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험 말하기의 윤리

« 그린리프 » : 경험 말하기의 윤리

 

  1. 드라마 « 그린리프»

 

드라마 « 그린리프 »는 흑인 커뮤니티의 대형 교회 « 트리엄프 »를 운영하는 목사 그린리프 집안을 배경으로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배포되는 이 드라마는 흑인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하여, 등장 인물 중 흑인이 아닌 배우들은 한 손에 꼽을 수준이다. 주인공은 그린리프 집안의 장녀 그레이스다. 성인이 되자 집을 나갔던 그녀는 여동생 페이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그녀가 집을 나갔던 이유는 페이스가 외삼촌 맥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알렸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페이스의 죽음이 여전히 그 성폭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 집안에 남기로 한다. 홍보 문구를 생각해보자면,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기독교 커뮤니티 내의 성폭력 사건을 다시 보는 드라마다. 이런 드라마는 « 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보기 시작했다.

 

주요 서사는 이러하다. 어릴 적, 페이스는 그레이스에게 외삼촌 맥이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백했었다. 그레이스가 부모에게 알렸지만, 부모가 페이스에게 다시 사실을 확인했을 때, 페이스는 부인했다. 그레이스는 외삼촌을 모함하는 거짓말쟁이로 몰리고, 20살에 집을 떠난다. 그레이스가 떠난 집안에서 페이스는 맥을 늘 마주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페이스가 자살했다.

돌아온 주인공의 눈에 거대한 저택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은 온통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때 가장 큰 적은 그레이스의 엄마 메이다. 드라마의 가장 큰 신경전은 그레이스와 엄마 메이 사이에서 일어난다. 메이는 그레이스가 이기적으로 자신의 도덕성만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불행을 가져온다고 비난한다. 이에 맞서 그레이스는 가족 사업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가장하는 엄마를 위선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페이스의 성폭력 사건을 믿지 않은 것도, 화목한 가족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위선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레이스는 맥의 성폭력을 공론화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내고 그를 신고하라고 설득한다. 서사는 명백해 보인다 :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건을 해결하려는 주인공, 그리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커뮤니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전형적인 성폭력 서사다.

맥의 성폭력 사건은 고소 접수되었지만, 그는 협상을 통해 법망을 피해간다. 그레이스는 집요하게 맥의 주위를 떠돌며 그가 아동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린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몸 싸움을 하게 되고, 그레이스는 맥을 죽인다.

 

  1. 경험이 드러나는 순간

 

가족 내부에는 이미 자살한 단 한 사람의 성폭력 피해자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즌이 끝날 무렵에 우리는 두 사람의 성폭력 피해자를 더 만나게 된다. 엄마 메이와 그레이스다. 두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이지만, 서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메이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성적 학대를 당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메이의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예쁨 받음으로써’ 메이가 가족 내 학대나 가난에서 혼자 벗어났다고 비난한다. 여동생이 질투하는 메이와 아빠의 나들이가 성적 학대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모른채 말이다. 딸 그레이스 역시 메이가 고통을 모르는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메이는 자신의 여동생과 딸에게 자신의 학대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가해자의 처벌을 기대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방관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두 여성에게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처럼 보였다. 그래서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메이는 두차례에 걸쳐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한다. 첫번째는, 메이가 페이스의 자살 1주년 추모식을 앞두고 딸에 대한 기억에 젖어있을 때였다.[1] 그레이스는 페이스가 자살하기까지 그 모든 상황을 방치한 부모가 다시 페이스에 대한 추억에 잠겨있는 것이 위선적이라고 비난한다. 메이는 « 너는 나와 페이스가 겪은 고통을 몰라 ! »라고 외친다. 그렇지만 « 대체 어머니가 무슨 고통을 겪었는데요 ? »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두번째로, 메이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남편에게 말한다. 이 고백은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라기 보다는, 다른 말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로서 사용된다. 자신의 딸 그레이스가 정당방위로 자신의 남동생이자 딸의 강간범인 맥을 살해한다. 메이에게는 남동생으로서의 맥을 추모할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자살한 딸과 죽을 뻔한 딸에 대한 분노로 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남편에게, 그 공간과 시간을 요청하기 위해서, 메이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정확히 말하면 동생과 공유하고 있던 유년 시절을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남동생이 아동성폭행범이 된 것을 자신이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외삼촌 맥에게서 성폭행을 당할 뻔했었다. 페이스가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기 1-2년 전에 그녀 역시 같은 상황에 처했었다. 그녀는 페이스의 증언이나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 없이도 외삼촌 맥의 가해를 증명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과 연대를 실천했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털어놓을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털어놓는 순간이었다. 그레이스는 이 이야기를 관계의 진전을 위해 털어놓는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남자친구에게 용기를 얻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다.

