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정신병자

1990년 발표된 세계보건기구의 질병분류목록 10차 개정판은 정신질환 항목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는 진보를 이루었다.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Biphobia, Intersexism; IDAHOBiT)의 연원이다. 하지만 이 목록의 “정신 및 행동 장애”의 하위 항목 중에는 “성정체성 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가 남아 있었다.1

어제 30년만의 전면 개정을 거친 11차 개정판이 발표되었다.2 정신 질환 목록에서 이 항목이 삭제되었다. 대신 “성적 건강에 관한 상태”라는 항목에 “성별 불일치Gender Incongruence”라는 세목이 신설되었다.  미국 정신의학 협회의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의 5차 개정3 당시에도 거론되었던 이 용어는 “개인이 경험하는 성별gender과 지정된 성별sex 사이의 두드러지고 지속적인 불일치”로 정의된다.4

항목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바뀐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의료 지원 등 실질적인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선해할 수 있겠다. 스스로가 원하는 성별로 살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 성별’로 교정하려 드는 사회적 시선을 반영해 정신 질환으로 분류해 온 것을 철회한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이 분류가 일상 속에 자리 잡는다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낙인도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는 어떤 상태 혹은 조건에 가해지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 그것이 정신 질환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정신질환 일반에 대한 낙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또한 필요할 것이다. ‘몸을 잘못 타고난 사람’과 같이 (티나지 않게) 트랜스젠더를 병리화하는 수사까지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병이건 아니건, 원하는 모습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지원하는 체제가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이따금 생각한다. 내가 정신병자인 것은 아닐까, 를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정신병자이건 아니건, 바뀔 수도 없고 바꿀 생각도 없으며 (사회가 바뀌면) 생활에 지장도 없는 이 나의 상태를, 어떻게 안전하게 유지하며 살 수 있을지를 말이다. 나를 정신병자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부질 없는 치료를 시도하는 대신, 정신병에 대한 낙인을 없애는 운동에 힘을 보탤 테다.5

  1.  http://apps.who.int/classifications/icd10/browse/2016/en#/F64
  2. 사전 정보 공유를 위해 온라인에 발표된 것으로, 정식 공개는 2019년이다.
  3. 이 편람은 최종적으로 “성별 위화감Gender Dysphoria”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http://wanbyun.org/archives/5550 참조.
  4. https://icd.who.int/dev11/l-m/en#/http://id.who.int/icd/entity/411470068
  5. 이곳에 나는 몇 번인가 성소수자성과 장애를 연결해 생각한 단상을 끼적인 적이 있다. 그래, 나는 정신병자다, 라고 맞받아치는 데에서 비롯되는 어떤 효과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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