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성적 분노

화가 났습니다. 어제부터 화가 났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여러날이 지났군요). 홍대 미술 수업에서 누드 모델의 나체를 찍어서 올린 사건이, 남성 피해자이기 때문에 피해자는 경찰의 보호조치를 받았고, 여성 가해자였기 때문에 체포와 동시에 언론에 내던져진 모습이, 화가 났습니다. 트위터를 보며 실시간으로 더 화를 냈습니다. 노홍철이 누드모델 몰카 사건이 인격 살해라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 ‘빨간 마후라’라는 강간 비디오를 복사해서 판매했던 사람입니다. 한 번 더 화가 납니다. 여성 가해자에게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다고 합니다. 또 화가 납니다. 누군가는 이 사건이 가해자를 특정하기 쉬웠기 때문에 빨리 잡힌 것이지, 여성 가해자이기 때문에 빨리 잡힌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트위터 화면을 보고,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화가 난 것은 맞지만, 이 화가 그 사건에만 집중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냥 계속 화가 나있었습니다.

1.

아마 지금 쓰고 있는 글에 더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늘 해왔던 말이지만) 위계화된 집단을 명시하지 않고 차별을 구조로서만 이야기할 때, 그러니까 “인종차별”을 이야기할 때, 백인이 어떻게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극우파의 프로파간다와 마주하면서, 우리는 구조에서 피해집단을 더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성차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은 위계적 사회 구조입니다. 차별은 문장에 빈칸 끼워넣기가 아닙니다. “인종”이나 “성별”이란 구분된 집단이 경우에 따라 이득과 손해를 보는 것이 차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글에 대고 혼자 화를 내고 있었는데, 눈 앞에 화를 낼 현실이, 정확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화를 낼 현실이 등장한 것입니다.

2.

문제는 이 현실이 현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현실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7살의 나를 성추행한 사촌을 계속 마주쳐야 하는 것, 내가 그를 고소하지 않은 것, 밤거리에서 누군가 내 엉덩이를 만진 것, 내가 욕만 하며 돌아선 것, 중학교 통학 만원 버스 안에서 내 엉덩이에 꼭 붙어서 무언가를 했던 치안,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그냥 얼른 도착해서 학교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나, 후배들을 불러놓고 원한다면 그 일자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허세의 선배가 내가 자원하자 여자가 갈 일은 아니라고 말을 흐렸던 것, 그 후 1-2년 동안 그 일자리에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을 기사로 접했던 것, 석사 졸업을 축하한다며 이제 공부 그만하고 결혼하라고 했던 노교수, 그 자리에서는 웃어넘긴 나…

너무나 흔한 서사이며, 모두가 겪은 일들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심한 피해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화는 언제나 후자에 가닿습니다. 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무언가 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렇게 피해를 나열하고 전시하는 것을 즐기고, 이 화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3.

의심은 끝이 없습니다. 피해자의 위치에서 화를 내면서, 사실은 지배집단으로서의 자신을 각성해야 한다는 의심에 시달리죠. 저는 글에서 장애차별을 예로 든 적은 없습니다. 저시력 장애인을 위해서 설치된 육교의 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고 투덜댔을 때가 기억납니다. 가해집단의 위치로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죠.

피해자의 위치는 언제나 히스테릭합니다. 차별이 차별인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주장해야 하고, 지배집단의 구분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내가 그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입니다. 차별은 차별의 결과가 차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다른 이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리적’ 주장을 합니다. 그 ‘합리성’의 반대편에 피해자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이것이 차별인지, 망상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의심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의심을 멈추면, 괴물을 들여보다가 괴물이 되어버릴 뿐입니다.

4. 나의 분노는 비이성적입니다.

우선 나의 분노는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전한 내 방에 앉아있지만, 저 모든 공격이 나를 향한다는 망상에서 화를 냅니다. 나를 개인이 아닌 특정 집단으로 치환하는 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입니까. 나는 집단이 되고, 저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사건들로 확장됩니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분노가 무엇을 해결하지도 않기 때문에,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 분노가 내 탓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합니다. 난 내 개인의 현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화를 내기 위해 핑계를 찾는 걸까요? 아니면 내 분노를 긍정해볼까요? 그런데 분노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표출하나요? 이것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펼칩니까? 분노를 원동력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다. 이미 그 의지는 분노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분노하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습니다. 분노하기 때문이 아니라,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분노는 의지의 원동력이 아니다. 분노는 나를 갉아먹고, 나를 슬프게 할 뿐입니다.

 

사실은 내 분노가 합리적이라고 정당화하고 싶어서 글을 시작했습니다만,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분노를 떨쳐내지 못하고 4일째 감당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문제가 맞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이 분노와 우울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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