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내가 몸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출처: 연세대학교 제 22대 총여학생회 <speak-out>이 주최한
            2010 제 12회 여성제 <몸이 없어졌다> 자료집에서

1. 직시

내 몸을 샅샅이 쳐다본 적이 언제였던가. 내 몸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어떤 이미지를 재현하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몸을 연기하지 않은 채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몸을 직시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내 몸을 똑바로 바라볼 때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쾌한 기분이 든다. 내 몸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내 몸은 항상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그 순간. 그 순간이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2. 알몸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벗은 몸을 바라본다. 나는 불쾌하다. 노란 피부, 처진 유방, 둥근 배, 두꺼운 허벅지. 저 몸은 내가 어젯밤 꿈속에서 그리던 나의 몸과 다르다. 나는 저런 몸을 가진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더 날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가진 매끈하고 하얀 피부의 젊은 여성이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불쾌한 사실은, 거울 속의 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내 의지에 100% 맞추어 움직일 수 없는 뻣뻣한 관절, 내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지방을 품고 있는 배와 허벅지, 내 희망보다 누렇고 우둘투둘한 피부 혹은 거죽. 내가 연기하는 육체에 비해 나의 몸은 보잘 것 없다. 나의 시선으로부터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나는 성급히 옷을 입는다. 옷 속으로 몸이 숨겨지자 나는 왠지 모를 안도의 기분이 든다.

3. 배탈

변기 위에 앉은 채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아랫배의 통증이 나를 괴롭힌다. 배탈이 났다. 4시간 전에 무엇을 먹었는지 짐작해본다. 아까 먹었던 우유가 상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마신 우유가 식도와 위장을 지나 소장과 대장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변기 안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겠지. 나는 무언가를 삼키고 무언가를 배설해내는 몸을 가졌다. 한 겹 피부 아래에서는 붉고 축축한 내장이 내 몸 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 나는 물을 내리고 화장실에서 도망쳐 나온다.

4. 월경

월경혈이 내 몸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헝겊으로 만든 월경대를 흠뻑 적신다. 월경혈을 잔뜩 집어삼켜 축축해진 월경대를 찬물에 집어넣는다. 시뻘건 피가 확 퍼져나간다. 피비린내가 난다. 이상하다. 때로는 신기하다. 내 몸에서 피가 나온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이상하다. 다리 사이에서 주르륵 흐르는 월경혈에서 느껴지는 온도와 감촉은 정말이지 기묘하다.

5. 뱃살

뱃살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내가 맛있게 먹었던 음식, 친구들과 마신 술, 침대 위에 늘어져서 책을 읽던 시간, 소파에 누워 좋아하던 쇼프로를 보면서 깔깔대던 시간. 그러한 과거의 경험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다. 그 경험이 나의 배에 붙어있는 살이 되었다. 내 배에 붙어있는 지방을 내 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지방에 달라붙어있는, 그래도 제법 행복했던 수많은 경험들이 내 경험이 아니라고 모두 부정해버렸다. 잊어야 하는, 지워야 하는 기억으로 몰아붙였다. 뱃살이 내 몸에서 없애버려야 할 이물질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 모든 기억은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수치스러운 과거가 되어버렸다.

6. 만져본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몸을 바라본다. 몸에서 오는 낯설음을 바라본다. 내 몸인데 왜 낯선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홀랑 벗은 채, 멋대로 굴러다니는 내 몸을 바라본다. 방금 먹은 음식을 열심히 소화하고 있는 위장의 움직임을 느껴보려고 한다. 월경혈이 월경대를 흠뻑 적시는 것을 지켜본다. 말랑말랑해진 뱃살을 만지작거려본다. 슬며시 불쾌해지지만 그래도 계속 해본다. 나쁘지 않다고 억지로 말해본다. 언젠가는 내 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지?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그래도 불쾌하다. 어떡하지?

하늘에서 몸들이 비처럼 내려와_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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