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몸이 몸에 대해 말하다 : 뜯어맞춰지는 고통, 우울에 관하여.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1. 이제 그만, 소년을 위로해줘.

  하지만 내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아

그들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남자스러움말야

난 자꾸 그럴수록 마냥 불쾌한 듯 찡그리다가 나중엔 그냥 웃지

  … …

딱 봐서 약해 보이는 녀석들은 단숨에 물리치되

나보다 강한 녀석과는 나중에 적이 되지 않기 위해 한 수레 위에 올라타야만 해

단순해 보이는 여자들에겐 매너 좋은 오빠로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진짜 남자로서 똑바로 살아가는 방법이래

이를 따라가는 광경이 내 눈에 어지럽게 맺히고만 있는데

여자가 돈 쓰는 모습은 몹쓸 짓이라고 녹슨 지갑을 꺼내며 내 친구는 얘기해하지만

내 귀엔 짊어질 필요 없는 짐은 그만 내려놓으라고 말할 기회로 들릴 뿐인데…

  … …

무엇다워야 한다는 가르침에 난 또 놀라, 우린 아마 이렇게 멍들어 가는지도 몰라.

큰 혼란… 물론 나를 이토록 많은 함정 속에 빠트려가는 건 바로 나 자신인걸

습관적으로 모든 일들에 익숙한 척 가슴을 펴지만

그 속에서 곪은 상처는 아주 천천히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어

세상이 선물한 거울을 완전히 닮기 전에 내 그림자를 밟은 오늘을 이제는 기억해

손을 위로 드는 것 아니면 감았던 눈을 뜨는 것

가슴에 심장소리를 여전히 간직하는 당신에게 말해. 이제 당신안의 소년을 위로해줘1)

      사실 의외는 아니었다. 나에게 그는 늘 무리를 하는 것 같아 보였으므로. 소년은 남자가 되기 위해 분투했고, 지쳤고, 지긋지긋해졌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는 공허한 우울을 나에게 호소했다. 나는 얄팍한 위로의 손을 뻗었다. 얄팍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건, 내가 어리고 약하다는 핑계로 그의 무리를 외면해온 까닭이다. 어떤 언니들은 말했다. “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거야.” 어떤 오빠들은 말했다. “남자들 다 어디 가고 너희들이 이런 일을 해?” 그렇다. ‘이런 일’은 남자들의 것이었다. 나는 그와 그들의 희생-책임지고 힘든 일을 자처하는 것-을 원래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얼척없는 희생은 군 입대 문제에 와서 극에 달했다. 같이 떠들고 웃던 친구들, 운이 좋으면 빠져나갈 수도 있을 테지만, 대개 2년간 모든 인생계획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꾹, 꾹, 꾹 참고 견뎌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인정받는 남자다운 남성이 되기 위해서.

      정말 이 모든게 당연한 건가?

군대문화에 대한 개인적 혐오는 차치하고, 대체 왜 이 나라에서는 국방의 의무가 남자들에게만 부과되는지 나는 당췌 알 수가 없다. 자유롭게 누비고 살고자 할 때는 사사건건 제약을 주는 사회의 규범이 내게 국방의 의무만큼은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면제된 책임에 대해서는 금기인양 입다물고, 이등병 생활의 고통을 호소하는 친구의 이야기에서 ‘다움’의 도마를 본다. 도마 위 퍼질러진 밀가루 반죽을 본다. 예쁘게 정렬된 쿠키처럼 규격화된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서, 쿠키반죽위에 틀을 찍어 모양을 만들듯 사람 위에 차가운 철제 틀을 찍어 누른다. 그러나 잉여로서 깔끔히 떨어져나가는 틀 바깥의 밀가루반죽과는 달리, 이렇게 잘라내는 것은 살아있는 살이다. 살아있는 마음이다. 팔이 조금씩 잘리고, 발가락이 조금씩 잘리고, 쓸데없는 감수성이 잘려나가고, 사상이, 신념이 잘려나가고, 고통에 머릿속이 뒤틀어져 아파아파 피흘리는 친구들. 수많은 규범의 틀이 있으나, 군인을 양성해내는 공정에서 군대는 가장 적나라하게 ‘다움’의 틀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냉철해지기로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참상의 안전지대에 있는 것일까? 남성 바깥의 성별들은 이러한 규격화의 폭력에서 벗어나 있는 걸까? 나에게 정말 쿠키 모양을 찍어내는 틀은 강요되지 앉는가? 규범은 면제되는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확언할 수 있다. 소년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그에게서 자기연민을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성애 여성으로 여겨지는 나 또한 무엇이 되어야 했다. 나는 ‘그’와 동질적인 압력을 느꼈고 동질적인 우울에 시달렸다. 나는 어디까지는 확장될 수 있지만, 어디로는 침투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야 했다. 나 또한 도마 위의 반죽이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틀로써 나를 사람다운 사람, 여자다운 여자로 다듬고자 안달하고 있었다. 액면상 나는 이를 별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내 몸은 이질감을 상당히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팠다.

