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몸 말하겠어: 접경지대로서의 몸/행위매개로서의 몸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야, 나 여기까지 머리가 있으면 어떨 거 같아?”

 필자의 가까운 지인 중 한 사람은 최근 모발 이식 수술을 받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M자형 이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모발이식수술을 고려해본 건 최근에 와서야의 일이다. 요즘 텔레비전에 건강/미용 프로그램에 탈모에 대한 주제가 자주 다뤄지면서 어떻게 하면 이 몸의 일부분을 조작하고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났다. 예전에 비해 “수술”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도 평균적으로 가벼워진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듣자마자 그녀에게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설득 멘트는: “아, 왜~ 지금도 충분히 ‘예쁜’데! 언니 이마 모양 바뀌면… 막… 언니 아닌 거 같을 거 같아. 이상해~ 하지 마. 응?”

  그녀는 그녀 허벅지에 있다는 “셀룰라이트1)”도 싫어한다. 그녀로부터 “셀룰라이트”가 뭔지 배운 날, 나는 괜히 내 허벅지의 살을 집어보았다. 꼴에 여성주의자를 지향하는 인간인지라, 너무 노골적으로는 말고 적당히 은밀하고 재빠른 눈길로 내 허벅지에도 그 셀룰라이트라는 게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며 말이다. 키가 큰 그녀는 가끔 자기 덩치가 너무 커 보이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도 한다. 난 높은 곳에 있는 물건도 바로 꺼낼 수 있고 기성복을 살 때 바지 길이를 안 줄여도 되는 키 큰 그녀가 부러운데 말이다.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니까, 내가 그녀의 몸에 대해 혹은 그녀 몸에 대한 그녀의 결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되는 건가?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니까…… 잠깐.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인가? 내 몸은? 잠깐, 잠깐. 우리 모두의 몸은? 우리 모두… 각자의 몸은 오롯이 우리 각자의 것인가?

규범, 범주, 그리고 접경지대로서의 몸

 여성주의는 지금까지 성별이분법에 따라 특정한 역할과 위치를 부여하는 젠더 규범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의 신화를 해체하려고 노력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젠더 규범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에 대한 정의나 해석도 다양하다.2)  Holly Devor는 그것을 개인이 젠더 규범과 갈등하거나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해석한 반면, 한국의 퀴어 문화 활동가인 루인은 개인이 젠더 규범과 갈등하건 편하게 받아들이건 혹은 부정하건 긍정하건 상관없이, 젠더 규범과 관계 맺는 방식과 젠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한다.3) 만약 그 ‘젠더 경합’(한국어 표현)을 더 확장해서 해석하면 어떨까? 젠더 경합은 개인과 규범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규범과 규범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젠더 규범은 반드시 모든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여야만 하는가?

 규범 역시 그 순간 맺고 있는 관계와 몸이 위치한 공간에 따라서 유동적이다. 이성애 젠더규범이라고 불리는 것도 여러 얼굴을 지닌 존재이다. 예컨대, TV의 (이성연애) 소개팅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가 무대에서 소위 ‘섹시 댄스’를 출 때와 그 여성이 사귀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남자의 부모님을 찾아뵈려고 할 때, 이성애 젠더 규범은 그 여성에게 각각 다른 모습의 몸을 수행(perform)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곧 성별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젠더 규범(들)이 으레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내적으로 완결되어 있는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젠더 규범 그 자체가 철옹성 같다기보다는, 그 규범을 지키려는 사회의 노력이 철옹성 같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의 몸은 사회적으로 그 몸에게 맞는 것으로 간주되는 젠더를 거부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열심히 수행하려고 하지만, 그 젠더(여성성, 남성성, 부치 등등) 역시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므로 항상 줄타기하는 몸이 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성’의 정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몸은 이런 경합의 장소이다. 이런 경합은 젠더 규범과 개인 혹은 여러 젠더 규범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그 외 수많은 범주(민족,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나이 등)에서도 일어난다. 이 많은 범주와 그 범주에 따른 규범들이 우리의 몸 위에서 서로 경합하고 타협하고 소통하며, 또 때로는 자아분열을 일으킨다. 그래서 최근의 연구자들은 몸을 ‘접경지대’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 몸 안에는 한국인도 있고, 한 부부의 딸도 있고, 20대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양성애자도 있다. 그러나 내가 월요일엔 한국인으로, 화요일에는 딸로, 수요일에는 20대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범주는 항상 내 몸 위에서 만난다. 어머니에게 예쁨 받고 싶은 딸로서의 정체성과 내 성적 지향에 대해 어머니에게 솔직히 말하며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싶은 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내 몸은 때때로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경직되고 움찔댄다. 지금 내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다가도 “여자 헤어스타일로는 너무 안 예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좀 그런가..?’ 하며 다시 거울을 보기도 한다. 그 순간 그 말을 듣는 것이 싫었는데도 이상하게 거울을 다시 보게 된다.

