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KIBUN에 대한 단상

페미니즘과 KIBUN에 대한 단상 by 상어

  1. KIBUN의 변화

 

미국 드라마 오렌지이즈더뉴블랙에서 “타문화권에서는 남의 품위를 진실보다 중요시해요. 한국에서는 그걸 기분이라고 부르죠.”라는 대사가 등장했다. 트위터 사용자들 사이에서 여성차별이라는 진실보다 여성차별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을 품위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기분 나쁘지 않을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있을 때였다.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적절한 대사는 여성혐오자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많은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다. 페미니즘으로 기분이 상한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소환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같이 기분 나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인지 보다는, 그들이 느끼는 기분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많은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페미니즘만은 아니다. 지금은 페미니즘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이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노동/민주화운동하는 아들과 그를 먹여살리는 아버지의 대비는 바로 그 억하심정의 재현이다. 아들은 대의를 찾느라 스스로를 부양하지 못한다/않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생활하지만, 대의를 모르거나 대의에 반하는 아버지를 무시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무지나 대의에 반하는 행위는 아들의 탓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그러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서사에서는 대의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왜 옳은지 묻고 따질 이유가 없다. 대의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조차 대의를 좇는 사람들의 탓이다. 얼마나 효과적인 전략인가. 기분이 상한 사람들은 노동/민주화운동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옳은 것을 하지 않더라도 비난받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기분이 상했고, 그래서 어떤 논쟁도 없이 자신을 정당화할 서사를 제시한 것이다.

이제서야 페미니즘이 많은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양하는 아버지와 부양받는 아들의 서사를 써먹을 수는 없다. 세대 간이 아닌 성별 간의 관계를 통과하는 서사를 만들어내기에 지금 시대가 적합하지가 않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당화를 해야 했다. 더이상 포장할 것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기분이 상했음을 드러내야 했다. 그래서 나의 기분과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너의 태도에 대한 억지가 난무했다. 이것이 트위터라는 공간에서 여성혐오자들의 기분을 조롱하는 맥락이다.

나는 이것이 페미니즘에서 기분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변화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내 영페미니스트들이 “불쾌하다”라는 단어를 통해 일상에서의 문제제기를 시도하던 시기가 있었다. 여성이 가지는 “나의 기분”을 드러내는 것, “나의 기분”을 중요시하는 것은 일상적인 차별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었다.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되었던 그 감정을 공공의 자리로 가지고 나오는 과정이었고, “여성의 기분”은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편견을 우회하거나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그래서 뭐?”라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기분은 포괄적인 정의를 가진다. 기분은 “대상/환경 따위에 따라 마음에 절로 생기며 한동안 지속되는 유쾌함이나 불쾌함 따위의 감정”을 말한다. 오렌지이즈더뉴블랙은 미국드라마다. 저 대사 뒤에는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봤다는 부연이 달렸다. 단어의 정의보다 용례에 의존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은 기분의 정의가 아니라 체면의 정의라고 했다. 체면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이다. “제 체면을 봐서라도 그 아이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이거 참, 체면이 말이 아니군.” “체면 차리지 말고 편히 앉아 맘껏 드세요.” 기분이나 체면 모두 타인이나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발생되는 감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정보다는 그 감정을 야기하는 외부적 환경이다.1 “불쾌하다”라는 문제제기 전략은 그 감정을 야기한 사람에게 그 설명의 책임을 전가한다. 그 외부적 환경, 즉 가부장제나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에 대한 언어화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채택한 전략이다. 그리고 더 이상 기분을 말하는 자가 이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여성혐오자들이라는 지점이, 바로 그 외부적 환경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의 변화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불쾌하다”라는 표현으로 일상의 차별을 처음 드러내고자 하는 시점과 비교해서, 지금은 그 불쾌감으로 시작되었던 이야기들이 더 많은 언어와 설명 방식, 지지를 얻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나의 불쾌감이 아니라 너의 여성혐오로 주제를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여성혐오를 겪은 피해자의 기분이 아니라, 여성혐오라는 단어로 지목된 가해자의 기분이 설명할 말을 찾아야 한다. 물론 그 설명은 다시 가부장제나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며, 이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더욱 유익할 것이다. 이런 판단에서 기분이라는 단어의 용례 방식의 변화가 유의미해 보인다.

