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궁은 나의 것”

검은시위, 에 참석했다. 최근 폴란드에서 대규모로 열린 낙태 불법화 반대 시위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최근 보건복지부에서 내어 놓은 낙태 시술을 ‘비도덕적 의료 행위’로 규정하고 12개월 면허 정지를 내리는 행정규칙 개정안 철회 및 나아가 형법 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였다. 몇 가지 구호가 반복되었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내 인생은 개망이다”, “콘돔 없이 섹스 없다”, “낙태죄를 철폐하라”, 그리고 “내 자궁은 내 것이다”.

늘 그렇듯 구호는 따라 외치지 않았다. 지루할 때즈음 한 번씩, “낙태죄를 철폐하라”고 외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저 평소처럼 습관적으로 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자궁은 내 것이다”라는 말은 왠지 입에 붙지 않았다. 내게 자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왠지 구호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느낌, 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자궁은 자궁을 가진 이의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 저 말에 거짓이나 과장은 없으므로, 저 말이 자궁을 갖지 않은 이들 혹은 자궁을 가졌지만 여성이 아닌 이들을 직접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물론 ‘자궁 가진 이’와 ‘여성’은 이 집회에서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 같았지만, 한 명 한 명의 생각을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저 나의 추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걸린 것일까. 아마 나는 자궁을 정체성과 연결해 생각했던 것 같다. 정체성은 나의 것일까? 비수술MTF트랜스젠더레즈비언이라고, 여성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나는 이것이 크게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여성으로 대해 달라는 부탁일 뿐이다. 내 정체성은 나의 선언이 아니라 타인들의 인정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름처럼, 명목상으론 내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받아들일 때까지 나는 야금야금 괴롭히겠지만, 정체성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궁은 어떨까. 정체성처럼, 궁극적으로 남의 것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집회는 자궁을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집회였다. 조금 확장하자면 자궁과 연결된 (것으로 여겨지는) 질과, 그리고 질이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섹스를 그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집회였다. 자궁에서 섹스로 이어지는 영역에 타인이 간섭하지 않게 되면, 아무도 출산을 강요하지 않고 섹스에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자궁은 그 주인의 것이 될까.

자궁의 용도를 생각한다. 아마도 자궁은 임신출산을 위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 용도에의 사용 여부는 본인이 직접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들 여길 것이다. 그러나 자궁의 용도는 거기서 끝나지도, 거기서 시작하지도 않는다. 출산을 하라는 요구는 자궁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여성이 자궁 가진 이와 동일시 되는 것은 자궁의 제 1 용도가 다름아닌 여성의 식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의 식별에 사용되는 것은 추정상의 자궁이다. 페니스를 갖지 않은 자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질을 가진 자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궁, 유방을 가진 자에게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자궁, 유방이 크지 않아도 여전히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자궁. (그러나 이 자궁은 상징이 아니다. 있을 것으로, 확신되는, 물질적인 자궁이다.)

자궁의 용도가 그런 것이라면,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낙태나 출산과 관련한 의미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아니, 그런 의미만을 가질 수는 없다. 낙태나 출산과 관련해 완전한 결정권을 갖게 된다 해도, 여성의 식별에 사용되는 것을 막지 않는 한, 자궁은 여전히 자궁 가진 이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의 식별에 멋대로 사용되는 것을 막았을 때에야, 자궁은 자궁 가진 이의 것이 되었다고 ― 임신출산에 관한 용도에 있어서 온전히 당사자가 그 사용을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이외의 용도에 사용되지 않을 때에야 자궁은 자궁 가진 이의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낙태나 출산과 관련한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누구를 어떻게 여성으로 식별할 것인가 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된다. 자궁이 있으면 여성, 자궁이 없으면 남성이라는 생각, 혹은 여성은 자궁이 있고 남성은 자궁이 없다는 생각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된다. 나의 자궁을, 나아가 나의 신체 어느 부분이든을, 당신 멋대로의 의미화에 사용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된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니, 나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데에 당신 멋대로 써먹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가 입에 붙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런 생각의 흐름을 거기서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어진 발언들에서 자궁에 대한 결정권은 ‘자궁 가진 이’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 대신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궁 가진 이’와 ‘여성’이 동의어로 쓰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그런 동일시를 부수는 기제가 되어야 했다. 이 구호는 ‘여성운동’의 구호가 아니라 ‘퀴어운동’의 구호까지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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