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사비는 솔직한 맛

 
‘남자친구’는 왜 분홍색 자전거를 샀느냐고 벌써 세 명이나 물었다. 그런 게 궁금하냐.  
속이 따가운 일상이다. 최근에도 그랬다. 직/간접 어느 쪽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데 한사코 그 남자 그 남자 부르기에 그만 벌컥. (그럴 리도 없는 것이 그는 가면 속의 댄서였고) 그 상황 곁에 앉은 외국인에게 알려주겠다고, 꺼내는 말머리가 더욱 그만 신경을 긁어버렸다. ‘SHE says the GUY is 블라블라.’ (이름 어디 갔나요?) ‘편의’에 따라 일어나는 행위들은 목을 조른다. 물론 누군가는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도 말한다. 경험만으로도 감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친지였다면’ 자기도 달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의가 있겠으며 퀴어운동에 귀를 기울이겠단 소리다. ‘내 곁에 성소수자가 없기 때문에’, 잘 몰랐다고 하면서도 ‘늘 관심이 있다’는 증명 불가능한 억지 쓰는 까닭 어찌 다 알 수가 있으랴만, ‘내 곁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들 달리 비춰지지도 않는다. ‘드러나지 않음’을 떠드는 두 가지 태도, 유사한 마음가짐: (드러날 만큼 다수라면 내 행동이 달라질 텐데) 너희는 소수다 / (너희가 다수인 것이 싫다, 그러니)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다
속편한 비가시성. 톡 까놓고 말해 ‘그런 사람들’ 아니 ‘동성애자들’은, ‘소수’니까 (화자의 경험에 의하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상관 없’지 않냐 (이대로 착하게 아무것도 안할 거지롱). 커밍아웃한 이웃이 무탈하게 살고 있는 줄로만 알고, 더 나아가 탈 많은 하루를 떠안기기까지 (쿨하고 시크하고 섹시하게). 그러면서도 스스로 비주류로 위치 짓고 공존과 연대를 위장하고 싶은 이들에게 어떤 식의 기대를 품어야 하나. 이름뿐인 공존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은 상식’) 을 믿지 않듯이 공존하는 자들의 지지도 바라지 않는다. 혹자는 대안을 기대하고 혹자는 연대를 믿는 내색이지만, 본인 기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와사비라고 해서 먹었는데 간장.’ 대안이 되어주기도 구색 맞춤 퍼포먼스에 동참하기도 싫다. ‘와사비간장에 간장 넣지 말아주세요.’
시작은 언제나 제 버릇 고치기여야 할 것 같다. 한 번도 스스로 물은 적 없는 것. ‘너의 불편함’이 아니라 자기의 당연한 자리를 (흩어지지 않음을) 묻는 것이 질문다운 질문이다. 자신의 속은 어째서 예외적으로 시달리는 일 없었는지, 불편함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달리 행할지 고심할 일도 없는 것이다. 과연 질문이 있었으며, 솔직할 용기가 있나. 아마도 각자의 위치에서 닿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물론 닿을 수 없는 것도 있고) (그것이 주로 무엇인지 알지만) 각자 최선의 질문을 하고 자기자신은 자기자신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누구를 바꿀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른 포기를 하고 있다 또는 희망이 없다).
다만 버릴 수 없는 감각이 스스로 앓는 때가 있고, 일기를 쓰면서도 부끄러워 찢어버리는 날이 있다. 방문마다 야생동물 나무딱지를 붙이고 ‘여자방’ ‘남자방’ 대신 ‘사슴방’ ‘곰방’이라고 하면 사슴하고 곰이 될까. 그러면 곰이나 두루미처럼 하고, 친구는 박쥐나 토끼로 삼고, 더 이상 두드러질 일도 삭제될 일도 없을까. 불화를 일으키는 법도 없이. 나는 해답을 모른다. 이제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방식으로 방어막을 칠 수도 없다. 그럴 수조차 없다. 점차 우물쭈물한 맛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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