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조 하면서 내가 느끼고 고민하는 것들을 적고 싶었다. 근데 쉽지 않더라. 몇 번인가 쓰려다 관두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간에 너무 쉽게 장애인 개인을 탓하는 식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밖에 읽히지 않는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다 보니까, 모든 장애인 이용자가 다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내 불만이 정당할 수 있다. 근데 확실히 그것만은 아니다. 이 사회가, 그리고 내가 가진 비장애인 중심적인 생각들이 계속해서 모든 탓을 장애인 개인에게 미루려 한다. 그게 느껴진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 공연 <거북이라디오2>를 봤다. (다른 감동들은 제쳐두고) 첫 번째 이야기가 활동보조이다. 주인공은 활동보조가 개인적인 일처리로 원서접수를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자, ‘근무시간’ 자기일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혹시나 이런 말로 기분 나빠할지, 그래서 그만둘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서로 익숙해졌는데 새로운 사람에게 또다시 몸을 보이고 화장실 도움을 받는 일은 원치 않는다. 그래서 어렵게 마련한 술자리. 하지만 활동보조 ‘언니’가 먼저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까다로운 이용자들, 하인처럼 부려먹고, 이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며…… 결국 주인공은 아무말도 못 하고 다음날을 기약하며 관객들의 파이팅으로 끝난다.
자립할 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활동보조이다. 근데 자립이 뭘까? 인간답게 사는 게 뭘까? 그것에 대한 답이 비어있다. 돈, 집, 직장, 친구 이런게 있으면 자립한 걸까? 얼마나 있으면 인간다운 걸까?
중증장애인이 어떤 일에서든 간에 선택권을 가지기 힘든 사회이기에 그런 기회가 중요하다고 배웠다. 실패도 직접 경험해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왠만하면 시키는 대로만 한다. ‘도움이 되는 조언’같은 것도 잘 안한다.(한가지 참지 못한 것이 있으니, 손에 비누칠 할 때 계속해서 물을 틀어놓는 거다.)
밥 먹을 때 안 흘리는 건 쉽지 않다. 밥 먹고 나면 바지에 밥풀이 몇 개 떨어져 있는데,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나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엄마’의 마음을 가진 다른 활동보조나 여인들은 크게 신경쓴다. 나보고 그것 좀 띄어주라고 하거나 직접 띄어준다. 그럴 때마나 ‘내가 너무 무심했나? 내 옷에 붙은 밥풀은 잘 떼어내면서 이용자는 왜 안 챙기지? ‘엄마’처럼 구는 게 아니라면 내가 이용자에게 옷을 깨끗이 하는 ‘예의’를 인식시켜야 하나? 그건 누굴 위한 ‘예의’지? 옷에 묻은 밥풀로 무시당하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도록 돕는다.”도 그리 선명한 지침은 아니다. 바지를 잠그고 자크를 올리는 일, 시간이 걸리지만 스스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없는 날은 나보고 해달라 한다. 그게 비장애인이 하는 것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걸 “혼자 할 수 있잖아요.”라며 거절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자기가 할 수 있어도 편하니까, 시키면 할 사람이 있어서 시키는 것들도 있다. 활동보조를 이용하는 시간 내에 뽕을 뽑아야겠다는 사장의 마음가짐을 가진 이용자들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기일이 아니면 무심하기 쉽다. 이용자가 일하다 허리가 삐끗한 활동보조를 배려해주어야 할까? 갈아치우는게 당연한가? 하루 종일 걸어도 힘들지 않아야만 활동보조 할 자격이 있나?
이용자의 집에서 지하철로 가는데 가끔씩 뺑뺑 돌아서 간다. 걷는게 귀찮은 나는 속으로 불만이 생긴다. ‘이용자는 전동휠체어를 타니까 내가 힘든 건 모르지.’ 하지만 계속 집에만 있던 이용자는 산책하고 싶은 거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몸이 힘든 날은 속으로 ‘친구였으면 한마디 할 텐데’ 이런다. 친구가 아니니까 참는다. 그래서 활동보조가 필요한 것 같다. 장애인의 활동을 돕는 것이 ‘온정의 손길’이나 ‘배려’일 수밖에 없는 지금 사회에서 친구라 하더라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평등하기 힘들다. 장애인은 적어도 속으로라도 도와주는 이에게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돈으로 장애인에게 힘을 보태는 것 또한 필요한 거 같다. 아무래도 돈이 가장 막강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 하지만 또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 생각하면 망가지기 마련이다.
