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성별이분법적 지형에서의 몸 : ‘쿨’한 당신에게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남자는 이러저러해야해” “여자니까 이래야지” 이러한 성역할 규범에 대해 “요즘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라며 많은 사람들이 쿨하게 넘긴다. 이것이 세련된 제스쳐라고 많이들 여기는 듯하다. 이러한 젠더규범은 고정관념이고 편견이니, 이러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말이다.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 고정관념일 뿐이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면,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 또는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을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내면, 대부분 “몸! 몸이 자연적으로 다르지”라고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엄연히’ 신체조건이 다르므로 그러한 구분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과학에서 정의하는 그 ‘다르다’는 일차적 신체조건은 염색체와 성기모양이다. 이 염색체와 성기모양이 도대체 뭐길래, 이분법적 성별은 모든 생활에 있어 관계를 구축하는 데 필수 기반이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마주한 상대방의 성별을 알지 못할 때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황하게 된다. 마치 발바닥이 간지러운데 신발을 신고있어 긁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 같다. ‘여성다움’ ‘남성다움’이 규범일 뿐이고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모습을 할 수 있다는 그 ‘쿨-‘한 전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면, 왜 외향으로 어떤 사람의 성별을 알 수 없을 때 많이들 그렇게 당황해하고 궁금해 하는 것일까? 정말 성별을 알지 못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은 현대과학이 성별구분을 하는 일차적 신체조건인 염색체와 성기모양이 궁금한 것일까?

        단순히 몸에서 염색체나 성기모양 그 자체로서만 본다면 일상에서 큰 영향이나 의미가 있는 경우를 상상하긴 힘들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어느 신체부위, 위장이나 털, 손가락의 둘레, 너비, 무게 같은 수치로 일상생활이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혈소판의 수치로 사람들을 분류하여 각각의 다른 특성을 연구하고, 혈소판 수치를 기준으로 ‘어떤 의복을 입어야 하는지’나 ‘화장실을 따로 사용하게 하는지’같은 모든 행동양식들을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사회는 몸의 여러 부분 중에서 염색체나 성기모양을 근거로 사람을 모두 두 가지 절대적 분류체계 ‘여성의 몸/남성의 몸’으로 의미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한 몸을 사람들이 일상에서 계속 인식하게 하고, 매순간마다 포착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 것은 그 신체적 특성에 사회가 엄청난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색체나 성기가 남/여라는 구분에 있어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근거로 이야기되어진다. 이미 그러한 구분이 절대적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남/여의 구분틀에서 벗어나는 염색체나 성기는 ‘예외’나 치료되어야 할 ‘병리’로 이야기된다. 성염색체가 XX이기에 여성이고 XY이기에 남성이라는 명제가 자연스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성염색체가 X0, XXY, XXX인 경우는 두 가지 틀로만 사람의 몸을 설명하는 논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들의 염색체는 바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성별 틀에서 벗어난 몸을 인식하고 설명할 언어가 사회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도 남/여의 몸 중 어느 하나로 ‘치료’ 되라고 종용된다.(이러한 상황은 결국 남/여라는 성별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현실 조건을 반영하기도 한다) 결국 ‘남성의 몸/여성의 몸’ 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염색체로 성별이 구성되는)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틀을 유지하기 위해 몸 자체가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여성이라는 틀로 구분되지 않는 성기를 가진 사람들은 어릴 때 의사의 판단 하에 남/여 둘 중 한 성을 선택하여 그와 비슷하도록 수술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정소와 난소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클리토리스와 페니스 어느 쪽으로 구분짓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러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사들은 보통 남/여의 한 성별을 정해 한 성의 규범적인 몸의 모양에 맞게 수술을 한다. 이러한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성의 몸/여성의 몸’이라는 것이 염색체나 성기모양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분 틀이 먼저 구성되고 거기에 맞게 몸을 해석하거나 맞추고 있음을 반증한다. 구성된 성별이분법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로 몸의 형태나 특징들이 취사선택되거나 해석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단순히 호르몬, 염색체, 성기모양이라는 육체의 조건으로 성별이 나뉘는 것이라면, 유방이 발달한 남성의 몸, 자궁 적출 수술을 받은 여성의 몸 등을 접했을 때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궁이 있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매우 과학적이라는 구분에 따르면 이 여성은 여성이 아니게 되는가. 혹은 유방의 발달은 여성의 특성이므로 이 남성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성별이 과학적 사실에 관한 이름붙이기라면 이 경우 남성의 몸 여성의 몸 이라는 이름자체가 아이러니가 되어버린다. 아니 애초에 왜 남성의 몸인지 여성의 몸인지가 왜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 여성/남성이라는 구분이 단순히 염색체나 성기의 모양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러한 구분기준에 맞지 않는 몸까지 그 두 가지 성구분에 끼워 넣어 ‘병리’나 ‘장애’로 나마 설명하려하는 것은 왜일까. 결국 수많은 차이들 중에서 그 일부분에 주목하여 그러한 구분체계를 만들어내며, 그 구분에 맞춰 몸의 차이를 취사선택하는 그 의도와 정치를 고민해야하는 지점인 것이다.