2. 얼굴 길들이기 ;

     우울과 고통.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 아픔들은 일방적으로 특정 규범을 강요당하고 그를 거부함으로써 벌어지는 순결한 투쟁과정 속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냥 희생하는 것 같아 보이던 ‘그 남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우울과 고통의 과정 속에서 규범에 대한 타협과 결탁, 그리고 규범을 따른 후 주어지는 보상이 있었다. 규범, 성별이분법은 남성과 여성 두 성으로 사람들을 구획했다. 이 틀에서 남자는 ‘위험하고 중대한 책임’을 지면서 보호하는 존재로 확장되었다. 반면에 여자는 비교적 안전하면서 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의무를 지는 ‘배려’를 받으면서 보호되는 존재로 축소되었다. 여기에는 가부장제가 다분히 스며있었다. 기실 가부장제는 적통의 승계를 전제하고 있는 제도이고, 정통성을 잇는 계보에서 군복무와 같이 특정 책임을 면제받는 존재인 ‘열등한 여성’은 조용히 제외되어왔다는 데 슬픈 진실이 있다. 역설적으로 남성 또한 가부장제의 온전한 승자는 못된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이분법의 구도에 의해 배정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딘가 결핍된 사람으로 치부되어 불이익을 받았다. 우리는 온몸으로 우리에게 책정된 ‘다움’을 표현해야 했고, ‘다움’에 걸맞지 않은 부분은 가차없이 제거하거나 최소한 외부로 보여지지 않게 해야 했다. 이런 ‘다움’의 검증 후에야,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의 권력 체제 안에서 유리한 위치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락 우리의 기존 체제 질서에 대한 종속에는 자발적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다. ‘순리대로’라면 우리도 머지않아 특정 권력 구조 안에서 ‘기성화’되어 기존 체제를 공고화하게 될 것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나 역시 약게 처신했다. 나는 이 사회에 막 귀속되었다는 점에서 이방인이었고, 잘 모른다는 점에서 약한 개체였다. 몸과 마음 양자를 매개로 하여 나는 규범을 ‘적당히’ 받아들였다. 내 자신의 ‘정상성’을 복장, 말투, 표정 등 온갖 표현수단을 통해 호소하면서 내가 ‘그들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했다. 나는 가면을 썼다. 나는 사람의 마음은 안개와 같다고 생각한다. 색색의 입자로 가득 찬 거대한 안개인 마음. 어떤 사람을 응대하느냐, 어떤 상황에 마주하느냐 따라 그 입자들은 마음의 표면으로 몰려와 내 표정을 형성한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있고, 친구의 흉을 보며 즐거워하는 얼굴도, 화가 나서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도 있다. 연출된 인위성도, 속에서 우러나온 진정성도 그 때 그 때의 얼굴을 형성하는데 모두 일정 정도 가미되어 있다. 나는 내가 속한 새로운 ‘사회’속에서 무난히 수용될 수 있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 표정을 온화하게 다듬었고 길들였다. 천편일률적인 일상 속에서 요구되는 얼굴은 뻔했고, 이는 하나의 가면이 되었다. 이에 대한 연장은 화장이고 옷차림이었다. 나는 내 겉모습을 길들였다. 난 내 몸을 길들였다. 나는 나를 조형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오랜 기간 나는 피학자인 동시에 학대자였으며, 자기분열의 지점에 서 있었다. 그럴 필요성은 충분히 있었다. 내가 있는 공간은 거대한 연애시장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해 열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은 만족스러운 교환에 성공하면 자랑스럽게 ‘솔드아웃Sold out’을 말했다. 자기 자신조차도 서슴없이 관리와 경영의 대상이 되었다. 가치를 매기는 서열화의 틀인 성별 이분법의 당위성을 거부하는 사람은 매력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보복을 받았다. 나의 비겁함은 여기에 있다. 말로 채 형체화되지 못한 반론을 꾸역꾸역 누르고, 그 틀에 타협하고,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득을(혹은 불이익 받지 않음을) 즐거워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들의 틀에 맞춰 적당히 발췌해 나를 보았고, 나는 그들의 잘못된 독해를 방조했다. 나는 규범을 체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매력이 없는, 이성애적 연애대상으로서는 매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때 의 울컥함이 싫었다. 나만 낙오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3. 그러나, 가면 속의 우울.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견딜 수 없어졌고,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파야 할 구석이 없는데 왜 아픈지, 왜 우울로 시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마치 구토 직전의 몸 같았다. 막상 뭔가 가득 쏟아내고 나면 시원해질 것이지만, 그러지 못해 괴로웠다. 

