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Prologue)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인 가족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어른들의 술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미숙은 조용히 약봉투를 꺼내어 알약을 잘게 부숴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아직 알약을 삼키지 못하는 8살 난 딸아이 지윤에게 먹일 약이었다.
”시끄럽게 지금 뭐하는 거야?”
”아, 지윤이가 아직 알약을 못 먹는데 약국에서 알약으로 줬네. 가루약으로 달라고 먼저 말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깜빡했더니.”
”뭐? 최지윤! 이리로 와봐!”
”아빠, 왜?”
”너 몇 살인데 아직 알약을 못 삼켜?!”
성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겨우 8살 난 아이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성욱의 손과 지윤의 뺨이 부딪히며 낸 소리와 동시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술자리 분위기는 서늘해졌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애가 아직 알약을 못 삼킬 수도 있지! 어른들도 못 삼키는 사람이 있는데!”
”내 아이야! 내 맘대로 키워! 난 알약도 못 삼키게 멍청하게 키우진 않을 거야!”
말리는 미숙에게 소리를 지른 성욱은 울고 있는 아이에게 또다시 뺨을 치려는 기세로 노려봤다.
”아빠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제발….제발요!!!”
1. 악몽
”살려주세요! 제발!”
소리를 지르며 지윤은 잠에서 깼다. 오늘도 악몽을 꾼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지윤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서랍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지윤이 우울증과 불면증을 겪으며 수면제를 먹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5개월이나 되었다. 아니, 그전부터 그녀는 슬픔에 가득 찬 사람이었지만 바닷가에서 자살시도를 했다가 구출된 뒤부터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지윤은 언제나 슬픈 얼굴이었다.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복용하며 겨우 잠자리에 들고 낮에 웃으며 활동했지만, 약으로도 그녀의 슬픈 얼굴을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애써 웃음지어도 그녀와 친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걱정할 정도로 그녀의 얼굴엔 언제나 그늘이 져있었다.
다음날 아침, 겨우 잠에서 깬 지윤은 오늘도 어김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상담치료를 받고 한 달에 두 번 수면제과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고 있었고, 오늘은 상담을 받기위해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러가며 문득 휴대폰을 열었다. 휴대폰을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은 지윤의 습관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휴대폰의 시계를 본 지윤은 버스를 타려다 택시를 타러 발걸음을 옮겼다. 예약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였다.
”세브란스 병원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10시까지 예약되어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지윤은 말없이 창문을 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MP3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슬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윤은 음악에 빠져들며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껴져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놀라 이어폰을 뺐다.
”손님, 무슨 일 있으세요?”
택시기사 아저씨가 말을 건다. 꼭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다정한 택시기사님들이 있지. 지윤에게 무슨일 있냐는 질문은 너무도 익숙했다.
”아뇨. 뭐 별일 아니에요..”
”병원에 예약하신 것도 그렇고 아가씨 표정도 그렇고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근데, 아직 멀었나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허허. 젊은 아가씨가 너무 그렇게 슬픈 표정 짓고 그러지 말아요. 예쁜 얼굴이 빛이 안나. 내 딸 같아서 말 하는 거야. 허허”
”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면서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했다. 지윤은 내리면서 잔돈은 그냥 아저씨를 드렸다. 기사아저씨가 계속 사양했지만 지윤은 드리고 싶다며 그냥 드리고는 내려버렸다.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던 따뜻한 말을 들어 감동받았던 것일까?
어쨌든 지윤은 병원에 들어갔다. 예약증을 냈더니 바로 들어오라고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상담선생님은 반갑게 지윤을 맞이했다.
”일주일간 어떻게 기분은 좀 괜찮아졌어요?”
”네..뭐…그럭저럭이요..”
”또 악몽을 꿨나요? 오늘은 어떤 악몽이었죠?”
”그냥…어렸을 때 좀 안 좋은 기억이 꿈에 나왔어요. 괜찮아요 지금은.”
