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와서 ‘어른’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어른’의 모습이 요구되기에 그런 척 하는 것 뿐이지, 나이가 들어도 ‘어른’의 모습이 기대되지 않을 땐, 그냥 애다.
너무 자주 초등학교, 중학교 때 남자애들이 놀고, 싸우고, 괴롭히는 장면들이 겹쳐졌다.
나에게 ‘애’와 ‘어른’이 나이로 나뉘는 건 아니다. <아들 심리학>을 읽으면서 조금 정리 되었는데, 자신의 정서를 (제대로) 읽고, (올바르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기준이었나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 이로 인해 그들도 고통받고 주변 사람들도 고통받지만, ‘남자(애)들은 원래 그래’란 말로 그냥 그렇게 방치한다.(그게 어떤 면에서는 편하기도 하다. 바꾸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으니까.) <아들 심리학>에서는 소년들도 감정이 풍부하기에 내면세계를 인정해주고(이들도 상처받는다), 정서언어를 길러주어야 한다(슬프다, 힘들다, 두렵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억을 돌이켜봐도 내가 남자애답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남자애들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타자)였다. 물론 무척이나 그 안에 들어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자애들 리더격인 아이가 나에게 처음 축구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 거절했던 일을 정말 5년 넘게 후회했었다.) 그리고선 혼자 사는 법에 익숙해지려 했다. 혼자지만 괜찮다고 되뇌였다. 그래도 친구는 있었다. 마이너한게 나 혼자만도 아니었고, 공부를 잘 한다는 권력도 있었으니까. 여기와서 알았다. 남자(애)들 문화로부터 거리를 꽤 두고 살아왔구나.
어느새 내 앞에 ”남자애들”이 너무 많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구분지어 이름을 붙이고, 이유를 따져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내가 사는 방식이 이렇다.) 그래서 <아들 심리학>도 읽은 거다. 바깥에서는 남성/여성이라는 범주를 무시하기에 충분한 변태들이 주변에 많았는데, 여기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기에 더욱 성별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남자는 정말 안 되는구나.”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어쨌던 덕분에 ’남성’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되었다.
밀턴 스테퍼니데스는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공포감을 나타내는 생리적인 반응들, 즉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고 겨드랑이에 열이 오른다 해도 그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세대 중에 아버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아버지들이 두려워지면 소리를 지른다거나 자기 책임을 피하려고 아이들을 야단치곤 했으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세대에게는 이러한 속성이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 같다. 자기반성의 결여는 용기를 북돋아 준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지난 몇 달간 아버지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었다. 내가 없어진 동안 아버지는 남들 앞에서 꿋꿋한 자세를 지켰지만, 내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불안이 잠식해 들었다. 그는 안을 끌로 파내서 속이 텅 빈 조각상과 같은 꼴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이 심해지자, 아버지는 점점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대신 그의 기분을 회복시켜 주는 몇 안 되는 것들, 모든 일이 순조롭다는 판에 박힌 이야기 따위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아버지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일 자체를 그만둬 버렸다. «341쪽, 제프리 유제니디스, 미들 섹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는 말잇기 게임을 할 때 뇌에서 밝게 나타나는 부분이 약간 다르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다면, 방송에서는 하루 종일 그 결과를 주요 기사로 보도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자가 앞의 결과를 뒤집고 별다른 남녀차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면, 그것은 별로 주목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 남녀 성차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다 보니 상당 부분 사실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 만약 성차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을 한 가지 결론으로 요약해야 한다면,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기보다는 비슷한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추측성 정보라도 일단 ‘성차’라는 말이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불변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인다.(……)사회문화적으로 남자아이들의 행동은 위협적이라거나 반항적이라고 오해받는 경우가 많고, 여자아이들보다 혹독하게 처벌되거나 험하게 다뤄지기 일쑤다. 소년들의 삶에서는 일탈이 자연스런 특성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녀들보다 더 거칠고 즉각적으로 처벌받고, 처벌의 수위도 합당한 정도보다는 더 높은 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흔하다(……)재밌는 것은 공립학교에서도 소년소녀들에게 불평등한 처벌을 내린다는 점이다. 행정관들의 조사 결과, 아프리카계 미국 소년들은 학교에서 신체적으로 심한 처벌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처벌을 받는 빈도도 아프리카계 미국 소녀들에 비해 3.1배 정도 더 높았다. 그리고 백인 소년은 백인 소녀보다 여섯 배, 아시아계 소년은 아시아계 소녀에 비해 여덟 배 정도 더 높았다. 성에 대한 편견은 이처럼 통계적으로도 너무나 명확하게 나타났다.(……) 고등학교 2학년의 한 소년이 너무나 슬픈 얼굴로 황망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외출했던 친구가 돌아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소년은 방금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노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친구는 당황해서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진심으로 그 소년을 위로해주었다. 그런데 10분쯤 후에 그 소년은 옆에 있던 친구들과 깔깔대며 “우리 아버지가 죽긴 왜 죽어?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잘 계신데?”하면서 친구를 놀려댔다. 