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범주의 재구성 -몸의 경험을 중심으로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나는 나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얼마 전, 친하지도 않은 누군가들이 나에게 짓궂게 ‘혹시 게이에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그간 적잖게 저런 식의 질문 아닌 질문들을 받아왔고, 그런 경험이 늘수록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요령있게 피하는 법을 익혀왔지만, 그 날은 전같지 않게 당황했다. 물론 저 질문은 ‘일반남성’같지 않은 나의 몸짓이나 말투를 보고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수근거림 끝에 마지막 확인절차로서 나의 대답, 혹은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저 질문을 받기 전부터 그이들의 수근거림을 눈치챘었고, 언젠간 물어올지도 모른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고, 어떤 표정과 말투로 대답하면 좋을지도 생각해놨었다. 게이냐는 추궁에는 익숙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크게 당황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날만큼은, 생각해놓은 대로 요령껏 피해가면서도, 내 마음 어딘가에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당혹스러움의 응어리가 떠올랐다.

  저 날로부터 반년 전쯤,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장소와 사람들과 질문의 맥락은 전혀 달랐다. 그 날에 난 성소수자운동단체 사람들과 있었고, 나를 당연히 이성애자남성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도 않았고, 나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 질문은 질문이었다. 나는 나의 성/별정체성을 그 사람들 앞에서 한번도 내 입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에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은 ‘남성’으로 보이는 나를 막연하게 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않을까 한다. 나도 그게 편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데 게이에요?’라는 질문은 정말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헤테로 섹슈얼리티가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장소에서 그 정상성의 권력으로 나의 ‘비정상성’을 스스로 까발리라고 공격하는 맥락에서 게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요령껏 잘 넘기려고 노력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런 맥락이 아니었던 질문은 섣불리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대답해야 했고(대답하고 싶었고) 대답을 하기 위해 나는 내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반 년동안 그 질문을 애써 묻어두고 살았다. 그러다 얼마 전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 기억과 질문이 떠올랐고, 그 질문이 불현듯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나의 성/별 정체성을 무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나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남성’과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세상에서 내가 돌아버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있다고 느끼는 건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견딜만한 일이지만, 그렇게 떨어져나와서 내가 어디쯤을 가고 있는지, 내가 뭔지 나조차도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을 때는 참 힘들더라. 그러니까 적어도 스스로는, ‘어떻게든’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더 이상 미루기에는 뭔가가 응어리져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걸어갔다.

