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는 글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일하는 기관의 입장이 아니라 전적인 나의 생각으로, 공개적으로 글을 쓴 적은 처음이다. 온라인에 내 경험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난 미투를 할 수 없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것이다. 친구도 그런 의견이다. 말하지 말고 쓰지 않는 게 낫다. 그렇지만, 고소당하는 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불리할 것이다. 내 경험은 어떤 류의 폭력으로도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 몸을 평가한 사람이 남성이었다면, (성별에 대해 말하지 않고 통화했던 한 성폭력상담소 상담원의 말처럼) 내가 몹시 불쾌했으니 ‘성희롱’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둘 다 여성이니까, 그렇게 절대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여성단체도 내 제기를 무시했으니까.

그럼 뭐라고 해야 했을까? ‘저 사람이 남성이었으면 의심의 여지없이 성희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라는 말 말고,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그 사람이 레즈비언이었으면 성희롱이라고 생각했을까? 웃기다. 내 기분이 나빴으면 성희롱이라고 모두가 말했지만, 이성애자 기혼여성이 내게 한 몸매평가는 내 기분이 나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성적인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내게 몹시 심각한 의미를 초래했는데. 어떻게 더 성적인 의미가 있어야 하지?

그래서 더 기분을 표현해야 했을까? 더 울고?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면, 불쾌하면, ‘상처 입었으면’ 피해라고 해석하는 대응이 싫다. 정당하지 않다. 그것은 ‘상처 입은’ 나약한 ‘여성 피해자’로 꾸미기를 요구한다. ‘기분이 나빴다니 사과’하는 어떤 가해자들의 사과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 단 한번도, 내 경험을 기분의 문제로 생각한 적이 없다. 분노는 성희롱에서 촉발된 것이지 분노가 성희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기분이 풀리도록 달래주면 되는, 또는 저절로 기분이 풀리게 되어있는,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 취급이라니. 사무실을 다 부셔버리는 건데, 아주 잘할 수 있는데, 무엇에 씐 사람처럼 얌전하게 진술서를 쓰고 또 쓰기만 했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최근 성폭력 사건들을 보며 그동안의 내 접근에 대해 생각했다.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해서, 나는 성별을 떠나서 성폭력상담기관에서 지원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 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답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를 향하는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공신력과 전문성이 있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통합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게 성폭력상담기관이라는 내 판단은, 내가 겪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다. 다르게 지원을 시작하더라도 종국에는 성폭력상담기관을 통해서 하게 되는 부분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동성 간 성폭력이라고 해서 ‘다르게 여겨져야만 할 이유도 없다’. 동성 간이라고 사소하게 생각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성소수자혐오로 인해 사건해석이 왜곡되거나 사건 자체를 특별히 더 끔찍한 것으로 규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여성들로부터도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주로 여성들 속에서 살아간다. 동성 간 성폭력이 전부터 숙제 같이 여겨졌는데, 그동안 어떤 진전도 하지 못했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다.

성폭력상담기관에서 시행하는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주위에 권한 적이 많지 않다. 일명 100시간 교육. 지난 몇 년간 주위에 꽤 권했지만, 그럼에도 성소수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내 지인 대부분에게 권한 적이 거의 없다. 왜였지?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친화적인’ 곳에서 하는 교육이라도, 성소수자와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해 3시간을 할애하면 많은 편이다. 섹슈얼리티 과목이 있더라도 이성애주의는 언급되지 않고 젠더정체성과 젠더표현도 다루지 않아서, 성소수자와 관련성이 없는 과목으로 보였다.

비성소수자들 틈에서 강의를 듣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그것이 자기를 열어야 하는 교육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만 내 이야기를 터놓을 수 없는 상황이 주는 소외감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기’가 가장 중요한 그곳에서 가장 입을 열기 힘든 사람 가운데 하나가 성소수자다. 아마도 그래서 선뜻 100시간 교육을 권하지 못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피해가 전부는 아니다. 누구나 성폭력 피해를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나’를 우리는 90% 이상 여성으로 알고 있고 상상한다. 내 경험을 피해로 해석하는 것이 나를 여성으로 드러내는 일이 되는,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고통스러운 젠더퀴어는? 수치심이 매우 ‘여성적’ 감정으로 여겨져 수치스러웠냐는 질문을 견딜 수 없는 피해자는? 불쾌했다면 성폭력이지만, 가해자가 여성이면 그렇게 무서울 것도, 화날 것도, 못 견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성상담원과 맞닥뜨린 피해자는?

난 반성폭력운동을 하는 곳에서 일했다. 그래서 내가 조금은 더 아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문제가 되자 난 무지했고, 아직도 내 경험을 뭐라 설명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성희롱인가? 또는 내가 이름을 찾지 못한 다른 괴롭힘인가? 그럼 조직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가? 나와, 내 동료와, 내가 했던 운동은 거기서 실패하기 시작했다.

남성 간 성폭력이 피해자의 남성성을 해치지 않는다는 위로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가 그 이후 ‘동성애자가 된’ 데 동성애혐오를 표출하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정강간’이 한국사회에서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교육에서 고민할 수 있고, 성폭력이 상대를 여성화하는 폭력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수치심’ 용어사용 배격도 필요하지만, 다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치심은 ‘여성성이 훼손된 감각’이 아니라 성적 존재로서의 내 자존감이 입은 상처일 수 있고, 내가 내 자신이기 때문에 갖는 감각 자체일 수도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동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지만, 모두에게 유용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의의 과정 자체가 타인에 대한 침해가 되지 않도록 훈련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성적 불쾌감’이 침해, 성폭력의 근거인 것이 적절한가? 그렇다면 성소수자의 존재만으로 불쾌함을 호소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계속해서 처벌대상으로 남게 되지는 않을까? 성폭력이 ‘젠더위계구조’ ‘젠더권력’으로 발생한다고 설명되어 왔는데, 동성 간 성폭력이 이와 같거나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다르다면 그건 무엇인가?

다른 누구보다 성소수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하지 못했다. 이제라도 같이 100시간 교육을 수강할지 고민했다. 이에 대한 주위의 의견은 다양했지만, 나는 우리가 더 많이 같이 배우고 토론했으면 좋겠고, 당연히, 100시간 교육도 유용하다. 기본을 검토해야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공감하거나 비판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서 공감과 비판은 그렇게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몰라서’ 생기는 게 아니라(잘 아는 단체는 잘 알기 때문에 피해자의 입을 효과적으로 막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고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필요한 건 ‘재고하기’다.

평등을 지향하는 과정은 사회가 규정하는 ‘성적 불쾌’를 삭제하는 과정이 아니며, 우리의 가장 큰 힘인 유머감각을 잃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름 아닌 바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힘껏 평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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