ㅡ정신의 구토감과 몸의 구토감은 뒤섞여있었다. 긴장이 팽팽히 신경을 잡아당기고, 압력이 정수리로 쏟아질수록 나는 내 몸을 안고 아파 낑낑댔다. 정신이 몸의 연장인지, 몸이 정신의 연장인지, 애초에 둘의 인위적 구분이 무의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거대한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가 저급한 것이 거북했다. 당최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친구들이 그 목소리에 순응하면서 스스로에게 칼질을 하는 모습은 소름이 끼쳤다. 어지러웠다. 외면해도 우울해지고, 끌어안기에도 우울해지는 규범이었다.

    친구가 말해주었다. “다이어트 해야돼! 뭐 좀 그랬을 때 아 내가 너무 못생겨서 그런걸까? 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살빼고 싶다. 어제 충격적인 것도 봤어… 내가 보기에 100kg 확실히 넘는 여자가 지하철을 타고 있었어. 그여자 / 어떤여자 / 남자 / 나 이런 순서로 타고 있었어. 여자-남자는 커플인 듯 싶었고. 여자가 (100kg 넘어보이는) 여자 때문에 자리가 좁아서 자꾸 짜증을 내는 거야. 아우씨 이러면서. 나중에 그 커플 여자가 100kg 넘는 여자분을 노려보면서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남친이랑 노려보고 자리를 떠났어. 난 너무 슬펐어. 그 언니는 얼마나 슬펐을까. 나는 그래서 지하철에서 울뻔했어. 그 언니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그 여잔 뚱뚱한 사람은 1인석을 넘어가니깐 지하철 같은건 타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니한테 욕했어. 그냥 화가 나도 그런 거 겉으로 굳이 내비쳐야 했나…나는 어제 하루종일 슬펐어요. 나 고3때는 지금보다 훨씬 살이 쪄 있었어. 그래서 지하철에서 앉기가 싫었어. 거울에 비치는데 몸이 너무 커서, 그게 너무 싫어서 자리에 앉지 않고 갔었는데, 그게 막 떠올랐고 너무 슬펐어요. 내가 살이 안 빠지고 고3때 모습이라면 옆에 있는 여자가 그 언니한테처럼 나한테도 욕했을 것 같아.” 나도 울고 싶어졌다. 4년째 친구는 정상성의 기준에 억눌려 몸을 줄이고자 노력해왔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게 삶의 목표였고, 언제나 무난하고 평범한 선택을 해왔다. 사회의 규범에 비추어 자신이 비정상적 존재로 여겨지자 견딜 수 없이 매일매일 괴로워했고, 한 때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했다. 

     또 다른 친구가 말해주었다. “내 남자친구는 때로 내 아빠같아.” 왜 하필 아빠일까. 스물 남짓한 청년에게 아빠같다니, 넌센스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여리여리하게 예쁘고 말랐다. 서울대에 너끈히 합격할 정도로 공부도 무척 잘해서 주변의 많은 아이들이 그 애를 부러워했다. 나는 내심 내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몇 년 뒤, 그 잘난 친구를 그녀의 애인이 휘어잡고 조목조목 일상에 간섭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스러웠다. 같이 다니면서 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높은 하이힐과 스키니진 사이로 보이는 그 애의 가는 발목을 걱정하곤 했다. 저러다 실수로 넘어지면 저 하얗고 가는 발목은 힘없이 툭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저 연약해 보이는 몸을 저 애의 남자친구는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한걸까. 일상에 속속들이 스며들면서 내 친구를 그의 방식으로 빈틈없이 사랑해주고 있는 걸까. 간섭, 참견, 통제… …. 내 친구 또한 그를 사랑하기에 애인이 아버지의 행세를 하는 이질감 정도야 로맨틱한 연애구도로 치환시켜 끌어안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친구가 다시 한번 말했다. “가끔은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어. 그렇지만 사,랑,하는 데… 우리 관계에 문제가 있는걸까?” 나는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어. 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

   내가 사랑하는 두 몸이 있었다. 통통하고 곰돌이 인형같은 몸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바싹 마른 몸. 생에서 여러 번 상처가 두 몸을 관통했고, 둘 다 일정 정도의 우울을 품고 살고 있었고, 각자의 얼굴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 또한 약한 개체였다. 규범의 목소리가 그들의 행동, 복장, 말투, 표정을 통제했고 그들은 반쯤은 자의로 그 틀을 받아들였다. 바꾸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고, 그래서 적응은 필연적으로 순응적이었다.

식상한 어투로 말을 건다. 대상은 분명치 않다. “이런 거 너답지 않아! 그만둬!”

아마도 이렇게 받아치겠지. “나다운 게 뭔데?”

나는 뭐라 대답해야하는 걸까.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의 양식은,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사실, 내가 져야 할 짐을 떠넘기고 싶지 않다. 소년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외풍을 직접 맞는 게 두려워 남을 내 앞에 세우고 싶진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라는 니체의 거창한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나지만, 서투르지만 날것의 목소리를 내어 나의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내 안의 균열을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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