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과 안생

자의든 타의든 힘을 빼고 보낸 2018년. 결산할 것도 없다. 대신, 좋았던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이라도 남겨보고 싶어졌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SoulMate, 2017)

칠월과 안생이라는 원제처럼 영화는 두 여성의 삶, 특히 그들의 관계에 대해 담고 있다. 칠월과 안생은 서로를 아끼면서도, 몇 가지 희미한 사실들(가장 크게는 칠월의 약혼자 가명이 안생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계기로 계속해서 어긋난다. 영화는 안생이 칠월과는 별개의 삶을 살고 있는 현재 위에, 칠월이 연재하고 있는 인터넷 소설 ‘칠월과 안생’을 불러오면서 시작한다. 둘은 처음부터 서로의 그림자였다고 고백하는 소설을.

그들은 떨어질 수 없으면서도 줄곧 서로의 등 뒤에 있었다. 안생이 칠월을 처음 떠난 이후, 그들은 인생에서 떨어져 보낸 시간이 더 길다. 안생이 떠날 때, 칠월은 그날의 상처에 대해 이렇게 쓴다. 나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실망했다고. 나 자신만큼 안생을 사랑하지 않아서 안생을 잡지 않았고, 떠나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칠월은 실망한다. 아무리 가까워도 그들은 서로가 될 수 없고,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못 견디는 시기를 통과한다. 나는 나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안생은 칠월을 떠났다. 그날 안생이 걸고 있던 목걸이는, 사소한 비밀은, 칠월과 안생 사이에 생기기 시작한 틈이 앞으로 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질 거라는 한 가지 증거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칠월의 삶과 안생의 삶은 갈림길에서 나뉜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해 완전히 다른 개성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칠월이 가명에 대해 처음 말할 때 안생이 예감하듯이, 칠월은 당연히 정착하는 삶을, 안생은 떠도는 삶을 시작하고 좀처럼 그들의 인생 경로는 겹쳐지지 않는다. 아니, 서로 충돌하고 밀어낸다. 그들은 그것을 모른 척하는 대신, 모처럼의 재회를 망치면서, 또는 칠월의 약혼자 가명을 경유해서 갈등을 폭발시킨다. 너는 편하게만 자라서 모른다고. 내가 사는 방식을 무시하지도 비웃지도 말라고. 아니, 네가 엽서에서 꼬박꼬박 가명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던 건 내 묵인 덕분이라고. 가명은 촌스러운 내 속옷을 더 좋아한다고. 그들은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외면하고, 악을 쓰다가 다시 서로를 떠나기를 반복한다.

버려진 아이였던 안생에 비해 칠월은 넉넉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칠월의 가족은 칠월이 모범적으로 자라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곧 칠월이 추구하는 삶이다. 칠월이 가명을 첫 남자친구로 고를 때, 칠월의 부모가 가진 기대(좋은 남자를 만나 늦지 않게 결혼하고 평범하게 살 것)는 바탕에 깔린 기준이고, 가명은 정말로 결혼에 충실할 것처럼 보이는 상대였으며, 안생이 거듭해서 자신을 떠나기 전까지 칠월은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의 삶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으니까. 칠월이 파혼당한 후 칠월의 어머니는 칠월에게 말한다. 여자의 삶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안생처럼 살 수도 있다. 칠월의 주위사람들은 모두 안생을 좋아했다. 꾹 눌러서 채운 것 같은 칠월보다, 여기저기 푹 패여있는 것 같은 안생에 눈길을 빼앗겼다. 즉흥적이고, 겁 없이 맨몸으로 세상에 부딪치는, 가방 하나 매고 어느 날 저 멀리 땅끝까지 떠나버릴 수 있는 안생에게. 그렇지만 칠월도 알고 있다. 칠월의 가족이 안생에게 따뜻해도 그들은 안생의 가족이 될 수는 없다. 가명이 안생에게 준 것 역시 반지(약속)가 아니라, 그가 아끼는 것이긴 하지만, 목걸이(마치 숨겨진 마음 같은)다. 안생이 용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안생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안생이 훌쩍 떠날 수 있는 건 아무도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잡으면 가지 않겠다고, 안생이 말했지만 칠월은 잡지 않았다. 그래서 안생은 자기를 사랑해줄 것 같은 사람이면 아무나 따라서 계획없이 떠났고, 이내 혼자 수년을 정처없이 여행했다. 안생이 아무리 빛나도, 그건 안생에게 좋은 양식이 아니다. 안생의 삶은 자유롭지만, 그건 안생이 원한 자유가 아니다.

