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서사

* <하프>라는 영화를 보았다. 당신은 보지 않기를 권한다.
* 이 영화에 대한 성실한 평으로는 상어의 글루인의 글이 있다.

“어딜 봐서 여자야?” – 이것은 이 영화에서 단 한 마디 멀쩡한 대사였다.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주인공 민아를 이성애자 남성으로 위치시키고자 끊임없이 분투하는 검사의 대사다. 이 말을 끌어내는 것은 주인공의 변호사의 한 마디. “그 사람 껍데기에 갇힌 불쌍한 여자야!” 이 대사만큼이나 뻔한 클리셰들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자연스럽게도, 영화는 메이크업을 하는 주인공의 눈을 클로즈업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왜 트랜지션은 항상 남성에서 여성을 향하고 그것은 화장으로써야 가능해지는 걸까. 차라리 성기 테이핑을 보이지, 생각하는 순간 멀어진 카메라에는 주인공의 유방과 페니스가 동시에 잡힌다. 역시 자연스럽다. 트랜스젠더 이야기라면 트랜지션의 한가운데를 보여야 한다. 트랜지션 전이나 후에는 이렇다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영화는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그의 정체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어릴 적부터 치마입기를 좋아했다는 설정조차도 없이, 트랜지션 중인 그가 갖는 ‘어긋난’ 신체부위들, ‘어긋난’ 이름들, ‘어긋난’ 관계들을 조명한다. 남성 구치소와 여성구치소 사이를 오가기 위해 – 그 계기가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성폭력이다 – 그는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성기를 갖고 있다. 법정에서 남성의 이름으로 호명되기 위해 그는 호적 정정을 마치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의 슬픔을 가중시키기 위해 죽어야만 했던 엄마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치마 한 벌을 지어주기 위해 옷 수선집을 운영했고,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른 체 그는 남성용의 상복을 입었다.
여성이, 남성이 되고 싶었으나 트랜스젠더가 되었을 뿐, 이라는 흔한 서사를 이 영화는 적극적으로 껴안는다. 여성인, 여성이고 싶은, 여성일 한 사람을 비추기 위해 영화는 끊임 없이 트랜지션의 과정에만, 그 과정에 이따금 포함되는 어긋남과 고통들에만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 끝에서 주인공은, 단 한 마디조차 당당하게 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갖게 된다. 모든 말은 웅얼거림이거나 울먹임이다. “나도 보호받고 싶어요”, 이 한마디가 그가 가장 분명하게 내뱉은 문장이다.
주인공은 갈 데가 거기밖에 없어서 트랜스 클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꿈이 있기에 거기 머무는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각본가와 감독은 – 실은 둘은 같은 사람이지만 – 그곳 이외에 그를 어디에 보낼 수 있는지 몰랐던 것만 같다. 여전히 껍데기에 갇혀 있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똑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외에 달리 어디에 갈 곳이 있겠는가. 다른 어느 곳에서, 그렇게도 쉽게 트랜지션의 과정들을 보일 수 있겠는가.

영화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내내 한 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수많은 클리셰들을 걷어낸 후, 트랜스젠더의 서사에는 무엇이 남는가. <헤드윅>이나 <천하장사 마돈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같은 영화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로렌스 애니웨이즈>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트랜스젠더 서사를 구성해내지 못하는 것이 저 영화들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내가 수술을 하지도, 수술을 준비하지도 않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젠더가 고정적인 것으로 사유되는 한 트랜스젠더는 젠더가 아니라 젠더의 이행 과정을 뜻하는 말일 수 있을 뿐이다.트랜스젠더라는 젠더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트랜지션을 마치면 어엿한 여성이, 혹은 어엿한 남성이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더 자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애초에 트랜스젠더 서사에는 트랜지션 이외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트랜스젠더로 호명되지 않는, 완전한 시스젠더로 패싱되는 개인의 트랜지션 이후의 서사란 여성의 서사거나 남성의 서사일 수 있을 뿐이다. 트랜스젠더인 동시에 섹슈얼리티 차원에서도 성소수자이지 않은 한, 트랜지션을 마치면 성소수자로서의 스토리는 없게 된다. 100%의 트랜지션에 성공할 수 있는가와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은폐의 서사, 망각의 서사가 아니라면 트랜스젠더의 서사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결국 트랜지션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문학이 예외적인 개인의 외적인 상황을 말해주는 무언가라면,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무엇을 말해도 좋을 것이므로 크게 고민할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트랜스젠더인 어떤 개인의 서사와 트랜스젠더의 서사는 조금은 다를 것 같다. 이렇게 집단화가 필요한 때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클리셰를 피하면서 – 뒤늦게 덧붙이자면, 클리셰라서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클리셰들이 너무도 진부한 방식으로 트랜스젠더를 타자화하기 때문이다. – 서사를 통해 어떤 집단을, 어떤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궁금한 것이다.

답은 다른 누군가 해주면 좋겠다. 계속 내 이야기나 하자면,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내가 수술을 하게 되면, 주민등록을 정정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면, 그래서 여성으로 패싱되는 사람이 되면, 나는 비로소 편안해질까. 시스젠더로 오해받는 것은 기쁜 일일까. 해방적인 경험일까. 모를 일이다. 비뚤어진 나는 또 한 번의 트랜지션을 꿈꿀지도 모른다. 나의 젠더 정체성은 ‘여성’보다는 ‘트랜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따금 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트랜지션 – 영화에 나온 것들을 꼽자면 수술을 하고 화장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따위의 것들 – 이 아니라 트랜스 자체의 어떤 서사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데에로 생각은 넘어간다. 여성으로, 남성으로 패싱되는 것과 100%의 여성, 남성이 되는 것은 다른 일일 것이다. 시쳇말로 천상 여자니 어쩌니 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과정은, 트랜지션이라 불리지 않는 그 과정은, 여전히 트랜스가 아닐까. 그것에 어떤 서사가 있다면, 트랜지션을 끊임 없이 회귀시키지 않는 어떤 트랜스젠더 서사도 있지 않을까, 하는 데에로 생각이 넘어간다.
“어딜 봐서 여자야?” –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안 이후로, 어떤 개인을 여자라고 믿을 표지는 그 어디에도 없게 된다. 시스젠더에게조차도 자신의 젠더로 호명되기 위해서는 선언과 연습이 필요하다.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여자” 혹은 “남자”라는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해야 한다. 그 이행의 과정에 어떤 서사가 있는지, 클리셰들을 다 버린 후에 그곳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누가 알려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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