친구의 불행을 진심으로 위로하던 소년은 순식간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 소년은 자신이 속임수에 걸려든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너무나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이 사건을 통해 ‘다음부터는 누군가 슬픈 일을 당했어도 금방 동정하지는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배웠다.(……)소년들의 세계는 약한 자를 괴롭히는 계급 조직과 같다. 따라서 서열이 낮은 힘없는 소년의 삶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단하고 괴롭다. 언제 그 ‘악당들’의 마음이 변해서 자신을 표적으로 삼을지 모르고, 최악의 경우에는 예전에 자기가 괴롭혔던 소년이 도리어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심각한 정서적 문제나 폭력, 자살을 부르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힘을 항상 과시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에 시달리는 소년들이나, ‘약해빠진 놈’이라는 딱지가 붙은 소년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더 잔인하게 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입힐지, 어떤 고통을 안겨줄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자신들도 언제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인식할 겨를이 없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또래 아이들 중에서 더 잔인한 소년들이 도리어 더 큰 두려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두렵기 때문에 더 잔인해지고, 두려움이 자신을 덮치지 않도록 자신을 더 방어하게 된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정, 믿음, 자기 존중감들을 잃어야 하고 감정의 스위치를 꺼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잔혹 문화는 소년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말고 어떻게든 견뎌낼 것, 다른 사람이 잔인한 행동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더라도 침묵할 것. 이것이 바로 잔혹 문화가 소년들에게 부과한 침묵의 규약이다. 침묵의 규약은 남자로서의 정체성에서 지배적인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 때문에 소년들은 어느 순간 침묵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소년들이 규약을 지키는 이유는 다양하다. 다시 ‘희생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또래 친구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소년들에게 반항하여 처벌받고 싶지 않아서 등등. 소년들은 그들의 문화가 가르쳐준 교훈, 즉 ‘침묵하는 것은 강하고 남자답지만, 입을 여는 것은 나약하고 여자애들이나 하는 행동’이라는 교훈을 뼈아프게 체득해왔다.(……)소년들은 정서적 고립감을 분노, 빈정거림, 적대감 등 여러 가지 양상으로 드러낸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존중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폄하한다. 소년들은 부모의 비난이나 턱없이 높은 기대, 친구들의 질시나 따돌림 때문에 상처받는다. 하지만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감정을 숨기면서 ‘어떤 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한’ 적대적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조용히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용감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빈정거리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그들이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의 동정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릴처럼, 소년들은 자기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 없어서 그 감정들에 억눌려 있는 경우가 많다. 소년들에게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장 기본적인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우리의 문화가 남자들의 고립감을 부추기고 대물림하는 한, 십대 소년들을 노리는 술과 마약 시장의 규모는 날로 커져만 갈 것이다. 또 기본적인 정서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한, 더 많은 소년들이 소외감에 시달리다가 술과 마약의 늪에 빠질 것이다. 술과 마약을 통해 정서적으로 해방된 세계를 맛보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하지만 정서적 자질이 부족한 상태에서 한 번 탈선한 소년들의 마음을 올바로 되돌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잔혹 문화는 소년들에게 남자에게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들은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친다. 소년이 그런 믿음을 갖는 만큼, 그리하여 자기 내면의 부드럽고 연약한 특성들을 혐오하는 만큼, 소년은 자기 자신과 소녀들이 가진 그런 특성들 모두를 증오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소년과 그 생각에 동조하는 다른 소년들에게, 소녀들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을 상징하며, 따라서 소녀들을 이용하거나 학대하는 것은 정당한 게임으로 간주된다. 이 같은 마초적 태도 뒤에는 소녀와 여성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댄 킨들론, 마이클 톰슨 아들 심리학»
막상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남성’과 친해지기는 힘들다.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 기대를 낮춰 애로 보면 지낼만 하기도 하지만 애라고 하기에는 신체적, 사회적 힘이 너무 막강해,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예전에 그런 공포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막강한 초능력을 지난 아이가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잡아다가 다정한 가정을 연기시킨다. 안 따르면 텔레비젼 속에 집어 넣어버린다.)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외부자로 그들을 대하게 된다. 좀 더 그들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내 영역이 아니라고 쉽게 선을 긋곤 한다. (<”눈꼽만큼”의 효과도 그들에겐 중요한가 보다.>글에서도 그런 것 같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 그럴 것 같다. 그들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
덧붙여서))이렇게만 쓰고 나니 찝찝하다. 이 글에서의 남성/남자는 긴 인용글에서 설명하듯이, 생물학적인 남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성격, 특성들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 어떤 부분은 해당하기도 하고 해당하지도 않기도 하다. 우리 모두 어느 부분은 남성이고 남성이 아니기도 하다.