한번은 커피를 타서 줬더니, 저기로 가져오라는 거다. 친구들이 있는데서 먹고 싶은 거다. 그게 반말이어서 그랬는지(반말은 항상 하는데), 갑자기 커피 심부름 시키는 마초 이미지가 떠올라서 였는지 기분이 나빴다. 자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데, “나이도 먹었는데, 돈도 벌고 결혼도 해야지.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해”라는 말이 조금 불편하다. 괜시리 나한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활동보조인 권리찾기 모임에 나갔다. 장애인활동보조지원법이 시행되면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들을 들으면서 신기했다. 문구 하나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 장애인활동보조지원법에 이용자가 방문목욕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명시함으로써 대학교 목욕봉사동아리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지, 아니 현실을 무시하면서 만드는지도 눈에 훤히 보였다. 위에서 말한 방문목욕서비스 같은 경우도 이용자들이 활동보조시간(에 해당하는 돈)을 2배이상 써야만 하기에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활동보조 시간이 부족한 이들이 밥먹고 신변처리해야 하는데 써야할 활동보조시간을 목욕하는데 쓰겠냐는 거다. “펜대만 굴리는 인간들”이란 표현이 참 와닿았다.
게다가 정부(보건복지부), 중개기관, 활동보조인, 장애인이용자 모두 위치가 다르고 여기서 부딪히고 저기서 만나고 얽히고설킨 관계가 보여서 재밌었다. 정부는 장애인의 요구들을 중개기관으로 미루려고 한다. 직접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싸게 먹히고 책임질게 없으니까. 중개기관은 정부로부터 돈을 따와야 하니까 정부눈치를 보고 활동보조인에게 될 수 있는 한 적게주고 많은 걸 요구한다. 활동보조라는 일자리가 불안정할수록 서비스 질은 낮아질 거고, 결국 장애인 이용자가 그걸 감당해야 한다. 활동보조인의 안정된 고용을 요구하는 것은 이 악순환을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이 글 앞부분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너무 이용자와 활동보조인 개인들 간의 윤리적인 관계문제로 풀어낸 감이 있는데, 이같은 것들도 구조적인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다. 허리를 삐끗한 활동보조인의 경우도 그것이 산재보험 처리가 되고, 다른 활동보조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의 안정적인 구조가 마련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이용자에게 참으라고, 활동보조인에게 참으라고 하는게 해결인가?
근데 이걸 적극적으로 할 당사자는 역시 활동보조인밖에 없는 것 같다.
활동보조인은 중년 고령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이용자와 같은 성별로 활동보조를 맞춰주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남성들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러지도 못한다. 특히나 ‘젊은 남성’이 너무 없단다. 여성의 것이라 여겨지는 돌봄노동이기도 하지만 불안정하고 돈이 얼마 안 되니까. 근데 왜 이런 열악하다는 노동에 중년 고령의 여성들이 모이냐는 거다. 그만큼 그녀들이 제대로 대우받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도 활동보조 권리찾기 모임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돌봄노동자 집회에 갔었다. 여성들이 하는 평가절하 된 돌봄노동에 정당한 대가와, 얼마 안되는 남성 가장들을 위한 현실적인 임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성 결혼하고 애낳고 산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성 가장이기에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러니까 여성은 적게 줘도 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전제를 이성애 정상가족으로 두고 주장하고 설득할 때 내가 설 자리는 없어지는 것 같다. 일을 하면서 화장실에 갈일도 많고 이용자의 개인적인 삶에 많이 들어가다 보니까, 지금처럼 성별이분법이 강력한 사회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이 일을 하기는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 일 뿐이겠냐마는)
아, 뭔가 고민거리는 많고 풀어낼 능력은 안 되고, 막 쓰고 싶진 않고, 이 조악한 언어를 보아라.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활동보조2