잠깐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곧 선생님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지윤씨 우울증은 마음에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쏟아내야지 치료가 가능해요. 본인이 우울증을 치료하겠다는 의지도 갖고 있어야하구요. 지윤씨가 물론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기 어렵다는 것도 알지만 제가 지금 제일 궁금한 건 본인의 의지에요. 지윤씨가 우울증을 치료할 마음만 있다면 전문 심리상담사 한분을 소개해주려고 하는데 어때요?”
”네? 심리상담사요?”
”네. 벌써 5개월째 우리가 만나고 있는데도 지윤씨 상태가 전혀 낫지 않는 건, 그저 여기에 와서 하루 일과처럼 약만 타가고 약만 먹기 때문이에요. 약에 의지만 해서는 안되요. 지윤씨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치료할 마음이 있다면 약물 치료와 함께 상담치료도 병행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윤은 살짝 망설였다. 사실 지윤은 자살시도에 실패한 이후 더더욱 힘이 없이 살고 있었다. 삶에 대한 의욕은 그 전보다 더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약을 먹고 병원을 다니고 자살시도를 또다시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망설여지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모르는 무언가가 그녀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겨우겨우 막고 있었다.
”지윤씨?”
”네. 상담치료도 같이 받을께요.”
”그럼 다음 예약이 다음 주 화요일이니까 그때 이쪽에 들렸다 약을 받아가시고 그 다음에 심리상담소 위치 알려드릴 테니까 그쪽으로 한번 가보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뵙죠.”
”잠 안온다고 너무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안 되는 거 저번에도 말했죠? 잘 지키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지윤은 인사를 하고 나와서 예약증을 받고 병원비를 낸 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엇이 자신이 자꾸 살수밖에 없게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살도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살아갈 자신도 없고, 계속해서 꾸는 악몽도 그녀를 너무나 힘들게 만드는데도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면 무언가 망설여져 결국 포기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지난 5개월 동안은 적어도 그랬다. 5개월 전 자살시도를 할 때만 해도 그녀는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다. 지윤은 문득 자살하러갔던 강릉 바닷가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5개월 전 겨울에 그녀는 우울한 수험생이었다. 우울증을 겪으며 포기했던 대학 입시에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자신감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꽤 오래전의 일이고 그렇기에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도 몰랐다. 어려운 집안 사정상 학원을 다니는 일은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었기에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며 남는 시간에 공부를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녀는 문득 겨울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갑작스레 주변인들에게 전화로 인사를 돌렸다. 다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그냥 연말이니까 인사를 돌린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지갑과 휴대폰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무작정 강릉으로 향했다.
MP3를 귀에 꽂은 채 버스를 타고 강릉에 도착한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바닷가를 걸으며 슬픈 음악을 듣던 지윤은 주머니에서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엄마 미안해. 나같이 못난 걸 그래도 큰딸이라고 믿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엄마 바쁘니까 끊는다.”
”응 엄마. 몸 건강하구. 일찍 집에 들어가요. 너무 무리하지 말구.”
지윤의 마지막 말을 들은 건지 못들은 건지 전화는 이미 끊겨있었다. 지윤은 바닷가에 앉았다. 그리고 쓸쓸한 겨울바다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일어나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그 옆에 지갑과 휴대폰, MP3를 놓아둔 채 서서히 바다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천천히, 천천히 바다 속으로 몸을 이끌었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허우적대는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찬 바닷물은 지윤의 체온을 급속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죽어가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여긴…”
”병원이에요! 휴 다행이다. 왜 바다에 그렇게 들어가고 그래요! 큰일 날 뻔 했잖아요!”
”어떻게…”
”저기 저쪽에 남자분이 구해서 병원으로 데려오셨어요. 저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간호사가 가리킨 쪽에는 20대 후반처럼 보이는 웬 남자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간호사가 부르자 남자는 졸린 듯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네..근데 어떻게 된 거에요?”
”그냥 겨울바다 걷고 싶어서 걷고 있는데 바다에 사람이 빠져있는 것 같아서요…”
”…..”