  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더듬거리면서 걸어갔다. 지금 돌이켜보건데, 그 여정의 지표는 기존의 성/별범주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스물 두 살때쯤, 나는 내가 ‘남성’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런 남성으로서 나를 혐오하거나, 혹은 죄책감을 느꼈다. 어떤 날이면 나는 음경이 있는 내 몸을 저주했고, 그 몸으로 살아온 나를 혐오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일반 남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나의 경험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지금까지 수행해 왔던 ‘남성성’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더 이상 나를 ‘일반 남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그래서 내가 게이 혹은 바이인가 생각했다. 남성의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반 남성’과는 다르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당시에 그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LGBT 중에 내가 속할 수 있는 것은 G와 B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언어는 빈약했고, 나는 어떻게든 나를 설명해야 했고, 기댈 곳이라곤 기존의 범주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밖에 없었다. ‘헤테로 남성’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나를 명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게이 범주에 나는 속하지 못했다. 나는 ‘남성’으로서 ‘남성’을 좋아하는게 아닌 듯 했다. 그 때 쯤 나에게는 ‘남성’이라는 범주는 굉장히 불명확한 것이었다. 그럼 바이라고 하면 해결되는 걸까? 내가 좋아했던 몇몇은 ‘여성’이기도 했으니? 마찬가지로 ‘여성’이라는 범주 또한 굉장히 불명확했다. 무엇보다 나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는게 싫었고, 나를 남자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많이 괴로웠는데, 내가 바이라고 나를 정체화하는 순간, 내가 남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고, 계속 더듬거렸다. 남성으로서의 나에 대한 혐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동시에 계속 남성을 연기하는 나에 대한 혐오도 커져갈 때 즈음, 그럼 나를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정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남성으로 살아온 세월을 없앨 수 없었고, 감히 나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여러가지 억압과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 앞에서 수십년 간 남성으로 살아온 내가, 여전히 남성으로 대해지고 있는 내가 어떻게 감히 나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여자친구들에게 혼자 여행다녀왔다고 이야기한 후 ‘넌 남자니까 가능하지…나도 가고싶다’라는 한숨섞인 그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거울 앞에 서면 ‘남성의 몸’이 보였고, 나는 그 몸을 보면서 도저히 나를 ‘여성’이라고 정체화할 수 없었다. 음경이 있지만 남성으로 정체화하고 있지 않은 나는 뭔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비수술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기뻤고, 나를 위한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아도 트랜스젠더라고 정체화할 수 있구나. 하지만 나는 남자옷을 입고 다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대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서 생활을 영위해나간다. 그런 이상 나는 나를 비수술 트랜스젠더라고 정체화할 수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자신을 프리커밍아웃(pre-comingout) 비수술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는 걸 보았다. 단어를 보는 순간 나는 멍해졌고, 저 말이 갖는 뉘앙스가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나를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남자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남성의 몸’이 싫다. 공용샤워실은 고문이었다. 수술을 하진 않았다. 수술은 내 상상력 범주의 밖이기에, 수술을 하고 싶지도, 안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태어났을 때도 음경이 있는 몸으로 태어나는건 생각하기 싫다. 일어나면 ‘여자몸’이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들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많은 경우 남성으로서 살고 있다. 프리커밍아웃 비수술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나를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MTF라고 했을 때, M은 대체 뭐고 F는 대체 무엇인지.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범주, 그것보다 모호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난, 어떤 날이면 남성의 몸이 싫었지만, 또 어떤 날엔 감흥없이, 익숙하게 그 몸을 바라보기도 했다. 또한 내 몸에는 부정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남성’으로 살아온 20년의 역사가 쌓여있었다. 그 ‘남성의 몸’에 대한 익숙함과 ‘남성’을 수행하면서 형성해온 내 몸은 나를 MTF로 정체화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고, 그래서 더듬거리며 걸어갔다. 어느 단어로 나를 설명하려 할때마다, 계속해서 무언가 찜찜함이 남았다. 뭔가 맞으면서도 동시에 아닌 것 같다. 단어들이 저마다의 울타리를 치고는 내 앞에 있다. 어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나의 일부는 설명이 되었지만 일부는 묻혔고, 일부는 안정감을 얻었지만 일부는 나를 밖으로 떠밀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단어들에 집착할수록 울타리는 높아져 갔고, 그 경계는 명확해졌고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어갔다. 어딘가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수록 나는 점점 더 없어지고 더욱 높아진 울타리들만 남았다. 나는 어느 울타리로 들어가든 뭔가 어중간하게 걸친 듯했고, 그렇게 걸쳐져 있는 부위는 울타리에 찔려 피가 났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 몸은 왜 이따위로 생겨먹은걸까. 하고 생각했다.

몸의 속삭임

  내가 여정의 지표로 삼았던 것은 틀렸다. 그랬기에 내 여정은 기존의 범주와 명명들이 각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더욱 높은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그 사이에서 나의 몸은 분절되서 그 사이에서의 고통을 떠안는 것으로 끝났다. 나의 질문의 서사와 전제는 놀랄만큼 이분법적인 섹스-젠더체계의 그것과 비슷했다. “섹스-젠더 범주의 경계는 확고하다. 그러니 너는 너의 위치를 명확히 하고 그 범주의 규범에 너 자신을 맞춰라.” 하지만, 그 경계라는 것이 그렇게 명확한가?/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경계 안에는 모두 동일한 경험만이 존재하는가? 하나의 몸을 언제나 하나의 범주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 경계설정을 둘러싼 역학관계는 무엇인가? 나는 오히려 이러한 것들을 물어야 했고, 그 여정 속에 되려 등한시되었던 나의 몸경험을 여정의 지표로 삼아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내 몸은 점점 더 말라갔다. 먹고 싶은 걸 참는 게 아니라, 몸이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하루에 수십 번 체중계로 올라가서 무게를 달아보고, 조금이라도 숫자가 늘어있으면 내 몸은 더욱 먹기를 거부했고, 그러다보니 20kg가 넘는 수치가 줄었다. 어느 날, 그러한 나의 몸 경험이 나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은 음경이 있다. 동시에 나의 몸은 먹기를 거부한다. 내 몸이 먹기를 거부하는 건 여성으로서 아름다워지기 위해서였다. 음경이 있는 내 몸이 동시에 ‘아름다운 여성’이 되려고 하는 것은 모순일까. 이러한 몸경험을 단순히 생물학적 기관(음경)을 증거로 들이밀며 ‘남성의 몸’이 ‘잘못된 시도’를 하는 과정으로 독해하면 다 해결되는 것인가? 혹은, 의료기술을 통해 ‘남성의 몸’을 버리면 그 모순의 간극은 줄어들 것인가? 내 몸은 나에게, 하루빨리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선택해 거기에 내 몸을 맞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나의 몸은 오히려 이렇게 묻고 있었다. “성별정체성이 정말로 본질적이고, 그 범주의 경계는 명확한가?” 생물학적 기관(음경)을 기반으로 한 성별정체성(남성)이 본질적이며 여성/남성 범주의 경계가 명확하다면, 이러한 나의 몸경험은 존재해선 안 됐다.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몸경험은 오히려, 생물학적 몸의 차이에 따른 정체성 범주가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그 경계가 불명확함을 드러낸다. ‘남성의 증거인 음경이 있으니 나는 남성인가? 하지만/동시에 여성으로서 아름다워지고 싶으니 나는 여성인가?’ 라고 갈등하는 나를, 몸은 비웃는 듯했다. 마르는 것이 어째서 여성-되기로 의미화되니. 음경이 있는 몸이 어째서 ‘남성의 몸’으로 의미화되는거니. 음경이 있으면서도 몸이 두꺼운 여성, 음경이 없으면서도 몸이 얇은 남성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니? 남성은 뭐고 여성은 뭐니? 나는-그냥-그래.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이고, 남성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아니야.

