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되는대로 타자치기 : 유동하는 섹슈얼리티, 유동하는 몸과 고통과 환희와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1.

커밍아웃할 때 나는 ‘레즈비언’ 정도로만 말했다. ‘이성애’ ‘여성’에 맞지 않음을 설명해야 했고, 짧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묻지 않고 궁금해 하지 않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해야 하는 지난함” 그 가운데 커밍아웃의 파장은 늘 생각보다 작았다.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레즈비언’에 덧대어진 식상한 편견만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내가 무릅쓰고 발화해야만 하는 상황, 최소한 상대에게 정직하다고 여겨지기 위해 내가 취해야만 하는 태도와 그 사이에서 휘발된 나의 진실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총여실은 침묵하는 자를 이성애자로 치환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를 유지하는 공간이다. 총여실 바깥으로 가면 나의 몸은 예외 없이 ‘이성애자’ ‘여성’으로 읽힌다. 내가 뭘 의도했든 전혀 엉뚱하게 하나의 몸으로만 읽힌다. 가끔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수업에 가면 “소개팅 하냐?”고 묻는다. 남성에게 욕망되어질 몸으로 읽힌다. 애인과 손잡고 있으면 새로운 남자친구인 줄 알거나 절친한 단짝인 줄 안다. 두 여자의 몸 사이에서 섹슈얼한 공기 따윌 읽어낼 리 없다. 이러한 경우 나는 유순히 ‘이성애자’ ‘여성’의 몸을 흉내 낸다. 헤테로 남성의 수작은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으며, 다소곳한 아가씨가 되는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나의 몸은 절대 노출하지 않는다. 고학번 남자선배에게는 공손히 웃어주거나 적절히 뿌리치고, 가랑이를 활짝 벌린다거나 겨드랑이 털을 훤히 드러내는 자세는 피한다. 총여실 바깥에서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나의 몸을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호모포비아 진창에서도 퀴어들이 버섯처럼 번식할 수 있었던 조금 웃긴 조건이다. 나 역시 혐오나 낙인을 도마뱀처럼 피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안부 인사를 나누고, 밤늦게까지 애인과 신촌을 쏘다녔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총여실에 있을 때와 총여실을 나설 때, 나의 몸은 무심한 눈으로 마크되지 않을 정도의 몸으로 순식간에 변한다. 총여실에서 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비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강의실에서 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비가시화되는 나의 몸과, 그때 노출되거나 혐오 받는 나의 소중한 부분은 무엇이며, 밀려오는 죄책감이나 무력감은 무엇이며, 저 사람의 몸이 대응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순식간에 판단한다. 나의 몸은 그 복잡한 과정을 오래 전부터 체화해왔다. 마스게임을 구경하면서 저기 쳐든 빨간 깃발이 흉내인지, 진정인지, 진정인 척하면서 조롱하거나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인지 읽어낼 수 있을 리 없다. 사지를 심하게 뒤틀지 않는 이상 나의 ‘레즈비언’ 몸은 아주 쉽게 사라진다.

그러므로 커밍아웃은 나의 몸을 보존하려는 필사의 저항과도 같다. 소멸해가는 몸을 말로써 교정하거나 붙잡아보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커밍아웃은 틀렸다. 나에게도 틀렸고 상대에게도 틀렸다.

내가 실패한 증거는 잘리워진 나의 몸들에 있다. 상대방의 몸과 자아를 일렬로 정렬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공포스러워하거나 무시할 뿐이다. 이성애자라면 정상적인 몸을 내놓아라, 레즈비언이라면 모자란 몸을 내놓아라, 만약 네 몸이 비정상적이지 않다면 그건 네 말이 틀렸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내가 발화하는 레즈비언이라는 비규범적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목도하는 나의 몸을 비규범적인 몸으로 분류하고 싶어 할 것을 안다. 레즈비언이라고 말을 할 때 주저하거나 혼란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유동하는 나의 몸을 전면에 내세울 정도로 나는 용기있거나 똑똑하지 못하다.