 논의를 더 적극적으로 확장시키자면, 여러 가지 범주와 그것들의 경합은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 8월의 어느 날, 우리 여성제 기획단은 여성제 준비 세미나를 하던 중, 각자의 가족에서 가장 얕은 잠을 자고 가장 조금 자는 이가 대부분 50대 여성인 자신의 어머니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너희 집도? 너희 집도?” 하며 조금 놀라워했다. 한국의 가부장제에서 “어머니”의 몸을 잠을 잘 설치는 몸으로 만드는 어떤 경향/힘이 있음에 조금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 “한국 어머니의 몸”은 결코 당연한 것도 원래 그런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다른 사람의 몸을 먼저 챙겨주기 위해 가장 늦게 밥을 먹고 가장 일찍 일어나는 몸으로 훈련되어버린 우리 엄마의 몸을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팔로 안을 때, 나는 때때로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가족 내 다른 구성원들을 돌보고 그들이 집 밖의 “사회”에서 하루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소위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을 가정 내에서 담당하는) 노동을 가정 내에서 거의 전담하는 사람으로서 30년 넘는 시간을 살아온 엄마의 몸 옆에 붙어있다 보면, 가부장제 구조 하에서 내 몸 역시 엄마의 몸을 뜯어먹으며 성장한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 때문에 내 표정은 어느새 울상이 되고 만다.

 몸을 경합의 장소로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순간 몸의 단면을 보는 것과도 같다. 그 수많은 ‘현재’의 단면들을 통시적으로 엮으면 그것은 곧 역사가 된다. 이런 점에서 몸은 역사적 기억을 담는 장소이기도 하며, 그 역사적 기억에는 식민지 역사, 가부장제의 역사, 특정한 경제 체제의 역사 등등 모든 역사가 포함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도 시간이 흐르면 (과거로서의) 역사가 될 것이다. ‘사회적인 것/공공적인 것’이 부재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핵심은 우리 삶을 꾸려가기 위한 거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운다는 것이다. 의료도, 노동도, 교육도,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주거도 모두모두 개인 즉 사적 영역(시장)이 알아서 해야 한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 받)는 신자유주의적 개인에게 남을 돌볼 만한 여유가 있을 리 없으므로, 점점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다는 위기의식도 커져가고 있다.4) 

 사회에 권력을 행사 해본 기억이 별로 없는 우리는 사회에 하지 못한 권력행사 욕구를 우리의 몸에게 풀며 우리 자신의 몸을 식민지화하고 있다. 동안, 식스팩, S라인을 비롯한 수많은 몸의 라인들, 겨드랑이에 남은 마법 같은 레이저 제모 시술의 흔적들, 매년 반복하는 다이어트 등등…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대로 기획‘당하느라’ 지친 몸은 그 자체로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기록된 텍스트이기도 하다. 후세의 역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기 몸에 “투자”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도 풀고 자신의 경제적 안정도 꾀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모든 시도들은 결국 그들의 몸을 갉아먹었노라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우리 몸에 새겨지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후폭풍이 우리 몸에 가장 직접적인 효과를 끼치는 이 모든 과정은 거의 대부분의 사회 현상이 그렇듯이 젠더화되어있다.5) 똑같이 ‘다이어트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래서 자기관리에 게으른 몸’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외모 관리가 ‘자기 관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체로 여성의 삶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행위 매개(agent)로서의 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몸이 단순히 여러 규범이 만나는 장소 혹은 그 경합의 결과물로서의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니다. 몸은 여러 규범 사이의 역학을 담아내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규범을 재생산하거나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agent)가 된다. 임옥희는 부르디외가 사회적 아비투스6) 개념을 차용하여 몸의 계급화를 설명한 것에 대해 논하며 “도시에 살면서 헬스, 웰빙, 요가 등을 통해 관리된 몸과 그렇지 않고 방치된 몸은 육체자본에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다고 지적한다.7) 경제적 계급은 몸을 통해 특정한 취향/아비투스(예컨대, 잘 관리된 늘씬한 ‘여성성 대표’ 몸 혹은 식스팩이 새겨진 ‘남성성 대표’ 몸/ 똑바르고 도도한 걸음걸이 등)로 이어지고 그 육체자본은 곧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얻어지는 사회자본을 축적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다시 경제자본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소위 잘생기고 예쁘고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의 경우 취업을 할 때 더 유리한 건 물론이고, “결혼 시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사회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해 있는 배우자를 만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경제자본→취향/아비투스를 담은 몸(육체자본)→사회자본&경제자본[어떤 경우에는, 경제자본→몸→사회자본→경제자본]”으로 이어지는 고리에서 몸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고리를 너무나도 잘 꿰뚫어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고리가 결코 무성적이지 않고 성별화되어 있어, 개인의 성별에 따라 그 고리에 대해 느끼는 무게가 다르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학벌이나 사회자본 등 또 다른 종류의 자본이 부족할수록, (얼마만큼의 돈이 있다면) 비교적 단기간에 획득 가능한 육체자본에 매달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 후 바로 취업하려고 생각 중인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성형수술은 더 이상 순수하게 “아름다워 지고 싶은 욕망”-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역시 얼마나 사회에 의해 큰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에서만 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육체자본으로서 몸이 어떻게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는지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평일 아침 10시경 TV를 틀면 종종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날씬한 몸으로 되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냉장고 정리도 깔끔하게 하고(!) 아이들에게도 최고의 것만을 선사하며 잘 키우고 있다는 여성 연예인들의 “사생활”8) 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대중매체는 임신과 출산과정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되찾고, 또 모성 이데올로기에도 부합해야 하는 여성성을 요구9)하는 사회시스템을 재생산하는 데 큰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그 재생산 메커니즘의 중요한 요소가 바로 몸(몸 이미지)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젊은) 여자답게’ 날씬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싶고, 그러면서도 아이를 편하게 안을 수 있는 아름다운 모성을 지닌 몸이 되고 싶은 그 마음은… 아니, 그 몸은… 다이어트 산업을 번창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암묵적으로 기존 사회의 규범적 메시지를 더 강화한다.