  그래서 지금에야 생각하건데, 나는 조금 더 현명해야 했고, 조금 더 내 몸을 어루만져 주어야 했다. 스스로 설정한, 혹은 기존에 설정된 이성애-젠더 체계의 매트릭스를 둘러싼 범주들의 무게에 짓눌려, 거기에 맞춰 한 범주에만 속해야 한다고/속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나보다. 나는 유동하는 내 몸을 박제하려고 했고, 그랬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의 명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건 의미있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 명명에는 포섭되지 않는 몸을 남긴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나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폐기했어야 했다. 그러한 시도가 내게 남긴 것은 한 범주에 속하기 위해 잘라낸 몸들과, 그럼에도 잘려나가지 않아 느끼는 고통이었다. 나는 잘려져 덜렁거리는, 무어라 명명하는 동시에 묻혀졌던 몸을 외면하지 않아야 했다.

  내 몸은 시시각각 변한다. 주로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변한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있을 때는 비교적 충실하게 남성의 몸을 수행한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는 낮아지고 말투나 행동은 딱딱해진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나를 비트랜스이성애자남성인냥 인식하고, 그것은 편이를 준다. 그 때의 내 몸은 비트랜스남성이기도 하고, 혹은 드랙킹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식이 짜증날 때면 살짝 다른 몸을 수행하기도 한다. 몇몇 가까운 사람들과 있을 때 내 몸은 또 다르다. 목소리는 가늘어지고 말투나 행동도 하늘하늘해진다. 만약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았다면 같은 사람이라고 편하게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내 몸은 달라진다. 그 때의 내 몸은 트랜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애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 어느 이성애자여성 앞에서 내 몸은, 아슬아슬했던 것 같다. 남성의 몸이면서 동시에 (다른 매력은 없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착실한 이성연애는 하고싶지 않으므로 훗날을 생각하여) 트랜스여성의 몸이기도 하다. (효과는….많이 없는듯^^) 성애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남성 앞에선 또 달랐다. 내 몸은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몸도 아니고, 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인식되고 형성된다.

  한 순간의 내 몸도 한 가지 틀로 박제할 수 없다. 공중화장실을 가면 내 몸은 언제나 움츠러든다. 모두 부끄러움 없이 바치춤을 내릴 수 있다고 ‘정의’된 남성용 공중화장실은 내겐 고역이다. 내 몸은 역겨움과 부끄러움에 움츠러들어 조용히 문을 잠그고 좌변기를 이용하든가 남성이 나가길 기다린다. 미화직 여성노동자가 들어올 때면 내 몸은 또 다르게 움츠러든다. 이 때의 내 몸은 비수술레즈비언트랜스젠더의 범주와 게이(혹은 바이) 범주의 경계지대에 있는 몸이다.

  나는-그냥-그렇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 몸이 말해주고, 나는 조금 더 섬세히 내 몸의 결 사이를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것은 내 몸을 기존의 섹스-젠더-섹슈얼리티 범주에 기대어 내 몸을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할 것은 하나의 몸을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하는 것, 그를 위해 그 범주의 규범에 맞게 내 몸을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내 몸은 기존의 범주들 사이에 끼여 있는 어중간하고 이상한 몸이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할 것은 내 몸이 아니다. 오히려 폐기되어야 할 것은 내 몸을 조각내고 있던 범주의 인력들, 그리고 명확하다고 인식되는 그 경계들이다. 바로 내 몸이, 그 경계들의 취약함과 겹침과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나는, 조금 더 편하다. 높게만 보였던 울타리들은 힘을 잃어가며 허술해졌고, 그 사이에서 은폐되어 있던 틈새들이 보인다. 내 몸은 그러한 경계의 틈새 즈음에 혹은 경계지대에 머물러 있고, 그것이 이전만큼 고통스럽지 않고, 내 몸은 그 울타리들을 넘나든다.

by_흘러가고 흘러가는, 수어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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