그래서 커밍아웃은 항상 부분적이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말하기엔 나는 자주 여자라고 여겨지는 몸을 부대껴한다는 것,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나는 자주 강렬하게 그 사람이 표출하는 낮은 목소리나 곡선이 없는 팔과 같이 남성다운 몸에 이끌린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가끔 공격적인 소년과 같은 몸짓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아주 남성적인 표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은 것은 헤테로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 아니다”고 말한다. 누군가 나를 욕망하길 바랄 때 팜므파탈이나 청순미인같은 이원화된 여성 몸 이미지 외의 것을 상상하거나 조형해내기 힘들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남성성으로 다른 여성의 남성성을 욕망하는 여성을 ftm 게이가 아니라 레즈비언 부치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레즈비언 여성이 가진 욕망의 형태가 헤테로 남성의 시각과 상당부분 겹쳐있을 때 그 여성의 욕망을 레즈비언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은 커밍아웃할 때엔  숨기고 본다. 분명히 존재했던 이성연애의 경험이나 그 시절의 관계를 통해 몸에 각인된 기쁨과 습관들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수가 없다. ‘이성애자’ ‘여성’으로 읽히는 나의 표피를 반증하기 위해 유용한 몸들 이외의 잉여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말-대화의 가능성을 위해 몸을 왜곡하거나 과장한다. 내가 왜 교정해야 하는가? 내가 왜 아무도 관심 없는 이 주장을 지켜내기 위해 발가벗고 달려들어야 하는가?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데? 내가 발가벗기 위해 뭘 더 착용하거나 벗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나조차도 각색 없이 나의 몸을 서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몸은 항상 나중이었고 이성애자 혹은 LGBTAIQ라는 섹슈얼리티가 먼저였다. 그러한 순차에 일치하지 않는 시절에 대해서는 커밍아웃을 할 때도, 혼잣말로라도 발설하지 않았다. 지난여름 현장 활동에 갔을 때 나는 공중목욕탕에 가지 않고 혼자 숙소에서 샤워를 했다. 단체로 여탕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고, 내 몸을 다른 여성에게 내보이기 싫었다. 지난겨울에는 친구와 목동에 있는 찜질방에 갔다. 여자와 연애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에 대해 얘기하면서 부끄러움이나 초조함 없이 오래 탕에 앉아있었다. 여름에 몸이 겪었던 부대낌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들의 공간에 출입할 때 레즈비언이 느끼는 이질감이라거나 벗은 여성의 몸이 즐비한 공간에서 레즈비언이 느끼는 수치심이나 성적자극 같은 것으로? 그렇다면 겨울에 겪었던 편안함에 대해서는? 갑자기 레즈비언이 아니게 되었다거나 사실은 여름부터 레즈비언이 아니었다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건 섹슈얼리티를 먼저 고정시키고 거기에 몸을 편입시키는 설명이다. 오히려 내가 확실하게 커밍아웃한 쪽은 목동의 친구였다. 게다가 나의 몸은 두 계절을 겪었고 부대낌과 편안함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내가 레즈비언이고 상대가 여자이면 무조건 벗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와 있는가, 누구에게 어떤 몸으로 보이고 싶은가에 따라 나의 벗은 몸은 굉장히 야한 장면이 되기도 했고 나란히 앉은 친숙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이전까지 그 사람이나 그 공간과 쌓아왔던 시간들, 그를 통해 만들어왔던 자아상이나 상대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이 내 몸에 각인되어 있었고 나는 그 몸의 감각을 따라서 옷을 벗거나 챙겨 입었다. 그러나 내가 레즈비언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채택해 왔던 것은 언제나 여름이었지 겨울은 아니었다.