”가족들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휴대폰이 모두 비밀번호가 잠겨있어서 못했어요. 깨어나셨으니까 가족들에게 연락해보세요. 전 서울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네, 고맙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나갔다. 지윤은 남자가 나간 뒤에 간호사에게 이제 괜찮으니 링거를 빼달라고 말하고 병원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까 나간 남자분이 오늘 입원비까지는 모두 내셨다며 아직 몸 상태가 회복된 것 같지 않은데 정말 괜찮겠느냐고 계속 물었다. 지윤은 괜찮다고 말하고 그 남자의 연락처를 물었으나 간호사는 그 남자가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고만 대답했다. 링거를 빼고 지윤은 바로 달려 나갔으나 이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뒤따라 달려 나온 간호사가 지윤을 불렀다.
”저기요! 환자분!”
”네?! 왜 그러세요?”
”아까 남자분이 환자분 옷 다 젖어서 추울 거라면서 이 옷들을 사두고 갔어요. 그리고 이 쪽지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주제넘은 판단이고 참견일지 모르겠지만. 자살이란 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본인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모르나보네요. 옷이 다 젖어서 일단 새 옷 사서 두고 갑니다. 사이즈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젖은 옷 입고 추운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예의는 아니지만 지갑에 신분증을 봤는데 서울 분이시더라구요. 서울에 가시면 제가 남겨둔 병원에 연락해보세요. 우울증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아래에는 세브란스 병원 정신과 전화번호가 남겨져있었다. 지윤은 피식 웃었다. 마치 잘 아는 사람의 병원인 것처럼 써놓고는 아래에는 유명한 세브란스 병원의 전화번호를 남겨둔 것이 약간 우스웠다. 지윤은 간호사에게 옷을 받아 갈아입고는 서울로 향했다.
[라별의 소설 연재]H.A.T.E.U. (1)
H.A.T.E.U.(Having A Typical Emotonal Upset)
라별의 인생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소설입니다. 기존에 네이버에서 제 블로그에
연재하다가 중간에 끊어졌던 소설을 약간의 수정 후에 이 곳에서 연재해볼까 해요,
흥미 진진하거나 그런 내용은 아닐것 같으니 기대는 마시구요
허구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긴 했으나 주인공이 겪는 일들이나, 감정적인 변화 및
심리 상태 등은 라별의 과거 및 현재 상황이 그대로 담겨있답니다.
제목인 H.A.T.E.U.(Having A Typical Emotional Upset)은
라별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머라이어캐리의 노래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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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E.U.(Having A Typical Emotonal Upset)
최지윤 : 주인공. 27살이며 고3때 우울증으로 대학교에 늦게 들어가 대학생이지만,
집안 경제 사정으로 휴학하고 직장에 다닌다.
박현민 : 지윤의 심리 상담사. 32살의 젊은 나이지만,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엘리트.
지윤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밖의 인물 :
신미숙(지윤의 어머니), 최성욱(지윤의 아버지), 안현주(지윤의 가장친한 친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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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Prologue)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인 가족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어른들의 술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미숙은 조용히 약봉투를 꺼내어 알약을 잘게 부숴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아직 알약을 삼키지 못하는 8살 난 딸아이 지윤에게 먹일 약이었다.
”시끄럽게 지금 뭐하는 거야?”
”아, 지윤이가 아직 알약을 못 먹는데 약국에서 알약으로 줬네. 가루약으로 달라고 먼저 말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깜빡했더니.”
”뭐? 최지윤! 이리로 와봐!”
”아빠, 왜?”
”너 몇 살인데 아직 알약을 못 삼켜?!”
성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겨우 8살 난 아이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성욱의 손과 지윤의 뺨이 부딪히며 낸 소리와 동시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술자리 분위기는 서늘해졌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애가 아직 알약을 못 삼킬 수도 있지! 어른들도 못 삼키는 사람이 있는데!”
”내 아이야! 내 맘대로 키워! 난 알약도 못 삼키게 멍청하게 키우진 않을 거야!”
말리는 미숙에게 소리를 지른 성욱은 울고 있는 아이에게 또다시 뺨을 치려는 기세로 노려봤다.
”아빠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제발….제발요!!!”
1. 악몽
”살려주세요! 제발!”
