 일이 없는데요’ 했다. 맞고 다니는 부끄러움에 내가 맞은 이유를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그럴 수 있었고 나는 아니었다.(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했다. 해도 되니까 하는 짓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짓거리를. 그것은 자기자리에 익숙해서가 아니었을까. 더 이상 스스로 물어볼 일 없었기 때문에. 묻지 않아도 그들 자리가 그들 처신할 방도를 알려주기 때문에.
필요한 건 껍질이다. 정체성의 그림자들. ‘대학생입니다’, ‘번역가입니다’, ‘음악가입니다’, 아니면 ‘출판사직원으로 일합니다’ 라는 말들. 간단한 부가설명으로 ‘무슨무슨 운동’, ‘무슨무슨 공부’, ‘무슨무슨 예술’, 아니면 ‘무슨무슨 무엇을 하는 어디어디 소속’이기만 하면 충분하다. 손톱으로도 뜯어질 딱지지만 ‘나는 무엇에 속한 사람’ 한 장만 붙이면 된다. 그것이 항상 유예도 하고 결정도 한다. 삶을 메꾸어준다. ‘할 수 있는 일’을 정해준다.
자기자리에 너무 친한 것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주변까지 피로하게 만들고 마는 이들. 시중드는 일을 하다보니 이제 어떤 인간이 시중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맞장구가 필요한 이들. 당신 그 자리 계속 앉아있으라 마음놓게 해줄 말 필요한 이들. 그것이 자리자리에 친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고, 완고하며 협소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내가 자리잡기까지 그들은 나를 갑이 아닌 을로 대할 것이다. 지금 갑으로 대우받은 사람들도 곧 있으면 나를 을로 부르고 갑으로서 행동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수는 없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넋두리는 실은, 지금 너무 뻔하게 예측되는 이 궤도를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느냐는 절망이다.
공간
자살한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매사에 효율을 따지는 지금 같은 때, 무덤은 죽은 자를 대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낡은 방식임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영상은 아버지의 무덤을 짓고 있었고 자식은 아버지를 땅에 묻었다. 그 땅, 그 공간을 죽은 자에 내어주고 기념하는 행위의 의미는 뭘까. 낡은 데다 지나친 행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아했다. 성묘와 같은 풍습들.
하나의 육신이 차지하기에 적당한 공간은 얼마나 될까. 부는 재물의 과잉이기도 하지만 육신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의 끈질감은 여러 채의 집과 차로 시작해 수천 년 물의 흐름을 끊는 사대강 투기로 이어진다. 삶에는 저마다의 공간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송구스러워하며 점잖게 겸손하게 살아가는 흙의 사람들에게 치졸하고 비열한 술수를 부려 땅을 앗아가려는 탐욕도 있는 것이다. 몸이 무거운 것이다.
몰인정한 나도 신을 여러 번 찾았다. 내 절박함에 비해 세계는 무심했다. 만약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모두 참이고 세상의 종말이 요한묵시록과 똑같다면 이만큼 휘청휘청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내게 투기를 했다. 종교는 값싸게 ‘공간’을 보장했다. 도시의 노른자땅에 자리잡은 교회가 그 높고 성대한 외양으로 도시의 피로한 시민들을 내려다보는 것, 그것이 요즘의 신성이다. 교회의 표피가 내세의 ‘공간’과 현세의 ‘공간’을 약속하고 있다. 삶의 피로를 현혹하고 있다. 내세에 대한 집념이 집 평수를 늘리고자 하는 세속적 열망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신의 섭리가 아니라 종교의 자가증식, 허기에 지나지 않는 건물들.
내부
외부에서 시작하여 내부로 들어오는 관계를 바랐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만이어도 괜찮은 사이에서 차츰 서로의 활동반경이 겹쳐지는 것. 생활하는 리듬이 닮고 일상에 반응하는 면면이 닮아가는 것. 그 친구와 내가 같은 시기 채식을 했고 먹는 일을 고민했던 것과 같이.
지금의 집이 내게 깨우치는 것은, 같이 밥을 먹으며 사는 게 대단한 관계맺음이라는 사실이다. 밥상에서 나누는 것은 쌀벌레 고민만이 아니다. 마주 보며 밥 먹기란 누구하고나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나 누구하고나 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누가 타인을 집으로 초대하여 밥을 내놓을 것이며 냉장고와 쌀독을 열어보이겠나. 겉면을 본다. 지불하기 쉬운 것을 지불한다. 축적할 수 없는 가치를 선물하는 행위는 흔히 없다. 줄 수 없는 것을 주거나 삶을 주는 일은 없으며 비교적 간단하게 한나절 값을 치른다. 내 삶은 누구와도 닮아가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 시간을 보내건 거의 같은 방식이다. 만남의 값을 지폐로 지불한다. 만나는 상대 자체를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을 위한 돈을 (더치페이건 무엇이건) 같이 낸다. 소비가 아니면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만남을 다른 성질의 것으로 바꿀 의지가 있고, 지불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것이 지폐는 아님을 안다면, 이제부터 다른 것을 지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더라도 지불하며 못나고 추해지는 결정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포기하거나 지거나 죽기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될 법한 일일까.
만약 가능하다면 삶이 내부에서부터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마 안 될 것이다.









4개의 댓글
아, 잇을, 보고싶어요.
좋네요. 글이.
잇을씨 글 잘 읽고 가요. 멋진 공간이네요. 더운 여름 건강 축나지 않고 잘 지내는지.. ㅜ
많이 덥지요 :-]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이제 자전거로 상수동까지 갈 수 있어요 (어제도 자정 무렵에 음주운전, 그렇지만 잘 타지는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