총여실 안이건 밖이건 나의 다른 몸에 대해 어필할 때는 규범에 속하지 못하는 고통을 중심으로, 상대의 상상가능 영역에 편입될 수 있도록, 인지되고 신뢰감을 주고 이후 조금의 대화라도 이어갈 수 있으므로.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나조차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지 않도록, 내가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몸을 기억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항구에라도 정박하기 위해 손가락 한 두 개 쯤 떨어져나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성애가 아니다’ ‘여성이 아니다’ 늘 무엇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나는 한 발씩 번갈아 들어 올리면서 저 늪에 너무 깊게 빠져들지 않기만을 시도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규범이 실패한 증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발화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나라고 만날천날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여성이 ‘아닌’ 이성애자가 ‘아닌’ 몸으로 읽히고 싶어 안달을 낼 때도 있다. 게다가 나는 몸을 완벽히 통제 할 만큼 철저한 사람이 아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는 몸을 줄줄 흘리고 다닌다. 소녀시대 포스터 앞에서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유리가 섹시하다고 말해본다. 술자리에서 애인의 얼굴이 예뻐 보이면 손을 꽉 쥐어보기도 한다. 당장 안아버리고 싶다는 제스춰같은 것은 도저히 숨길 수 없다. 그래도 모른다. 모두는 모르는 것 같다. 말하고 나면 그제야 그럴 줄 알았다고 한다.  그들이 내 몸에 차고 넘치는 레즈비언을 읽어낼 줄 모르는 것은 그들이 아는 몸이란 이성애자 여성/이성애자 남성/나머지의 세 종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은 나는 이성애자 여성으로 패싱되기 때문이다.

발화하지 않으면 몸은 마크되지 않는다니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는 무엇보다 몸적인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럴법하다. 이성애자 여성/이성애자 남성에게 부여된 현란한 몸-이미지가 있고 아직도 80년대에 사는 듯 천편일률적인 퀴어의 몸-이미지가 있다. 그 둘 사이의 간극만큼 맹점은 확장된다. 목소리가 얇은 남자에게 비규범적 남성성을 부여하고 그건 곧 게이정체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머리가 짧은 여자에게 비규범적 여성성을 부여하고 그것 역시 레즈비언정체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가시거리는 고작해야 그 정도에 불과하다. 퀴어퍼레이드만 나가도 거기에 모인 게이나 레즈비언의 목소리와 머리스타일이 수 만 가지 넘게 샘플링 될 것이다. 몸의 굴곡을 최대한 삭제할 수 있는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뿔테안경을 꼈을 때 연희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곳에선 여성으로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성애 규범은 자신이 보고 싶은 몸만을 분절화하여 인지하고 나머지는 알아보지도 못한다.1)

남성/여성/나머지라는 세 가지 종류의 몸을 상정하고, 그 비좁은 참조체계를 정체성의 지표로 삼을 때 발생하는 수많은 오독의 가능성만 나열해도 종이가 모자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치마를 입지 않는다거나 남자들과 어울려 축구를 한다면 그녀는 손쉽게 레즈비언 부치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이성애자 부치와 레즈비언 부치가 치마에 대해서, 축구에 대해서 의미화하는 방식은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다. 혹은 비수술 ftm과 레즈비언 부치가 남성성을 대하는 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각각이 여성의 몸이나 남성의 몸과 연관지어지는 방식 역시 너무나 다를 것이다. 표피는 저게 치마인지 바지인지, 저 동작이 요가인지 축구인지만 겨우 구별할 줄 알지 다른 적확한 지표는 설정하지 못한다. 초라한 몇 개의 관용구만 주워들고 한 사람의 몸을 비규범적이라고 말하고 그러므로 저 사람의 정체성은 비규범적이라고 말한다. 헤테로 남성의 거들먹거리는 동작을 충실히 수행하는 마초 게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가면 자주 mtf로 통하는 얼굴의 ftm, 그 복잡다단한 몸과 섹슈얼리티의 사슬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만 구획하려 하는가? 수천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표피를 어떻게 수만가지로 의미화하는지, 오래되고도 내밀한 욕망들을 다시 그 표피로 어떻게 분출하고 있는지를 규범으로는 도저히 알아보지 못한다. 몸의 오독은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두 개로 분류할 수 없음에 대한 가장 확고한 증거다.