 

  1. 여성혐오의 기분: 수치심

 

페미니즘으로 기분이 상한 사람들의 기분을 계속 기분이라고 부를 수 만은 없다. 그 감정을 더 세세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들은 단일 집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 것은 적극적 여성혐오자들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로 살다보면, 어떤 이슈에 대해서 내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의 의견을 궁금해한다. 그들은 스스로 그 질문을 할만큼 깨어있기 때문에, 그 질문을 통해 그들은 여성혐오와 무관한 존재라는, 이 무해한 위치를 획득하고자 한다. 질문받은 자를 가르침을 주는 자로 높이 평가하든, 자신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지닌 자로 하대하든, 이제 모든 상황은 질문받은 자에게 달려 있다. 단, 질문받은 자는 질문하는 자의 무해한 위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질문받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설명 뿐이다. 설명은 논쟁을 가져올 수 없다. 논쟁은 대화 상대의 위치에 따라서 가능한데, 질문하는 자의 무해한 위치는 그들이 어떤 입장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들은 문제 밖에 서있다. 문제와 연관될 수 없기 때문에, 논점을 가질 수도 논쟁을 할 수도 없다. 그들의 위치가 무엇인지 요청받았을 때, 그들은 가장 기분 나빠한다. 자신의 위치가 더 이상 무해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해한 위치란 질문 받지 않을 위치일지도 모르겠다.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의 나빠진 기분은 연극 <나무 위의 군대>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 위의 군대>는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소식을 듣지 못한 일본군 병사 2명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전쟁 중이라고 믿으며, 2년 동안 오키나와 어느 나무 위에서 숨어 지냈다. 연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전 중에 분대장은 신병과 함께 나무로 도망친다. 살기 위해 부상자를 외면했고, 부족한 식량 탓에 굶주린다. 그는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노력한 것은 자신에게는 수치다. 그렇기 때문에 신병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 그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요지를 점령한 것이고, 부상자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신병이 그 거짓말을 믿는지 아닌지 분대장은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대장은 수치심으로 신병을 증오한다. 수치심을 일으킨 것은 자신도, 자신의 행위도 아닌 그것을 목격한 신병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도발되고, 극단으로 치닫는지 보여준다. 수치심은 집단주의 문화의 산물이다. 수치심은 자신이 잘못한 행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타인이 그 행위를 알아차린 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누군가 그 감정을 도발해야 한다. 연극에서 나타난 수치심은 분대장의 행위를 알아차릴 수도 있는 신병으로 인해 분대장이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분대장의 모든 행동과 감정은 수치심에서 출발한다. 그는 많은 전쟁을 겪었고, 규칙과 도덕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규칙과 도덕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규칙은 개인의 판단과 무관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다. (대일본제국에서 살아가던 본토 남성에게 군대와 군대 밖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것은 군대와 무관하다. 그는 군에 가기 이전에도 자신만의 도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아내와 결혼하는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규칙에 따라 아내를 선택하지만, 아내의 입장은 다르다. 못생긴 여자, 자신이 결혼을 해줘야 하는 여자,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할 여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수치심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는 잘못 판단했고, 아내는 그 잘못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질문하지 않는 자, 의심하지 않는 자는 불안한 기반을 가지게 된다. 페미니즘은 질문으로 구성되어가는 학문이고, 이론이고,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공중에 떠있는 규칙은 누군가의 질문 하나에도 흔들거린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하지 않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납득하지 않고 넘어가 주어야 한다. 하지만 신병은 질문하는 자이다. 그는 목격하는 자로서 수치심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목격한 행위에 질문을 함으로써 분대장의 살의를 이끌어낸다.

 

  1. 기분이 상한 이유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민주화운동을 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직하고 올바르다. 다만, 복잡한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페미니즘에 기분 상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리는 이미지와 같다. 페미니즘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뿐, 그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왔다. 그 정직과 올바름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조롱을 포함했을지언정, 이 평가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 중 일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에 분노하게 된 이유는 바로 페미니즘이 옳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들에게는 페미니즘은 자신과 무관한 것이다.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과 그런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하는 명제 사이에서 그들이 그토록 분노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그대로 미지의 존재로 남겨두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제 무지하지 않고, 그 속에서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지켜야 한다.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과 그런 자신이 불편해하는 명제 사이에서, 그들은 기어코 이 명제가 틀렸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이라는 전제가 흔들린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나눈다. 또 다시 생각해보면, 진짜와 가짜를 나누기 이전에 페미니즘이라는 질문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불편한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신’이 불편해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면, 전제는 흔들린다. ‘올바름을 판단 할 수 있는 자신이라는 전제는 올바름을 판단할 일이 없다면 흔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치심은 이렇게 살의와 같은 분노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스스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분 나빠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들의 나쁜 감정, 수치심은 염치와 대립한다.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수치심은 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감정이기 때문에, 이것을 안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수치심이 강한 자는 염치가 없다. 염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괴상한 바닥을 보여주면서도 당당하지만, 누구보다 부끄러움과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1. 나는 감정을 하나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감정 자체가 나타내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감정만으로 무언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불쾌하다”라는 문제제기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그 자체로 유의미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자들의 “불쾌하다”는 감정은 여성혐오자들의 반성없음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 감정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Leave a comment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