남자애들
이곳에 와서 ‘어른’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어른’의 모습이 요구되기에 그런 척 하는 것 뿐이지, 나이가 들어도 ‘어른’의 모습이 기대되지 않을 땐, 그냥 애다.
너무 자주 초등학교, 중학교 때 남자애들이 놀고, 싸우고, 괴롭히는 장면들이 겹쳐졌다.
나에게 ‘애’와 ‘어른’이 나이로 나뉘는 건 아니다. <아들 심리학>을 읽으면서 조금 정리 되었는데, 자신의 정서를 (제대로) 읽고, (올바르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기준이었나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 이로 인해 그들도 고통받고 주변 사람들도 고통받지만, ‘남자(애)들은 원래 그래’란 말로 그냥 그렇게 방치한다.(그게 어떤 면에서는 편하기도 하다. 바꾸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으니까.) <아들 심리학>에서는 소년들도 감정이 풍부하기에 내면세계를 인정해주고(이들도 상처받는다), 정서언어를 길러주어야 한다(슬프다, 힘들다, 두렵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억을 돌이켜봐도 내가 남자애답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남자애들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타자)였다. 물론 무척이나 그 안에 들어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자애들 리더격인 아이가 나에게 처음 축구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 거절했던 일을 정말 5년 넘게 후회했었다.) 그리고선 혼자 사는 법에 익숙해지려 했다. 혼자지만 괜찮다고 되뇌였다. 그래도 친구는 있었다. 마이너한게 나 혼자만도 아니었고, 공부를 잘 한다는 권력도 있었으니까. 여기와서 알았다. 남자(애)들 문화로부터 거리를 꽤 두고 살아왔구나.
어느새 내 앞에 ”남자애들”이 너무 많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구분지어 이름을 붙이고, 이유를 따져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내가 사는 방식이 이렇다.) 그래서 <아들 심리학>도 읽은 거다. 바깥에서는 남성/여성이라는 범주를 무시하기에 충분한 변태들이 주변에 많았는데, 여기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기에 더욱 성별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남자는 정말 안 되는구나.”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어쨌던 덕분에 ’남성’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되었다.
막상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남성’과 친해지기는 힘들다.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 기대를 낮춰 애로 보면 지낼만 하기도 하지만 애라고 하기에는 신체적, 사회적 힘이 너무 막강해,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예전에 그런 공포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막강한 초능력을 지난 아이가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잡아다가 다정한 가정을 연기시킨다. 안 따르면 텔레비젼 속에 집어 넣어버린다.)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외부자로 그들을 대하게 된다. 좀 더 그들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내 영역이 아니라고 쉽게 선을 긋곤 한다. (<”눈꼽만큼”의 효과도 그들에겐 중요한가 보다.>글에서도 그런 것 같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 그럴 것 같다. 그들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
덧붙여서))이렇게만 쓰고 나니 찝찝하다. 이 글에서의 남성/남자는 긴 인용글에서 설명하듯이, 생물학적인 남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성격, 특성들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 어떤 부분은 해당하기도 하고 해당하지도 않기도 하다. 우리 모두 어느 부분은 남성이고 남성이 아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