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적을 수 있는 건, 아는 걸 정리하거나, 경험하고 느낀것일 뿐.

처음 정체성을 긍정하고 세상을 바꾸는 활동에 신날 때가 있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밤새지 못하는 내가 밤도 새는 걸 보고서는 ‘아, 이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보다’라고 생각했다.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퀴어퍼레이드에서 치마 입기, 사회주의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을 만나게 하기, 성소수자 몸짓 공연을 해보기, 성소수자 이슈로 집회를 열어보기,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무언가를 해보기,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소수성을 가지고 다른 소수자들을 만나기 등등. 무지개깃발을 들고 집회에 가는 것이 좋았다. 세상과 싸우는 이들과 함께 정의를 외치는 것이 좋았다. 책도 많이 읽었다. 여러 소수자들의 이야기, 사회운동, 경제, 섹슈얼리티 등등.

동인련에서 상근자를 하게 되었다. 돈 받으면서 하고싶은 걸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민주적이었고 내가 무언가를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회원관리, 기자회견 나가기, 성명서 쓰기, 웹자보 만들기, 상담전화받기, 교육나가기, 동인련 공식 행사 준비, 연대체 회의 나가기 등등을 했다. 처음에는 많이 서툴렀던 일들도 점점 익숙해졌다. 활동을 시작하면서 처음 회의에 갔을 때는 그냥 모든게 신기했고, 눈만 뜨고 구경하면 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의견을 내야하는 이가 되었고, 모임을 꾸려나가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수동적으로 실무만 하는 사람을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 때부터 그냥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필요한 활동이기에 그리고 내 직업이 이거니까 하긴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멈춰버린 것 같다. 나에게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라는 꿈의 가장 현실적인 형태인 동인련 상근자를 해보니, 생각보다 금새 지쳐버렸다. 그리고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생태학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재밌었다. 운동 관련 책들은 읽고 싶지 않았다.

활동을 하나둘씩 정리하고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인권활동가로서 맞지 않은 자질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뜻을 잇고 활동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 활동가가 내향적인 내 성격과는 맞지 않은 듯 했고, 사회적인 이슈나 필요한 사안에 급작스럽게 대응해야하는 ‘필요할 때 폭발하는 정신력/체력’도 나에게는 없었다. 뉴스를 잘 보지도 않아 현실감각도 떨어지고, SNS랑 친하지도 않았다. 사실 내가 잘 하는 것도 많고, 모든 걸 잘하는 활동가란 없다. 그냥 하고 싶지 않으니까, 활동을 그만두려니까 이런 저런 이유를 찾았던 거다. 왜 이유를 찾아야 했을까?

불안했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건지 불안했다. 꾸준하지 못한 나에 대한 변명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뭘해도 금새 지쳐 다른 걸로 도망치는 사람일까봐 두려웠다. 그런 사람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에서의 삶이 미리 두렵기도 했다. 성소수자 운동의 공간이 아닌 ‘현실’ 세계는 아무래도 외로울 때가 더 많을 터이고, 내가 참고 타협해야 하는 것들도 많을 테니까.

이와 더불어 죄책감이 들었다. 활동을 힘들게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이제와서 돈 걱정없이 대학원에 갈 수 있는 나의 위치. 재미로 살아가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불평등, 고통, 부조리 안에서 나 잘 살길을 찾는 것에 대한 죄책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런 고민을 늘어놓을 때면 쿨하게 “니가 행복해야 뭐든지 할 수 있는 거라고” 이야기해놓고, 막상 내가 그러니까 머리속에 떠오르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

분명 ‘활동’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나로부터 세상을 새롭게 읽어가는 작업이었다. 내가 크고 넓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소수자 활동가’로서 나의 위치를 잡으려 할수록 내가 커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당사자가 아니었다.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보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원하고, 해야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필요하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는 것이 재미없어졌다. 글을 기계처럼 쓰게 되었다. 내 이야기는 나도 재미없었다. 그리고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대단한 활동가들이 있었다. 당연히 부족한 모습들도 있겠지만, 존경스러운 활동가들. 그들이 매섭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무뎌지고 날카로운 고통을 목소리로 바꾸어가기 때문에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닮고 싶었다기보단 그렇게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뭐 그렇게 급해. 몇년만 여기에 붙어 있으면 너도 그렇게 될 걸’이라고 생각했지만 왜 그런 생각을 해야 했을까. 누구에게서도 인정받는 ‘전문가’이고 싶었다. 왜?

당분간은 활동을 접으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재밌어지는 게 생길거라고 확신한다. 활동이 뭘까? 세상을 좀더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하는 무엇. 주변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하기, 나를 바꾸어 가기, 후원하기, 페북에 공유하기, 연대하러 다니기, 정당활동하기, 노조가입하기 등등. 가장 절정이 인권활동가라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서 그랬다. 아마 틀린 것일 테지만. 뭔가 일직선에서 순서대로 점점 더 나아가 인권활동가가 종착지였다. 이젠 종착지에서 뒤로 물러나는 때이다. 어디를 내 위치로 잡아야 할지 정해야 한다. 마치 후퇴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 느낌이 참 별로다.

그렇지만 인생은 일직선이 아니라는 거. 수많은 선들. 곡선들. 겹치고, 갈라지고, 끊긴 선들.

아직도 불안하다. 그리고 모르겠다. 대학원이라는 선택은 내가 원하는 게 맞는지, 내가 즐겁게 공부할 수 있을지, 또 싫증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래도 많이 쉬었다. 쉴 수 있어서 감사하다. 미안하다.

이제는 익숙한 나로 돌아가는 것 같다. 책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자고. 많이 편안해졌다. 행복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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