 

우리가 성폭행 피해 경험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기대되지 않고 조절되지 않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기도 하고, 다른 비밀들 중에 하나로 교환하기도 한다. 고백이란 그러하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그 고백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돌파구/관계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남동생을 추모하기 위해 메이는 고백했다. 여동생과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녀는 고백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1. 알지 못하는 경험을 마주하여

 

다시, 메이가 자신의 경험을 내비치려고 했던 순간을 되새겨보자. 그레이스는 페이스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보는 메이에게 화를 낸다. 그레이스에게는 페이스의 죽음 뒤에 이어지는 추모들이 모두 위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때 메이는 소리를 지른다. « 넌 너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나와 페이스가 겪은 고통에 비해서 넌 아무 것도 아니야 ! » 메이에게 페이스는 자신의 딸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고통을 받은 여성이다. 그레이스는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여성이다. 그레이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레이스에게 메이는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죽은 페이스를 우아하게 추모할 수 있는 “운 좋은 여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 대체 어머니가 무슨 고통을 겪었는데요 ? » 라고 되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을 없다고 선언한다.

성폭력 피해는 말해지는 것만으로 화자와 청자에게 모두 위로와 연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폭력 피해가 피해자만을 비난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드러나는 경험만으로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경험으로도 위로와 연대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말해지지 않는 경험은? 우리는 알지 못하는 타인의 경험에 대해서 어떤 윤리적 태도를 취해야 할까 ? 우리는 어떻게 알지 못하는 타인의 경험에 믿음과 존중을 드러낼 수 있을까 ?

 

우선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를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미 페이스의 죽음이라는 경험이 그들의 경험을 뒤덮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한 침묵일까 ? 거대하고 절대적이 되어버린 어떤 것에 압도 되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레이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레이스는 페이스와 같은 피해를 겪었다. 페이스의 입을 빌리지 않고서도 그레이스는 맥이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페이스의 말하기에 기댔다. 지금 진행되는Me too 운동은 타인의 말하기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 힘을 모으고 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하기를 통해, 페이스의 피해를 증명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면 그것은 미수에 그쳤기 때문에, 피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겪지 못한 경험이 있고, 자신은 피했다고. 자신이 피했기 때문에, 페이스가 당했다, 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레이스는 자신의 경험에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메이의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성폭력 생존자이자, 다른 성폭력의 방관자였다. 메이의 말하기는 메이를 성폭력 생존자로서 위치시키며, 그레이스를 배제시켰다. 이 비난은 타인의 경험에 대한 무지이자 무시였다. 그렇지만 그레이스가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메이의 위치를 확인하려 할 때, 메이가 선택한 말하지 않기는 페이스의 피해 경험에 대한 존중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신의 고통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당장 자신의 고통의 서사를 대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의 즉각적인 침묵이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침묵을 이어가는 것에는 판단과 결정이 있다. 메이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페이스에 대한 애도인 동시에, 그 애도를 분노로 표출하는 그레이스에 대한 존중이었다. 말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공백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메이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레이스가 택한 비난 방식[2] 때문이기도 하다. 이 방식은 메이의 바로 그 전 발화[3]와도 같다. 메이와 그레이스가 상대를 비난한 방식은 자신을 피해자 위치에 세우고, 상대를 그 위치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난에서 두 가지를 구분하기란 어렵다. 상대에 대한 분노는 상대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선언 위에서만 존재한다. 메이가 혹은 그레이스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면, 이 경험은 각자가 가진 분노를 잠재울 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게 그 분노를 받치고 있는 피해자성을 흔들고 공격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릴 것이다.

