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외모지상주의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외모지상주의의 경계와 잉여에 대해서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Intro

 우리 집 뒤 쪽에는 상가가 하나있다. 아파트 단지에 딸린 6층짜리 상가인데, 인접한 주택가와 소규모 아파트들과의 접근성이 좋아서, 꽤나 많은 점포들이 입주해있다. 그리고 그 상가의 5층에는 헬스장이 하나있다. 24시간 헬스장이. 그 헬스장은 정말 24시간 열려있다. 이른 아침 1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서 등교할 때도, 친구들과 밤늦게 놀고 난 후 새벽에 집으로 오는 길에도 그 헬스장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내가 헬스장을 볼 때마다 창가에 늘어선 러닝머신 위에는 그림자가 아른 거린다. 문득 욕실에 거울에 비친 내 뱃살이, 지하철에 붙어있는 성형외과 광고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방학동안 살을 빼기 위해 닭 가슴살과 고구마만을 먹겠다던 친구의 모습과 함께. 나는 이런 것들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을 하나 알고 있었다. ‘외모지상주의’ 라는 말을.

#1 외모지상주의의 경계

 루키즘 [lookism] (외모지상주의):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일컫는 용어.

 ‘외모지상주의’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다. 한 밤 중에 헬스클럽이 열려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고, 누군가가 특정한 음식을 먹는 이유이기도 하고 지하철 벽에 왜 그리 많은 성형외과들이 등장하는지를 알 수도 있고 사람들의 대화와 태도에 대해서도, 누군가의 취업실패도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는 누군가의 자살을 설명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현상들에 사람들은 ‘외모지상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게다 사람들의 외모지상주의 때문이다. 사람들이 얼굴로 몸매로 사람들을,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들은 사람들 볼 때 겉모습, 몸 밖에 볼 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다. 그러니까 외모지상주의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타파해 나가야 할 속물근성이다.’ 여기서 외모지상주의는 물질적인 것 – 육체 – 외면 – (속물적인) 욕망 – 부정적인 것과 연계되는 의미망을 만들어내고, 정신적인 것 – 정신 – 내면 – 고귀한 기준 – 긍정적인 것이라는 의미망에 대립한다.

 이 두 가지 의미망을 대립하는 설명은 사람들의 공감을 쉽게 얻는다. ‘예쁜 사람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외모지상주의라는 딱지가 붙자마자, 그것은 쉽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 비판은 정당성을 얻는다. 모두가 외모지상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습득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외모지상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전자의 의미망 대신에 후자의 의미망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살펴야한다. 아니, 살피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외모지상주의자’라는 딱지가 싫다면 말이다. 그러니 외모지상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편리한 담론이다. 그 말은 많은 것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고, 모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도 불편함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미처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도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보다는 적극적으로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은폐’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외모지상주의의 두 가지의 의미망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기에 그것을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으로 덮어야하는 그런 잉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자신의 아래로 포획하려하지만 그것의 틀 안으로 구겨 넣을 수 없는 잉여들과 마주칠 때,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은 자신의 경계선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잉여들과 부딪쳐 무너져가는 지점이다.

#2 외모지상주의 담론, 그 이분법의 역설 – 여성과 다이어트

 이제 다이어트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다이어트는 주로 ‘하다’라는 동사와 결합해서, 다이어트를 한 만한 이유와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하는 살을 빼는 행위를 칭하는 용어였다. 반면 현재의 다이어트는 주로 ‘해라’와 함께 등장하며 우리에게 체중감량을 강권한다. 사회적 인식이, 생산되는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건강한(=섹시한=젊은) 몸’을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그와 동시에 사회적 인정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가는 상황에서 개인은 다이어트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개인이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도덕적 비판까지도 가해진다.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다이어트는,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건강한(=섹시한=젊은) 육체를 가지지 못한 개인1)에게는 다이어트라는 의무가 일상적으로 지워진다. 다이어트가 일상적인 의무가 되면서 사회적 지위의 문제를 넘어서서 만인에게 부과되는 도덕적인 당위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이어트의 일상화는 외모로 개인을 평가하는 외모지상주의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그와 동시에 외모지상주의라는 담론이 붕괴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외모지상주의 담론은 개인이 외면에 연계되는 의미망보다 내면에 연계되는 의미망을 통해서 타인을 판단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다이어트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이런 외면/내면의 이분법적 잣대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 다이어트가 일상화되며 도덕적 의무로까지 발전한 사회에서는 이미 외면과 내면의 평가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내면은 몸무게라는 외면에 의해서 재단되고, 그에 의해서 부지런함/게으름, 탐욕스러움/탐욕스럽지 않음의 구분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구분에 기초해서 개인들의행동과 그의 동기(도덕성)가 구분된다. 예를 들어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여성의 소식은 남의 눈치를 봐서 그러는 것처럼 비춰지고, 많이 먹는다면 탐욕스러운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 사람의 상황,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 지점에서 외모지상주의 담론은 더 이상 다이어트를 자신의 이분법적 구도 아래로 포섭하지 못한 채 무너진다. 