한편 나는 이러한 오독의 체계에 나의 몸을 한발씩 담궜다 뺐다 하며 놀기도 한다. 지배규범의 허술함은 상대가 나에게 어떤 섹슈얼리티를 부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내 몸의 (표피상으로는) 동일한 포인트가 순식간에 아름다운 것이 되거나 완전히 추악한 것으로 전락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눈이 작다. 이성애 여성으로 패싱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의 작은 눈은 운 좋으면 사나워보이고 그냥 보면 못생겼다. 쌍꺼풀 수술은 안하냐는 물음도 이때 자주 듣는다. 단발머리를 하고 치마를 입은 내가 스포츠머리에 바지를 입은 애인과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가면 ‘예쁜 부치’와 어울리는 ‘단아한 펨’이 될 수도 있다. 겨울에는 목뒤가 훤하게 머리를 자르고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LGBTAIQ 모임엘 갔다.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진행된 이 모임에서 나는 ‘정일우 닮았다’ ‘잘생겼다’는 말을 2연타로 들었다. 해석의 반전, 역전의 통쾌감! 작은 눈은 나를 못생긴 (이성애) 여성, 단아한 펨, 잘생긴 부치(혹은 전천, 게이, mtf나 ftm???)으로 만들었다. 나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나의 섹슈얼리티에 따라 각자는 나의 아름다움을 다르게 발굴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해석, 목소리나 표정과 말투, 섹슈얼리티는 시각이나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으로 인지되는 성적인 존재에 대한 미학, 인간의 몸에 대한 미학이 아닐까? 경합한다는 정체성의 목록들은 늘 나에 대해서 일부 감추거나 과장했다. 딸/누나/여자친구/여학생/레즈비언/양성애자/낮의 언어/라는 것이 한 사람의 낯선 미모에 대해서 절실하게 감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구조화된 서랍/들/가운데 하나/에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재빨리 정리하려 든다는 것에 대해 항상 막연하게나마 불만이었다. 이분법에 바탕을 둔 섹스-젠더 규범은 폐기될 필요가 있다.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고 전혀 아름답지 않다.

2.

다음은 한 사람과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성애 경험을 할 때와 동성애 경험을 할 때 나의 몸은 스스로에게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했다.2) 그것은 달의 앞면-뒷면처럼 엇비슷한 재질이나 균질한 구의 형태로 수렴될만한 다름이 아니었다. 굳이 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어드는 까닭은 나의 몸이 변화해온 여정, 상대의 몸과 파열해온 장면에 대해 보다 세세하게 묘사해두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관계 앞에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보다 직접적인 탐구자가 되어야만 했다. 한 사람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해야 했고, 그것은 과연 친구의 말대로 이제까지 읽었던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 방대한 양의 텍스트와 같았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왜 나는 이런 치마와 샌달을 꺼내어 입었는가, 내가 왜 저 사람을 이토록 바라는가 그리고 이렇게 바라는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답을 하고 싶었다. 어느 하나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고 특히나 그러한 변화가 왜 이성애 경험과 동성애 경험이라는 변화와 겹쳐서 밀려온 것인가라는 질문은 나에게 너무나 중요했다.

재미있는 풍경을 크로키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데이트할 때 예전보다 치마를 더 자주 입는다. 긴 치마는 초록색과 빨간색 꽃이 그려져 있고 짧은 치마는 발레리나같이 퍼져간다. 치마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거나 하이힐을 코디하거나 하여간 더 아가씨같이 입는다. 속옷을 레이스 버전으로 골라 보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남색이나 살색의 단색 속옷이 아니면 입지를 않았다. 여자 같은 치마나 여자 같은 속옷을 기피했던 중학교 무렵부터의 습관은 그것들이 연상시키는 여성성에 대한 기피에 가까웠다. 스포츠 브라를 입고가면 어김없이 당기고 놀리던 남자애들, 치마교복을 입고가던 하교길에서 가끔 마주치고 언제나 두려웠던 자위하는 아저씨들, 속옷입고 치마 입은 몸으로 부닥쳤던 다른 사람의 몸은 주로 남자 같았다. 너무 직접적으로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복식은 너무 직접적으로 남자애들이나 아저씨에게 노출되는 방식이라고 몸은 기억하고 있다. 성적인 느낌으로 여성의 몸을 보거나, 내가 그런 여성의 몸을 해보거나 그 양쪽 모두 부대끼긴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애인은 내가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하얀 블라우스를 입으면 참을 수 없이 예뻐진다고 말했다. 틀림없이 여성적인 면모로 해석되는 나의 몸을 애인이 다시 틀림없이 아름다운 포인트로 해석해왔을 때 나는 자주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우리의 관계는 명백한 이성연애였고 나도, 애인도 그 밖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지했다. 관계를 정의하기 쉬울수록 상대에 대해선 궁금할 것이 없어졌다. 여성의 여성성으로 남성의 남성성에게 어필한다, 혹은 남성의 남성적 시선에 의해 여성의 여성적 몸으로 욕망되길 바란다는 이성애주의의 서사는 우리에게 예측불허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남이 더 이상 불가사의한 사건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편입될 때, 사랑은 손쉽게 무력해진다. 그때 나는 다수에게 적중되거나 수능점수처럼 위계화될 수 있는 영역 중 한 칸에 온몸으로 소속되어진 느낌이었고, 그 중에서도 낮은 등급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못난 외모에 대한 열등감, 그럼에도 내가 여자의 몸이 되기를 자인한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다.

