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진흙

<퀴어이기는 했지만 장기간 일반연애로 스스로 의기소침해진 나는 어느날 진흙이 되어버리고 만다>

제 1막

일인극을 위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습니다. 봇물처럼 생각이 밀려와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죠…. 조심해야 해. 거기 수도꼭지를 잠궈주세요. 현재는 진흙덩어리지만 저도 인간세상에 태어났었지요. 왜. 부모가 일반이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중요합니까. 이제 와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일반들은 저를 일반이라고 여깁니다. 저는 레즈비언이 아니고, ‘여성’ 하고 사귄 적도 없고, 그쪽은 나름대로 저를 좋게 여겨서 ‘남자친구’ 나 ‘결혼적령기’에 대해 제게 이야기합니다. 친구죠. 저는 집에 혼자 있을 때 반성을 하고는 합니다. 제가 사귀는 사람을 그들이 남자친구라고 부른 것이 그들의 실수입니까. 사과받아야 할 문제입니까. 이 모든 게 제 탓입니다. 그러게 왜 그랬단 말입니까. 지금 사방에서 ‘넌 우리야.’ ‘넌 일반 여성이야.’ 머리통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시겠죠. 그래서 저는 글을 쓰다가 발밑이 쑥 빠지며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제 2막

친애하는 여러분. 저는 저를 일반으로 여기는 일반들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화해하게 하려는 일반들과도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끔 누군가의 나이를 묻고 쉽게 반말을 하고 ‘애들’이라고 싸잡아 부르듯이, ‘남자친구 없대요’ ‘난 이성애가 옳다고 생각해요’ 내뱉을 때도 그들과 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성애가 무엇인지 아는 게 확실합니까.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 18화는 이런 경우 호모포비아를 존중함으로써 친구가 되자는 상상력을 제시했는데…, 저는 무시하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수 이장혁은 어느 인터뷰에서 <호모포비아>라는 곡을 언급하며 ‘다양성’ 을 제시합니다. 동성애도 다양성이고 호모포비아도 다양성이고 총으로 쏴죽이겠다는 노랫말도 다양성이고, ‘다양한 거잖아? 내가 버섯을 못 먹는 것처럼?’

고함을 쳐서 죄송합니다만, 자기자신의 문제로 삼지 않는 방식으로 성소수자를 화제 삼고선, 안일하게도 ‘그건 내가 성소수자가 아니어서 갖는 한계’라고 하면 그만인 일반들에게 제가 아직도 지쳐있다는 점을 감안해주십시오.

‘내 형제 중에도, 자식 중에도 성소수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 생겨나는 지지’ 가 고맙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바라지 않듯이, 저는 일반의 가족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랬다가 말썽을 피우면 ‘사랑의 매로 혼내야겠어’ 하지 않겠습니까. 게이 아들을 낳고 싶다는 배우들이 의아합니다. 김꽃비를 엄마로 두고 싶은 게이는 있을까요. 일종의 인류애입니까. 가족으로 삼겠다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멀리 있을수록 아름다운 것이 또한 가족인데…. 일반들은 저를 친구, 형제, 심지어는 자식으로 삼기 위해 일반으로 오해해주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진흙덩이가 되어 다시는 그런 따스함을 겪지 않을 테니 기쁩니다. 여기서 경쾌한 음악과 함께 진흙들의 군무가 있으면 좋겠군요.

제 3막

진흙덩이가 된 것이 달갑습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무슨 인간이었던가. 어떤 질서는 제 삶을 침해했고, 퀴어라는 천막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반이 아니라는 것은 소수의 의견이지 않습니까. 그 많은 정체성의 언어가 무슨 소용이냐고, 자기 언어와 자기 집단을 가진 자들은 천막 안에서 물었습니다. (한 줄 삭제) 그러게 저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요. 제 존재가 실익이 될 리도 없었잖습니까.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분명히 그렇다’ 고 다짐할 수 있는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독백을 해봐도,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다고 나열해가는 행동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저는 일반과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사이좋게 닮아가면서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 스스로 싫어했기에 이런 진흙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불을 켜주세요. 제가 드러나게.

제 4막

어두워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야박한 매도는 좋지 않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오해는 거두어주세요. 여전히 일반의 친구긴 하니까.

어떤 일반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예민함이 아니라 우리 잘못이다, 앞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다, 힘들더라도 우리와 이야기해달라, 기회도 주지 않을 만큼 애정이 없는 거냐’ 그들에 대한 제 판단은 항상 옳았음에도, 그들은 저에 대한 애정, 혹은 그 어떤 이유로 인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말을 해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생명체입니까. 매우 감동하면서 의심했습니다. 아무 소용 없다고 여겨 마음 편히 먹으려 했는데…. 공동주거 경험에서도 저는 몇 년간 한결같이, 그 구성원들이 성정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현재에 만족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왜 노력을 시작하는가. 나도 노력해서 응답해야겠다. 왜요. 소통이란 뭡니까. 이롭습니까. 내가 말해서도 행동해서도 되지 않다가 돌발적으로 일어나버리는 부분적 소통에 대해, 예외상황에 대해,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까.

아마도, 일반이어서 그들에게 실망하거나 분노한 것이 아니었듯이, 그들에 대한 저의 노력도 그들이 일반이기 때문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발언은 하지 못하고 진흙의 고백에 그칩니다. 안녕히.

2 thoughts on “진흙

  1. 우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멋있다거나 재밌다는 말이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멋있어요! 만화를 읽다가 잠깐 트윗 대충 보다가 링크 타고 와서 책을 손에서 놓고 단숨에 읽어버렸네요 단숨에 읽을 호흡은 아닌데 너무 재밌어서…ㅡㅅ ㅡ; 연극 기대하겠습니당

    응답

    1. 감사합니다
      기대하시면 안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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