        이분법적 성별구도가 몸 자체로 자연스럽게 정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가 성별구도를 더 뒷받침하기 위해 내놓는 것이 성별 간에 신체적으로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성차라는 지식이다. “남자는 ‘체질적으로’ 여자보다 근력이 더 강하게 되어있고, 더 몸집이 크다”고 말해진다. ‘강한근력’과 ‘큰 몸집’이 ‘남성’과 동의어가 아닌데도 이러한 성차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인 지표로서 사회에서 통용된다. 일례로 개인의 의지, 조건 등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자연히 무거운 짐은 남자가 들게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성차에 대한 지식이 기반이 되어 성별이 지표로 사용되는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에(혹은 기준을 두지 않을 수도) 성별이라는 지표가 왜 등장하는 것인지 한번쯤 의문스러워질 만하지 않은가. ‘남자니까’ ‘여자니까’ 라는 말만으로도 여러가지 다양한 상황에서 성별구분이 판단의 기준이 될 정도로 이미 ‘여성의 몸/남성의 몸’은 근력, 지각능력 등등 몸이 다르다는 세세한 규격 틀로 조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은 (여성과 다르게) 이러저러하다” 라든가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이러저러하다”라는 명제는 역의 형태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과 구분되는 남성의 특징이라는 것에 해당되는 몸을 모아보면 그것이 남성 집단과 일치하지 않음에도 이러한 성차라는 지식은 성별이분법을 유지하게 하는 지식체계이다. 본질적으로 사람의 몸을 나누는 기준이 정말 존재하는 가를 떠나, 이렇게 기존의 구분체계를 흔드는 몸들을 내쳐가면서 성별이분법체계를 유지시키려는 것은 소위 ‘객관적 과학지식’도 ‘본질적인 것’도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성역할 규범은 ‘쿨-’하게 고리타분하다고 말하더라도, 성별구분자체를 의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별구분 자체가 ‘본질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때, ‘쿨’하던 많은 사람들은 갖가지 젠더규범과 성역할들을 동원하여 그러한 성별이분법을 지키려한다. 예를들어 남성으로 스스로 정체화한 IS(Inter Sexual)인 사람의 몸을 알게 되었을 때, 사회는 그에게 그가 남성으로 ‘인정’될 만한 남성성의 증거를 가져오라고 요구하게 된다. 만약 그가 뜨개질을 좋아하고, 수줍으며 ‘여성적인’ 걸음걸이로 걷는다면 사회는 그의 남성성을 의심하고 심사(?)하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으로 정체화한 트랜스젠더가 소위 말하는 ‘남성적’ 젠더규범을 수행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젠더규범을 판단 잣대로 삼아 그가 잘못 ‘선택’했다고 쉽게 말한다. 트랜스젠더들이 국가에 성별변경을 신청할 때, 국가는 그들에게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성별 정체성의 근거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 가져오라는 근거들은 그 고리타분하고 편견일 뿐이라던 성역할 규범 그 자체이다.

        사람들이 ‘쿨-’하게 성역할 규범이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쿨-’하게 성역할 규범을 존재하게 하는 성별이분법에서 눈을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성별이분법이 도전받지 않는 거대한 성벽으로 남아있는 한, 그 쿨 한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다. 성별이분법도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의 성 역할 규범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별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주민번호, 호칭, 의복 등 온 사회를 망라하며,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성별을 구분하게 하는 기준이 그만큼 강력한 것이 아니라, 성별을 나눔으로써 만들어가는 사회적 기제가 공고한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여성의 몸/남성의 몸’구분이 강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고민해보고 그것에 물음표를 던져야 하는 시점이다.

 by 난 Cool한 거 싫어  율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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