사실 변화한 것은 치마나 레이스 속옷의 착용 빈도가 아니라 그걸 착용하고 내가 거울 앞에 섰을 때, 애인 앞에 섰을 때, 밤이 되고 애인이 그것들을 부비고 만져줄 때의 감정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상대가 TV에 비치는 여배우의 표정이나 현대백화점 지하 화장품 광고판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약간 질투하며 기억해둔다. 이후 어떤 날에는 그 사람이 반응을 보였던 여러 사람의 여성을 나도 흉내내어본다. 다음 날에 일부를 벗어버리고 다른 일부를 착용해보기도 한다. 이것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느낌은 둘이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것 같이 은밀하고 유쾌하고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장난을 하는 느낌이다. 다가왔다 멀어지고 이어지는 놀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붙잡았다 싶으면 곧 둘의 위치가 뒤바뀌어 버리는 느낌, 결국은 누구도 완전히 술래나 도망자 중 하나로 역할할 수 없고 누구도 완전히 상대방을 멈추거나 붙잡을 수 없고 한 문장을 말하고 뒤돌아섰을 때 내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상대의 일면일 뿐 다시 등 뒤에서 뛰고 구르고 기어오고 있으며, 다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 상대는 틀림없이 예측할 수 없는 포즈로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같은 것들. 내가 예전보다 활발하게 여성의 몸을 재현하게 된 것은 오히려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수반해온 이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피할 수 없었던 혼돈과 변화를 애인의 해부학적 성별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성별은 언제든 유동하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이고 그 사실을 동성애 경험을 하는 와중에 알게 되었다는 변화였다. 펨로 보이는 내가 야한 속옷을 입었고, 부치로 보이는 애인이 레이스를 욕망했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기존의 가부장적인 이성연애 모델과 같다고 쉽게 말할지도 모른다. 야한 속옷을 입는 여성의 몸은 곧 남성적 시선에 복종한 몸으로 읽힐 수 있고 그녀의 몸을 욕망하는 여성은 남성적 시선을 내면화한 몸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옷을 들추어내며 이렇게 물어본다. 여성의 속옷은 남성만이 욕망할 수 있는가? 혹은 여성의 속옷을 욕망하는 특징은 언제나 남성성에 포함되는가? 여자 애인이 아주 공격적인 몸짓이나 표정으로 나를 대할 때의 남성성과 길거리의 술 취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다가올 때의 남성성과 귀여운 후배를 지키려는 오빠의 자세를 견지했던 반 선배의 남성성은 모두가 나의 여성성을 욕망했지만 모두는 나의 몸에 다른 반응을 야기했다. 어떤 남성성은 믿을 수 없는 환희였고, 어떤 남성성은 성폭력의 위협이었고, 어떤 남성성은 식상한 대상화의 반복이었다. 남성성이란 언제나 남성의 몸에서만 표출되는가? 혹은 남성성에 의해 욕망되면서도 여성의 몸이 위축되거나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몸의 표피나 일회적인 행동만으로는 몸과 몸의 충돌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몸의 움직임을 규범적인 몸/비규범적인 몸 중에 하나로 딱 떨어지게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은 오로지 그러한 몸을 정상적인 몸/비정상적인 몸, 혹은 흥분되는 몸/무성적인 몸으로 명명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호명해온 근거 없는 참조체계에서 기인한 것일 뿐, 몸 자체의 어떤 속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니다. 몸은 충분히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고, 우리는 몸을 규범과 참조체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유토피아에 위치시키지 않고도 충분히 몸에 전복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애자×비이성애자]*[남성×여성]이라는 매트릭스로부터 초월한 정체성을 가졌거나 가지길 원하지 않는다. 이곳의 상징체계나 인지체계를 갑자기 소거할 수도 없고 그 사이에서 형성되어온 나의 몸-역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오히려 나는 누구보다 예의를 갖추어 그러한 매트릭스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 생각이다. 몸에 대한 여러 가지 상징체계를 소환해서 착용하고 이리 저리 늘어뜨리고 가장자리를 짓무르게 만들어 본다. 조금씩 인지되지 않았거나 상상되지 않았던 조합을 만들어보고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가를 유심히 지켜본다.

