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은 영화, 하프 (스포주의, 관람주의)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지도 않았고, 팝콘을 던지지도 않았다. 스크린을 향해 팝콘을 던져봤자 앞에 사람들이 맞을 것이고,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트랜스포비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영화관에서 내가 부들 거리는 것이나, 킥킥대며 웃는 것은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에 대한 반감으로 읽히는 것이 더 쉬워보였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결국에는 영화가 끝난 뒤에 가장 화가 났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하는거지”라는 말을 들었다. 영화 업계 사람으로 보이는 4-50대 중년들이었다. 이것이 영화의 유일한 장점이자, 가장 비열한 지점이었다.

영화가 쓰레기

영화 자체가 개판인 건 그냥 넘어가자. 배우가 발음을 씹어먹어도, 악센트가 이상해도, 대사가 맥락이 없어도, 장면의 연관성이 없어도, 촬영이 개판이여도, 그냥 시나리오도 촬영도 연기도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쓰레기라도, 내용만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제작자가 출연자와 감독의 소감 한마디 씩이 끝나고나자 차렷, 인사를 시킨 일도 없었던 일로 하겠다.

인류애를 가장한 남의 이야기

시사회에 앞서 인사를 나온 김세연 감독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제가 너무 힘들 때 만들었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왜 너무 힘들어서 희망을 말해야 하는 시점에 감독은 트렌스젠더를 주인공으로 시나리오를 썼을까? 처음의 질문은 왜 남의 이야기를 가져다 썼을까?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트렌스젠더의 이야기가 그 감독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음을 계속 주지시켜주었다. 사실이다, 그럴 수 있다. 게다가 “남의 이야기”라는 지칭이 이미 트렌스젠더를 타자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봤다면, 감독에게 트랜스젠더가 남의 이야기였음이 너무 분명해진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의 전라의 몸을 부분적으로 비춘다. 여성인 것 같지만, 의문을 가지게 하는 방식, 그리고 주인공의 몸을 비춘다. 전형적인 여성을 흝는 시선과, 그 시선에게 충격을 주는 몸의 프레임. 그 몸 없이는 감독 자신도 주인공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주인공은 감옥에 갇혀서도 오랫동안 분홍색을 띄는 입술을 가지고 있다. 그 입술을 칠하지 않고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도 감독도 몰랐을 것이다.

감독은 흔한 수사로 말한다. “<하프>는 특정소수자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차별 받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소수자라는 점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감독은 시스젠더 남성 변호사가 고아원 출신임을 마지막에 고백하게 하고, 주인공의 고통과 퉁친다. 우리는 모두가 소수자일 수 있다. 그것은 다양한 지점의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지, 너도 나도 소수자니까 니 고통도 엇비슷할 것이다는 말이 아니다.

기본적인 작품성이나 촬영스킬도 담보하지 못하는 영화에서 트렌스젠더 주인공은 영화가 까이지 않을 유일한 방패막이며, 유일한 존재 이유다. 그게 이 영화의 비열한 지점이다. 인디플러그가 트윗한 네티즌의 평을 보자. “영화의 기법, 작품성을 논하기보다 이런 주제를 다루었다는 것, 그리고 미화되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감독님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이 든다.” 우리는 이미 천하장사마돈나, 지금이대로가좋아, 3XFTM의 영화가 개봉한지 몇년이 지난 시점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영화가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고 해서 감독에게 감사해야 하나? 영화에서 트렌스젠더의 삶은 완전히 묻혀졌다. 인디플러그가 트윗한 또다른 네티즌의 평은 이렇다. “보통의 퀴어영화가 그들에 대한 항변이 전부라면 <하프>는 그들 부모의 입장, 친구들, 세상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의 변화까지 모두 담고 있다.” 무슨 뜻이냐면, 이 영화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여성은 모욕에 대한 반발이나 서러움만을 이야기하며, 부모는 자식의 정체성 “때문에” 자살하고, 주인공을 지키는 친구들은 변두리에 위치시키며,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폭력을 아주 상세한 볼거리로 제시하며, 백마탄 왕자님이 나홀로 등장하여 차별에 대항하는 의로운 영화라는 뜻이다.

트랜스포비아와 여성포비아

이 영화는 정말 너무나 여성차별적이다. 주인공의 등장과 동시에 너무나 궁금했다. 주인공이 한마디 할 때마다 5분씩 떨리는 입술만 비추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감독이 생각하는 차별받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일까 아니면 가장 전형적인 여성상의 모습일까. 물론 감독에게는 MTF 트렌스젠더를 그리는데 두 가지를 혼합하여, 말없는 인어공주를 만드는 것만큼 탁월한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MTF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까?