 반면, 소위 ‘전복적인 몸’이라고 하는 몸도 존재한다. 보통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난 몸으로 간주되는 퀴어의 몸(레즈비언의 몸, 트랜스젠더의 몸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여겨진다. 좀 더 구체적인 ‘전복적인 몸’ 이미지를 찾아보자면, 한 때 마돈나는 기존 젠더 규범을 뒤집는 전복적/혁명적인 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기존의 규범을 비웃으며 자유롭게 이성애적 판타지와 동성애적 판타지를 모두 무대 위에서 재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그녀가 아이를 낳고 육아에 좀 더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떤 이들은 결국 마돈나도 규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규범에 ‘포섭된 몸’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양성애적 판타지를 자유롭게 보여주며 팝의 디바로 활동하던 그녀가 육아에 전념한다고 해서 그녀의 몸이 이제 규범에 포섭되어 버렸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양성애 성향의 엄마, 성적 터부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몸을 보여주던 엄마 등등… 해석 나름이다. 사실 ‘규범을 전복하는 몸/규범에 순응하는 몸’의 이분법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지배적인 사회구조를 100% 완전히 재생산하는 몸도, 규범을 손바닥 뒤집듯이 완전히 전복하는 몸도 없다. 개별 몸들이 젠더·섹슈얼리티 규범과 경합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며, 그 다양성은 우리의 몸이 다른 사회적 범주(민족, 계급, 나이 등)와도 엮여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퀴어의 몸을 단순히 전복적인 몸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적일 수 있다. 규범의 재생산과 변화를 무 자르듯이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방향의 움직임이든 간에, 우리의 몸은 사회구조 안의 행위자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회구조에 영향을 끼치고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본다.

 예전에 난 내 몸이 온전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몸을 지배하려 드는 규범이 1개이고 또 눈에 잘 보이는 것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몸 말하겠어(=못 말하겠어)”를 외치며 답답한 가슴을 칠 필요 없이, 좀 더 단순하게 풀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현실적으로 각각의 규범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며 유동적이다. 그래서 규범/비규범의 경계는 대체로 안개 낀 수평선 같다. 게다가 이런 규범이 한두 개도 아니고… 많다. 말 그대로 많~다. 몸은 마치 국경마을처럼 다양한 관계가 얽혀있는 공간이다. (요즘은 굳이 지리적으로 국경이 아니더라도 모든 곳에 다양한 관계가 얽혀있고 어딜 가나 소위 ‘초국적(transnational)’ 관계가 없는 곳이 없다.) 언젠가 철학 교과서에서 읽었던 ‘우리의 몸이 곧 소우주’라는 말을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회적 맥락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경합의 장소인 접경지대로서의 몸과 사회 구조 재생산/변동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하는 몸. 몸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다시 고민해보며 내 몸을 본다. 당신의 몸도 본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것인가?

by 타라(T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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