[여성으로/펨으로/전천으로] × [키스를 한다/끌어 안는다/삽입 한다/받는다/옷을 입는다/달려 간다/운다/웃는다] …… 앞과 뒤의 항목을 정확히 열거할 수는 없다. 한 사람과 만날 때에도, 단 하루에도 괄호 안의 내용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질 않는다. [나의 정체]×[나의 행위] * [상대의 정체]×[상대의 행위]라는 매트릭스는 나를 죽은 듯이 누워있는 몸으로도 만들었고 뱀같이 요망스럽거나 으르렁대는 몸으로도 만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가슴도 만들었고 도려내고 싶은 유방을 만들었다. 몸은 탄탄해졌고 필요 이상으로 추악하거나 유약해졌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의 몸은 우연과 위험에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 몸들은 모두 나였고, 나는 그 때의 느낌에 관해서라면 한 치도 까먹지 않았다.

양극화된 봄-보여짐의 지점에 서서 서로 외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봄-보여짐보다 한 차원 높거나 낮은 뒤섞임의 상태, 여러 개의 눈과 여러 개의 귀와 극도로 예민한 십 수 개의 손가락이 덜덜 떨면서 서로의 몸을 탐구하고 침범하고 조형하는 상태…… 욕망의 위계화 없이, 표피에 식상한 섹슈얼리티를 덧바르는 구도가 없이 몸과 몸이 뒤섞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떠한 몸의 경험과 느낌도 잦아들지 않고 외려 왕왕대며 진폭을 넓혀나가는 만남은 어떤 것일까?

나의 몸이 표피상으로는 완벽하게 동일한 체위나 작년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하더라도 나와 상대의 유동하는 섹슈얼리티는 그것을 동일한 몸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한 사람과 똑같은 비좁은 방에 누워서 천 번의 밤을 보낸다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잊을 수 없는 감정이나 강렬한 사랑함-사랑받음의 기억들에 대해서는 몸이 매번 완전히 낯설은 형태로 기억하고 반응한다는 것. 나와 너의 섹슈얼리티가 유동하는 장소, 두 개의 몸이 그 장소에서 잘 때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예측불가의 영역임을 자인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해명의 최전선이다.

이제 나는 섹슈얼리티, 성별정체성, 몸을 입고 태어나 살아가는 나날들에 두려움없이 직면하기 위해 나의 가장 사소하고 귀중한 부분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 한 명의 구체적이고 예외적인 개인과 무관하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졌다. 남자, 여자, 레즈비언, 그동안 정답처럼 제출해왔던 문항들로는 그 사람을 알아볼 수가 없다. 나는 그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을 사무치게 안다. 곱아지던 등, 고여 베어 나온 물, 그림자가 번지고 줄줄 흐르는 먼지, 머리카락 같은 것들. 어두움에 익숙해지자 눈이 발견해낸 하얗던 이와 그때 넘치도록 기뻤던 것을 기억한다. 오래도록 경이로운 눈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고 미끈덩거리는 손목을 번번이 놓쳐보고 그래서……            나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완전히 낯선 몸이 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단 한 사람에게 익숙해지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명을 지르고 목이 쉴 때까지 울 것이다.

– 위치는 밝은 미래,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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