 외모지상주의가 무너지는 지점은 여성의 경우 더욱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모두에게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다이어트가 강요되는 상황이지만, 그 다이어트의 의미는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다르다. 우선 여성에게 있어서 외모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사회적 지위, 성격, 학력, 전문화된 능력 등의 사회적 자원을 활용하여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한다. 지금과 같이 우리의 몸이 ‘보임을 당하는’ 것으로서, 외모가 하나의 경쟁력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외모도 그러한 사회적 자원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외모가 갖는 중요성과 의미가 여성과 남성에게 확연히 다르다. 남성에게 외모는 대체가능한 사회적 자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반면 여성에게 외모란 다른 사회적 자본을 모두 압도할 만큼 중요한 사회적 자원으로 여겨진다.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적인 외모와 거리가 먼 여성은 ‘독한 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뿐이며, 누군가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여성에 대한 정보를 물을 때면, 항상 ‘예뻐?’라는 소리가 가장 먼저 나온다. 즉, 이 사회에서 여성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바로 외모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에게 외모는 여성의 사회적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강요된다.

 또한 여성에게 있어서 외모는 개인의 자존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자존감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개인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가 어렵다. 개인의 자존감은 곧 타인이 인정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기준은 바로 외모에 있다. 따라서 여성의 외모가 사회적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여부는 여성의 자존감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다이어트를 성공한 여성들이 그들의 다이어트를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다는 하는 것은 이를 입증해준다.  따라서 이상적인 몸을 만들기 위한 다이어트는 여성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의 실현이 걸린 문제이자, 자신이 자존감과 관련된 문제이다.

 외모지상주의 담론은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다. ‘외모를 갈고 닦는 일은 무의미한 노력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랍니다. 다이어트와 같은 일은 자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한 무지한 일이예요. 그러니 우리 모두 내면을 갈고 닦읍시다.’ 하지만 여성 앞에서 이런 외모지상주의의 미소는 가식적이다. 그것의 충고가 공허하기 때문이다.2) 여성은 내면을 갈고 닦는 일, 즉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외면을 갈고 닦는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담론으로는 결코 포획할 수 없는 그 역설을 말이다.

Outro

 여성제 회의를 마치고 온 오늘도 그 헬스클럽에서는 형광등의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가를 따라서 가지런히 놓인 러닝머신은 마치 몸을 찍어내는 컨베이어벨트처럼 보였고, 그 위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러닝머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 헬스클럽은 내가 올해 초에 살도 빼고 식스펙을 만들기 위해 다니다가 몇 번 가지 않고 포기한 곳이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던 내 친구는 방학동안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오늘도 성형외과 광고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찾아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나에게 이것들은 외모지상주의로 설명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외모지상주의 경계를 감지한 나는,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이상적인 형태의 외모로 몸을 찍어내라고 강요하는 목소리가 있음을 감지한 나는, 여성 앞에 놓인 다이어트의 역설을 느낀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인가 단박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일이라도 벌여야만 하는 걸까?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해야하는 것일까?

 단지, 난 헬스클럽을 다니지 않고 그냥 운동이나 하나 배우기로 했다. 난 친구의 다이어트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난 성형외과 광고를 보고 사고(思考)를 하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내 뱃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줬다. 몸을 조금 더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보기로 했다. 어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조금씩 바꿔나가기로 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by ‘행복한’ 삶을 꿈꾸는 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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