 

불행 배틀은 타인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생각되는 내 고통을 통해, 더 많은 지분을 점유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것과 비교하고, 순서 매기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 공간은 공유되지 않고, 점유되기 때문이다. 메이에게 그레이스는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운이 좋은 여성이고, 그레이스에게도 메이는 운이 좋은 여성이다. 메이의 여동생에게도 메이는 운이 좋은 여성일 것이다. 그 오해의 골에서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은 것은 침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는 피해자이고, 너는 아니다”라는 선언을 위해서 자신의 경험 말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않는 것이 터부이기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이 사용되는 상황을 피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말하지 않기로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해 경험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에서, 말하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말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 때, 어떤 말하지 않기는 타인의 이야기에 공간을 주기 위해 선택될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한 비난과 타인의 경험 말하기가 뒤섞였을 때, 비난을 감수하고 타인의 경험이 말해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윤리적인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주하는 사람의 고통을 언제나 알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을 알기란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공유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고, 보이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알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 공백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고통이 타인을 평가하고, 타인과 나를 가르는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나만이 고통받는 존재, 나와 같은 고통을 받는 자만이 고통받는 존재라는 태도는 같은 고통 아래에서도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하긴 이런 태도 아래에서는 “같은 고통”이란 존재할 수 조차 없다.

 

  1. 하고 싶은 말

 

경험을 말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자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트위터는 좋은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은 뜬금없는 선언이나 고백, 말하기가 가능한 공간이다. 어떤 말은 불같이 퍼지기도 하고, 어떤 말은 적절한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말은 그냥 흘러가기도 한다. 시간에 따라 흘러가기도 하고, 사라지는 것도 같지만,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다.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은유성으로 피해자들의 연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말하기가 점유의 게임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 뜬금없는 선언과 고백, 말하기의 위치가 뒤틀리고 있다. 배타적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말하기의 목적이 되어버리고, 연대는 배타적인 공간을 점유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어진다. 지금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래디컬 페미니스트(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로 정체화하는 사람들, 소위 TERF의 말하기 방식이 그렇다.

TERF는 자신의 고통을 타인이 공유할 수 없는 배타적인 공간에 위치시킨다. 자신의 경험을 배타적으로 위치시키기 위해선, 타인의 경험 없음을 함께 선언해야 한다. TERF는 타자로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이용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선언함으로써, TERF라는 집단의 배타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공간은 다른 경험들마저도 위계적 질서 안에 가둔다. 나의 경험과 동일한 경험만이 공간에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나의 경험과 다른 것은 서열화되어 우선 순위를 매기려 든다. 그래서 “챙기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연대의 헐거운 고리는 등호와 부/등호로 도식화된다. 그 도식에는 다른 이야기가 들어갈 틈이 없다.

‘진짜 여성’을 찾아내서 그들의 고통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TERF는 다른 사람의 말하기를 가로 막을 수 밖에 없다. 상대를 타자로 만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나와 같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운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어떤 경험을 말하더라도 그 경험의 ‘예외성’, ‘운 좋음’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피해의 범주에서 제외시켜버릴 수도 있다.

 

자신의 피해를 절대화시키기 위해 타인의 경험을 함께 선언해버리는 방식은 비윤리적이다. 그럼에도 그 비윤리성이 지적받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되어온 것은, 그 말하기 방식이 경험의 말하기와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경험 말하기를 존중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당신은 그 침묵이 당신의 말하기의 승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침묵은 누군가 연대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그 경험이 윤리성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타인이 내어준 공간이다.

[1] 그린리프 2시즌, 7번째 에피소드

[2] « 대체 어머니가 무슨 고통을 겪었는데요 ? »

[3] « 넌 너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나와 페이스가 겪은 고통에 비해서 넌 아무 것도 아니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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