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두었던 기억들



“그럼 우리 사귈까?”

그런데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너한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전학 오기 전의 학교에는 아직도 나의 전 삶이 남아있고 또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해졌다. 아마, 니가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근데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

“응?”

아마, 장난으로 엄마, 아빠, 딸의 관계를 맺고, 소꿉장난의 연장선에서 관계맺기 놀이를 하자는 거였나보다. 하지만, 내가 진지해져서인지 그 애도 진지해져버렸다. 갑자기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가슴이 서먹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이상하게 간질거리게 하는 바람이 우리 사이에 부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이 순간을 기억하는 건 나에게 되게 힘든 일이다. 왜일까? 우리가 너무 장난처럼 진지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솔직할 수 있었던 순간이어서 그랬을까. 너는 나한테 굳이 지금 사귀는 애가 여자인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그냥 알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좋고, 내 애인은 여자이고, 나는 그래도 네가 좋았고, 너도 내가 좋았다고 말이다.

나는 그 날 내 삶을 남겨두고 왔던 전 학교의 애인에게 그만 만나자고 말을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그 애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야?” 라고 물어보는 그 말의 의미가 온 살갖으로 다 전해졌다. “네가 매일 전화로 얘기하던 그 애야?”, “결국 그렇게 된거야?”, “나는 나 좋다는 오빠들 다 뿌리치고 여자인 너랑 사귀었는데 니가 지금 나한테 이 얘기를 하는거야?”, “정말 그런거야?” 그 짧은 순간에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바랑둥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단어는 껄끄럽고 혀에서 미끄러지는 느끼한 파마머리를 연상시켰지만, 그리고 그 단어는 남자애를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나는 그냥 그 단어에 나를 집어넣어보았다.

그런데 그냥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굉장히 이상했다.


-

나는 아직도 이 연애에 머물러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시작을 적는 것도 그 끝을 적는 것도 감정들만을 적어넣는 것도 모두 다 말이 되지 않는다. 치유를 위한 글쓰기라고 포장할 수도 없고, 그냥 나에게는 이 얘기를 넣어둘 서랍의 크기를 재 볼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가끔씩 이 연애에 대해서 드문드문한 기억을 되살려,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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