① 영화에서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명 이상인가?

주인공이 일하는 가게 시크릿의 주인은 왕언니다. 문세윤은 핑크. 주인공은 민아, 다른 두 쇼걸은 유리, 세희라는 이름을 가진다. 주인공 민아만이 자신의 이름을 성과 붙여서 이민아라고 이야기한다. 이름은 감독이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쉽게 소비하는 소재이다. 이민아는 법정에서 이민수로 불리고, 유리도 황**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두 사람은 분명히 이름을 가진다. 그러면 핑크는 이름일까, 아닐까? 영페미니즘 문화는 별명을 통해서 스스로 정체성을 가지는 문화를 만들어왔다. 퀴어문화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감추기 위해 별명을 만들던 문화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실명을 나타내던 문화, 그 이후 페미니즘의 정체성으로서의 문화가 뒤섞여왔다. 별명에 대한 문화는 어떤 문화를 접했느냐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별명을 본다면, 왕언니도 핑크도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고민 같은 것은 이 영화에 없다. 이름을 통해 정체화와 서사가 부여된 것은 민아와 유리 뿐이다. 뭐, 그래도 두 명이라 통과는 했다.

② 이 여성들끼리 한번이라도 대화를 하는가?

이것도 통과했다. 영화에서 변두리에 위치했음에도, 시크릿의 다섯 여성의 연대는 강력했다. 이 여성들은 유리 전남친의 폭력에 대해 걱정하고, 조언한다. 민아가 체포되었을 때, 변호사 사무실에 나타난 것도 그들이다. 왕언니는 민아에게 면회를 가서 민아의 엄마를 돌보겠노라고 약속한다. 유리가 민아에게 사과할 때 조차, 두 사람의 유대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90분의 영화에서 이들의 대화는 20여분이 채 되지 않는다. 이후 모든 영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대화는 변호사를 통해서, 변호사의 시야를 통해서 결정된다. 민아 엄마의 장례식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시야를 확보한 것도 변호사다. 민아의 상황을 답답해하는 것도, 교정하려고 하는 것도 변호사다. 여성의 연대가 수평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변호사는 수직적 위계 관계 속에서 도움을 ‘준다’.

③ 그 대화 속에 남자 주인공에 관한 것이 아닌 다른 주제의 내용이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여성들 간의 대화는 민아가 일하는 시크릿 동료들의 연대를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실 그 관계와 대화에서만큼은 누군가의 삶을 그려낼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이 영화의 주제였어야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바로 시스젠더 남성 변호사다. 유일하게 또박또박 이름이 나오고, 호칭되는 두 사람이 바로, 이 변호사와 변호사와 대립하는 검사의 이름이다. 무료변론하기를 귀찮아하지만, 사실은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어릴적 상처도 있는 변호사는 성공에 대한 욕심으로 움직였지만 마침내 주인공이 당하는 부당한 폭력에 분노하며 주인공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는 스토리는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발에 치이는 캐릭터다. 친구는 변호사가 주인공에게 사랑고백은 하지 않아서 다행, 이라고 했다. 전형적인 주말 드라마의 남주를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여주의 역할은 무엇인가? 맞다. 답답하게 있다가 남주에게 기대기. “나도 보호받고 싶어요” 라는 말은 얼마나 충격적인가. 시크릿의 여성 연대는 주인공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건 해결을 위해 방송 인터뷰까지 하며 그녀를 돕는다. 그런데 보호의 요청은 남주에게로 향한다. 상처를 안고, 착하게 살다가, 어려움에 빠지는 여주는 백마탄 왕자님을 통해 구원받는다. 여주에게 가해진느 모든 폭력은 왕자님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사용될 뿐이다. 구원은 왕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거다. 여기까지가 진행되면, 주말 드라마. 하지만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법정드라마/인권영화 이기 때문에, 결론은 살인죄 적용으로 주인공이 7년의 형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와 감독이 입을 모아 말하는 영화의 희망이란, 아마 자신의 변화에 뿌듯해하며 항소를 결심하는 변호사의 것이 아닐까?

사실 감독의 말이 맞다. 이 영화는 특정한 소수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감독은 우리 모두에 대한 이해도 예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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