활동보조 하면서 내가 느끼고 고민하는 것들을 적고 싶었다. 근데 쉽지 않더라. 몇 번인가 쓰려다 관두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간에 너무 쉽게 장애인 개인을 탓하는 식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밖에 읽히지 않는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다 보니까, 모든 장애인 이용자가 다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내 불만이 정당할 수 있다. 근데 확실히 그것만은 아니다. 이 사회가, 그리고 내가 가진 비장애인 중심적인 생각들이 계속해서 모든 탓을 장애인 개인에게 미루려 한다. 그게 느껴진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 공연 <거북이라디오2>를 봤다. (다른 감동들은 제쳐두고) 첫 번째 이야기가 활동보조이다. 주인공은 활동보조가 개인적인 일처리로 원서접수를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자, ‘근무시간’ 자기일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혹시나 이런 말로 기분 나빠할지, 그래서 그만둘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서로 익숙해졌는데 새로운 사람에게 또다시 몸을 보이고 화장실 도움을 받는 일은 원치 않는다. 그래서 어렵게 마련한 술자리. 하지만 활동보조 ‘언니’가 먼저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까다로운 이용자들, 하인처럼 부려먹고, 이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며…… 결국 주인공은 아무말도 못 하고 다음날을 기약하며 관객들의 파이팅으로 끝난다.
자립할 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활동보조이다. 근데 자립이 뭘까? 인간답게 사는 게 뭘까? 그것에 대한 답이 비어있다. 돈, 집, 직장, 친구 이런게 있으면 자립한 걸까? 얼마나 있으면 인간다운 걸까?
중증장애인이 어떤 일에서든 간에 선택권을 가지기 힘든 사회이기에 그런 기회가 중요하다고 배웠다. 실패도 직접 경험해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왠만하면 시키는 대로만 한다. ‘도움이 되는 조언’같은 것도 잘 안한다.(한가지 참지 못한 것이 있으니, 손에 비누칠 할 때 계속해서 물을 틀어놓는 거다.)
밥 먹을 때 안 흘리는 건 쉽지 않다. 밥 먹고 나면 바지에 밥풀이 몇 개 떨어져 있는데,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나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엄마’의 마음을 가진 다른 활동보조나 여인들은 크게 신경쓴다. 나보고 그것 좀 띄어주라고 하거나 직접 띄어준다. 그럴 때마나 ‘내가 너무 무심했나? 내 옷에 붙은 밥풀은 잘 떼어내면서 이용자는 왜 안 챙기지? ‘엄마’처럼 구는 게 아니라면 내가 이용자에게 옷을 깨끗이 하는 ‘예의’를 인식시켜야 하나? 그건 누굴 위한 ‘예의’지? 옷에 묻은 밥풀로 무시당하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도록 돕는다.”도 그리 선명한 지침은 아니다. 바지를 잠그고 자크를 올리는 일, 시간이 걸리지만 스스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없는 날은 나보고 해달라 한다. 그게 비장애인이 하는 것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걸 “혼자 할 수 있잖아요.”라며 거절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자기가 할 수 있어도 편하니까, 시키면 할 사람이 있어서 시키는 것들도 있다. 활동보조를 이용하는 시간 내에 뽕을 뽑아야겠다는 사장의 마음가짐을 가진 이용자들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기일이 아니면 무심하기 쉽다. 이용자가 일하다 허리가 삐끗한 활동보조를 배려해주어야 할까? 갈아치우는게 당연한가? 하루 종일 걸어도 힘들지 않아야만 활동보조 할 자격이 있나?
이용자의 집에서 지하철로 가는데 가끔씩 뺑뺑 돌아서 간다. 걷는게 귀찮은 나는 속으로 불만이 생긴다. ‘이용자는 전동휠체어를 타니까 내가 힘든 건 모르지.’ 하지만 계속 집에만 있던 이용자는 산책하고 싶은 거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몸이 힘든 날은 속으로 ‘친구였으면 한마디 할 텐데’ 이런다. 친구가 아니니까 참는다. 그래서 활동보조가 필요한 것 같다. 장애인의 활동을 돕는 것이 ‘온정의 손길’이나 ‘배려’일 수밖에 없는 지금 사회에서 친구라 하더라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평등하기 힘들다. 장애인은 적어도 속으로라도 도와주는 이에게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돈으로 장애인에게 힘을 보태는 것 또한 필요한 거 같다. 아무래도 돈이 가장 막강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 하지만 또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 생각하면 망가지기 마련이다.
