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이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구원받는 길은 이 모든 일이 자기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인종, 자기 피부 속에 들어 있는 색소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오래전 선조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이다. 어머니, 이모,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세심한 손길로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켰고, 비록 흑인일 때는 그럴 수 없지만 개인으로 있을 때에는 얼마든지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들은 네가 조니기 때문에 네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야. 저들은 널 알지도 못해. 네가 흑인이니까 흑인 전체를 상대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야.”
«95쪽, 블랙 라이크 미, 존 하워드 그리핀»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왕따를 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 괴롭힘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내가 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고, 외국이라서 말도 문화도 잘 모르니 그러려니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학교가기가 싫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기억나는 건 스쿨버스에서 빈자리가 있어도 내가 앉는 건 싫다고 막던 거랑, 스태이플러를 나한테 쏘아댄 거(얘네들은 한국 애들이었다), 내 앞에서 대놓고 몇 점이라고 점수 매기는 여자애들(뭐, 게네는 모두에게 점수를 매기긴 했지만), 짝이 필요한 수업은 항상 곤란해했던 정도다.
흑인 아이들. 나에게 수학을 잘 한다고 말을 건 친구가 생각난다. 내 지우개를 빌려가 구멍을 뚫어 돌려준 여자아이도 생각나고. 나는 언제나 그들을 흑인으로 봤다. 피부색, 인종은 그때부터 이미 아주 강력한 범주였다. 그 범주를 통해 (‘흑인은 이래 또는 저래’) 온갖 이미지와 편견을 만들었다. (나는 안경 착용 여부나 어느 손을 주로 사용하는 가로 범주를 만들지는 않았다. 왼손잡이들은 이래, 혹은 저래 하는 식으로.) 그의 모든 특성들은 인종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재밌게도 어떤 특성들만이 남는다. 기존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내용들만이.
빨주노초파남보. 난 항상 남색이 왜 들어갔을까 했다. 그냥 파랑만 칠하고 싶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무지개 색을 세가지라고 한단다. 무지개의 색들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지개를 그냥 보면 그렇게 빨주노초파남보로 보인다. 하지만 어디서 어디까지가 주황인지, 다홍색과 연두색은 어디로 갔는지 찾기 시작하면 또 다르게 보인다. 게다가 빨강과 보라의 바깥부분은 빛이 있어도 우리가 보지 못한다.
범주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한다.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또한 본능적이라 착각할 만큼 강력한 범주다. 범주는 일단 만들어지면 스스로 뼈에 살을 붙여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다. 거기에 권력이라는 먹이가 있다면 좀처럼 어쩔 수 없을 만큼 막강해진다.
어쩌면 범주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어떤 책에서인가 우리 뇌는 범주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고 했던 것 같다. (하긴 모든 딸기를 하나하나 다른 걸로 인식하고 칭할 순 없으니까) 게다가 이미 만들어진 범주는 무의식까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없애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건들 수 있는 건 범주의 위상, 범주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그리고 이미지가 미치는 영향력 정도이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경계를 드러내 그것이 절대적이고 자연스런 구분이 아니라는 건 알게 할 수 있다. 흑인/백인으로 나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어도, 흑인은 게으르고 멍청하다는 이미지는 인종차별주의자의 더러운 편견으로 받아들여져야지, 과학적 ‘근거’들로 무장되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실’로 여겨져선 안 된다.
범주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왕따를 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 괴롭힘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내가 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고, 외국이라서 말도 문화도 잘 모르니 그러려니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학교가기가 싫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기억나는 건 스쿨버스에서 빈자리가 있어도 내가 앉는 건 싫다고 막던 거랑, 스태이플러를 나한테 쏘아댄 거(얘네들은 한국 애들이었다), 내 앞에서 대놓고 몇 점이라고 점수 매기는 여자애들(뭐, 게네는 모두에게 점수를 매기긴 했지만), 짝이 필요한 수업은 항상 곤란해했던 정도다.
흑인 아이들. 나에게 수학을 잘 한다고 말을 건 친구가 생각난다. 내 지우개를 빌려가 구멍을 뚫어 돌려준 여자아이도 생각나고. 나는 언제나 그들을 흑인으로 봤다. 피부색, 인종은 그때부터 이미 아주 강력한 범주였다. 그 범주를 통해 (‘흑인은 이래 또는 저래’) 온갖 이미지와 편견을 만들었다. (나는 안경 착용 여부나 어느 손을 주로 사용하는 가로 범주를 만들지는 않았다. 왼손잡이들은 이래, 혹은 저래 하는 식으로.) 그의 모든 특성들은 인종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재밌게도 어떤 특성들만이 남는다. 기존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내용들만이.
빨주노초파남보. 난 항상 남색이 왜 들어갔을까 했다. 그냥 파랑만 칠하고 싶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무지개 색을 세가지라고 한단다. 무지개의 색들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지개를 그냥 보면 그렇게 빨주노초파남보로 보인다. 하지만 어디서 어디까지가 주황인지, 다홍색과 연두색은 어디로 갔는지 찾기 시작하면 또 다르게 보인다. 게다가 빨강과 보라의 바깥부분은 빛이 있어도 우리가 보지 못한다.
범주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한다.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또한 본능적이라 착각할 만큼 강력한 범주다. 범주는 일단 만들어지면 스스로 뼈에 살을 붙여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다. 거기에 권력이라는 먹이가 있다면 좀처럼 어쩔 수 없을 만큼 막강해진다.
어쩌면 범주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어떤 책에서인가 우리 뇌는 범주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고 했던 것 같다. (하긴 모든 딸기를 하나하나 다른 걸로 인식하고 칭할 순 없으니까) 게다가 이미 만들어진 범주는 무의식까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없애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건들 수 있는 건 범주의 위상, 범주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그리고 이미지가 미치는 영향력 정도이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경계를 드러내 그것이 절대적이고 자연스런 구분이 아니라는 건 알게 할 수 있다. 흑인/백인으로 나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어도, 흑인은 게으르고 멍청하다는 이미지는 인종차별주의자의 더러운 편견으로 받아들여져야지, 과학적 ‘근거’들로 무장되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실’로 여겨져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