소리를 지르며 지윤은 잠에서 깼다. 오늘도 악몽을 꾼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지윤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서랍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지윤이 우울증과 불면증을 겪으며 수면제를 먹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5개월이나 되었다. 아니, 그전부터 그녀는 슬픔에 가득 찬 사람이었지만 바닷가에서 자살시도를 했다가 구출된 뒤부터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지윤은 언제나 슬픈 얼굴이었다.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복용하며 겨우 잠자리에 들고 낮에 웃으며 활동했지만, 약으로도 그녀의 슬픈 얼굴을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애써 웃음지어도 그녀와 친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걱정할 정도로 그녀의 얼굴엔 언제나 그늘이 져있었다.
다음날 아침, 겨우 잠에서 깬 지윤은 오늘도 어김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상담치료를 받고 한 달에 두 번 수면제과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고 있었고, 오늘은 상담을 받기위해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러가며 문득 휴대폰을 열었다. 휴대폰을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은 지윤의 습관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휴대폰의 시계를 본 지윤은 버스를 타려다 택시를 타러 발걸음을 옮겼다. 예약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였다.
”세브란스 병원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10시까지 예약되어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지윤은 말없이 창문을 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MP3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슬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윤은 음악에 빠져들며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껴져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놀라 이어폰을 뺐다.
”손님, 무슨 일 있으세요?”
택시기사 아저씨가 말을 건다. 꼭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다정한 택시기사님들이 있지. 지윤에게 무슨일 있냐는 질문은 너무도 익숙했다.
”아뇨. 뭐 별일 아니에요..”
”병원에 예약하신 것도 그렇고 아가씨 표정도 그렇고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근데, 아직 멀었나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허허. 젊은 아가씨가 너무 그렇게 슬픈 표정 짓고 그러지 말아요. 예쁜 얼굴이 빛이 안나. 내 딸 같아서 말 하는 거야. 허허”
”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면서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했다. 지윤은 내리면서 잔돈은 그냥 아저씨를 드렸다. 기사아저씨가 계속 사양했지만 지윤은 드리고 싶다며 그냥 드리고는 내려버렸다.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던 따뜻한 말을 들어 감동받았던 것일까?
어쨌든 지윤은 병원에 들어갔다. 예약증을 냈더니 바로 들어오라고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상담선생님은 반갑게 지윤을 맞이했다.
”일주일간 어떻게 기분은 좀 괜찮아졌어요?”
”네..뭐…그럭저럭이요..”
”또 악몽을 꿨나요? 오늘은 어떤 악몽이었죠?”
”그냥…어렸을 때 좀 안 좋은 기억이 꿈에 나왔어요. 괜찮아요 지금은.”
잠깐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곧 선생님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지윤씨 우울증은 마음에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쏟아내야지 치료가 가능해요. 본인이 우울증을 치료하겠다는 의지도 갖고 있어야하구요. 지윤씨가 물론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기 어렵다는 것도 알지만 제가 지금 제일 궁금한 건 본인의 의지에요. 지윤씨가 우울증을 치료할 마음만 있다면 전문 심리상담사 한분을 소개해주려고 하는데 어때요?”
”네? 심리상담사요?”
”네. 벌써 5개월째 우리가 만나고 있는데도 지윤씨 상태가 전혀 낫지 않는 건, 그저 여기에 와서 하루 일과처럼 약만 타가고 약만 먹기 때문이에요. 약에 의지만 해서는 안되요. 지윤씨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치료할 마음이 있다면 약물 치료와 함께 상담치료도 병행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윤은 살짝 망설였다. 사실 지윤은 자살시도에 실패한 이후 더더욱 힘이 없이 살고 있었다. 삶에 대한 의욕은 그 전보다 더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약을 먹고 병원을 다니고 자살시도를 또다시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망설여지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모르는 무언가가 그녀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겨우겨우 막고 있었다.
”지윤씨?”
”네. 상담치료도 같이 받을께요.”
”그럼 다음 예약이 다음 주 화요일이니까 그때 이쪽에 들렸다 약을 받아가시고 그 다음에 심리상담소 위치 알려드릴 테니까 그쪽으로 한번 가보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뵙죠.”