한번은 커피를 타서 줬더니, 저기로 가져오라는 거다. 친구들이 있는데서 먹고 싶은 거다. 그게 반말이어서 그랬는지(반말은 항상 하는데), 갑자기 커피 심부름 시키는 마초 이미지가 떠올라서 였는지 기분이 나빴다. 자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데, “나이도 먹었는데, 돈도 벌고 결혼도 해야지.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해”라는 말이 조금 불편하다. 괜시리 나한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활동보조인 권리찾기 모임에 나갔다. 장애인활동보조지원법이 시행되면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들을 들으면서 신기했다. 문구 하나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 장애인활동보조지원법에 이용자가 방문목욕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명시함으로써 대학교 목욕봉사동아리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지, 아니 현실을 무시하면서 만드는지도 눈에 훤히 보였다. 위에서 말한 방문목욕서비스 같은 경우도 이용자들이 활동보조시간(에 해당하는 돈)을 2배이상 써야만 하기에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활동보조 시간이 부족한 이들이 밥먹고 신변처리해야 하는데 써야할 활동보조시간을 목욕하는데 쓰겠냐는 거다. “펜대만 굴리는 인간들”이란 표현이 참 와닿았다.
게다가 정부(보건복지부), 중개기관, 활동보조인, 장애인이용자 모두 위치가 다르고 여기서 부딪히고 저기서 만나고 얽히고설킨 관계가 보여서 재밌었다. 정부는 장애인의 요구들을 중개기관으로 미루려고 한다. 직접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싸게 먹히고 책임질게 없으니까. 중개기관은 정부로부터 돈을 따와야 하니까 정부눈치를 보고 활동보조인에게 될 수 있는 한 적게주고 많은 걸 요구한다. 활동보조라는 일자리가 불안정할수록 서비스 질은 낮아질 거고, 결국 장애인 이용자가 그걸 감당해야 한다. 활동보조인의 안정된 고용을 요구하는 것은 이 악순환을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이 글 앞부분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너무 이용자와 활동보조인 개인들 간의 윤리적인 관계문제로 풀어낸 감이 있는데, 이같은 것들도 구조적인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다. 허리를 삐끗한 활동보조인의 경우도 그것이 산재보험 처리가 되고, 다른 활동보조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의 안정적인 구조가 마련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이용자에게 참으라고, 활동보조인에게 참으라고 하는게 해결인가?
근데 이걸 적극적으로 할 당사자는 역시 활동보조인밖에 없는 것 같다.
활동보조인은 중년 고령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이용자와 같은 성별로 활동보조를 맞춰주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남성들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러지도 못한다. 특히나 ‘젊은 남성’이 너무 없단다. 여성의 것이라 여겨지는 돌봄노동이기도 하지만 불안정하고 돈이 얼마 안 되니까. 근데 왜 이런 열악하다는 노동에 중년 고령의 여성들이 모이냐는 거다. 그만큼 그녀들이 제대로 대우받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도 활동보조 권리찾기 모임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돌봄노동자 집회에 갔었다. 여성들이 하는 평가절하 된 돌봄노동에 정당한 대가와, 얼마 안되는 남성 가장들을 위한 현실적인 임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성 결혼하고 애낳고 산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성 가장이기에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러니까 여성은 적게 줘도 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전제를 이성애 정상가족으로 두고 주장하고 설득할 때 내가 설 자리는 없어지는 것 같다. 일을 하면서 화장실에 갈일도 많고 이용자의 개인적인 삶에 많이 들어가다 보니까, 지금처럼 성별이분법이 강력한 사회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이 일을 하기는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 일 뿐이겠냐마는)
아, 뭔가 고민거리는 많고 풀어낼 능력은 안 되고, 막 쓰고 싶진 않고, 이 조악한 언어를 보아라.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