”잠 안온다고 너무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안 되는 거 저번에도 말했죠? 잘 지키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지윤은 인사를 하고 나와서 예약증을 받고 병원비를 낸 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엇이 자신이 자꾸 살수밖에 없게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살도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살아갈 자신도 없고, 계속해서 꾸는 악몽도 그녀를 너무나 힘들게 만드는데도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면 무언가 망설여져 결국 포기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지난 5개월 동안은 적어도 그랬다. 5개월 전 자살시도를 할 때만 해도 그녀는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다. 지윤은 문득 자살하러갔던 강릉 바닷가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5개월 전 겨울에 그녀는 우울한 수험생이었다. 우울증을 겪으며 포기했던 대학 입시에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자신감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꽤 오래전의 일이고 그렇기에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도 몰랐다. 어려운 집안 사정상 학원을 다니는 일은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었기에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며 남는 시간에 공부를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녀는 문득 겨울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갑작스레 주변인들에게 전화로 인사를 돌렸다. 다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그냥 연말이니까 인사를 돌린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지갑과 휴대폰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무작정 강릉으로 향했다.
MP3를 귀에 꽂은 채 버스를 타고 강릉에 도착한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바닷가를 걸으며 슬픈 음악을 듣던 지윤은 주머니에서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엄마 미안해. 나같이 못난 걸 그래도 큰딸이라고 믿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엄마 바쁘니까 끊는다.”
”응 엄마. 몸 건강하구. 일찍 집에 들어가요. 너무 무리하지 말구.”
지윤의 마지막 말을 들은 건지 못들은 건지 전화는 이미 끊겨있었다. 지윤은 바닷가에 앉았다. 그리고 쓸쓸한 겨울바다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일어나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그 옆에 지갑과 휴대폰, MP3를 놓아둔 채 서서히 바다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천천히, 천천히 바다 속으로 몸을 이끌었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허우적대는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찬 바닷물은 지윤의 체온을 급속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죽어가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여긴…”
”병원이에요! 휴 다행이다. 왜 바다에 그렇게 들어가고 그래요! 큰일 날 뻔 했잖아요!”
”어떻게…”
”저기 저쪽에 남자분이 구해서 병원으로 데려오셨어요. 저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간호사가 가리킨 쪽에는 20대 후반처럼 보이는 웬 남자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간호사가 부르자 남자는 졸린 듯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네..근데 어떻게 된 거에요?”
”그냥 겨울바다 걷고 싶어서 걷고 있는데 바다에 사람이 빠져있는 것 같아서요…”
”…..”
”가족들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휴대폰이 모두 비밀번호가 잠겨있어서 못했어요. 깨어나셨으니까 가족들에게 연락해보세요. 전 서울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네, 고맙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나갔다. 지윤은 남자가 나간 뒤에 간호사에게 이제 괜찮으니 링거를 빼달라고 말하고 병원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까 나간 남자분이 오늘 입원비까지는 모두 내셨다며 아직 몸 상태가 회복된 것 같지 않은데 정말 괜찮겠느냐고 계속 물었다. 지윤은 괜찮다고 말하고 그 남자의 연락처를 물었으나 간호사는 그 남자가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고만 대답했다. 링거를 빼고 지윤은 바로 달려 나갔으나 이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뒤따라 달려 나온 간호사가 지윤을 불렀다.
”저기요! 환자분!”
”네?! 왜 그러세요?”
”아까 남자분이 환자분 옷 다 젖어서 추울 거라면서 이 옷들을 사두고 갔어요. 그리고 이 쪽지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주제넘은 판단이고 참견일지 모르겠지만. 자살이란 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본인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모르나보네요. 옷이 다 젖어서 일단 새 옷 사서 두고 갑니다. 사이즈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젖은 옷 입고 추운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예의는 아니지만 지갑에 신분증을 봤는데 서울 분이시더라구요. 서울에 가시면 제가 남겨둔 병원에 연락해보세요. 우울증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아래에는 세브란스 병원 정신과 전화번호가 남겨져있었다. 지윤은 피식 웃었다. 마치 잘 아는 사람의 병원인 것처럼 써놓고는 아래에는 유명한 세브란스 병원의 전화번호를 남겨둔 것이 약간 우스웠다. 지윤은 간호사에게 옷을 받아 갈아입고는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