칠월에게도 이전까지는 한 가지의 삶만이 있었다. 안생과는 정반대의 삶. 그래서 칠월은 주어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해 뿌리내리려 했다. 가명과의 결혼 역시 대학과 회사 같은, 평범한 삶의 필수조건이다. 칠월이 파혼을 택할 때, 그래서 자유로워졌을 때, 칠월의 어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여자는 삶의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그 말은, 마침내 칠월이 하나 더 선택지를 갖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안생이 항상 돌아오고 싶어한 것처럼, 그러나 그 이유를 몰랐던 것처럼, 칠월은 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떠난다. 안생을 가장 많이 사랑한 건 칠월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를 넘어서는 사랑이기 때문에, 칠월은 안생에게까지 날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소설은 그들이 이제 남은 인생을 맞바꾸었다고 말하며 끝맺는다. 둘은 드디어 자기의 삶을 살려 하는 것이다.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칠월이자 안생이 되어.

한 여성이 정말로 원하는 삶을 찾고 택하고 거기까지 나아가는 데는 긴 여정이 필요해서 때로는 일생을 써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다. 나는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 없는 스포츠 축제 – 2018 퀴어여성게임즈

 


2018 퀴어여성게임즈 (2018 Queer Women Games)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 6.17 (일) AM 9:00 – PM 6:00 
  • 서울 은평구민체육센터 대체육관
  • 준비물 : 운동화(필수), 개인컵, 간식 또는 도시락
  • 후원 : 국민은행 069101-04-157450 (예금주: 언니네트워크)

 

2018 퀴어여성게임즈는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성평등한 스포츠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서로의 용기를 더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성/성소수자 스포츠 동호회가 모여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스포츠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체육활동에서 배제됐던 역사를 가진 여성과 성별이분법적인 스포츠계에서 성별검사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던 성소수자가 구분 없이 한자리에 모여서, 스포츠를 매개로 성평등이 무엇인지 질문하고자 합니다.

여성/성소수자 스포츠 동호인과 성평등한 스포츠에 관심있는 모두가 함께하는 아마추어 대회입니다. 정식종목인 배드민턴, 농구, 계주 뿐만 아니라 스포츠 경험이 적은 참가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 경기(박터뜨리기, 자유투 대회 등)와 축하공연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세요.

 

 

2018 퀴어여성게임즈(Queer Women Games)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드디어 체육대회다!

2018년 6월 17일(일)

5월부터 참가자 모집이 시작됩니다.
페이스북 업데이트를 확인해주세요.

주최/주관
퀴어여성네트워크
📢  facebook.com/queerwomen
📧  queerwomenkr@gmail.com

* 퀴어여성게임즈는 2017년 개최될 예정이었던 퀴어여성생활체육대회의 새 이름입니다.
* 이 사업은 한국여성재단의 2018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제목 없는 글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일하는 기관의 입장이 아니라 전적인 나의 생각으로, 공개적으로 글을 쓴 적은 처음이다. 온라인에 내 경험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난 미투를 할 수 없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것이다. 친구도 그런 의견이다. 말하지 말고 쓰지 않는 게 낫다. 그렇지만, 고소당하는 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불리할 것이다. 내 경험은 어떤 류의 폭력으로도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 몸을 평가한 사람이 남성이었다면, (성별에 대해 말하지 않고 통화했던 한 성폭력상담소 상담원의 말처럼) 내가 몹시 불쾌했으니 ‘성희롱’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둘 다 여성이니까, 그렇게 절대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여성단체도 내 제기를 무시했으니까.

그럼 뭐라고 해야 했을까? ‘저 사람이 남성이었으면 의심의 여지없이 성희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라는 말 말고,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그 사람이 레즈비언이었으면 성희롱이라고 생각했을까? 웃기다. 내 기분이 나빴으면 성희롱이라고 모두가 말했지만, 이성애자 기혼여성이 내게 한 몸매평가는 내 기분이 나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성적인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내게 몹시 심각한 의미를 초래했는데. 어떻게 더 성적인 의미가 있어야 하지?

그래서 더 기분을 표현해야 했을까? 더 울고?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면, 불쾌하면, ‘상처 입었으면’ 피해라고 해석하는 대응이 싫다. 정당하지 않다. 그것은 ‘상처 입은’ 나약한 ‘여성 피해자’로 꾸미기를 요구한다. ‘기분이 나빴다니 사과’하는 어떤 가해자들의 사과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 단 한번도, 내 경험을 기분의 문제로 생각한 적이 없다. 분노는 성희롱에서 촉발된 것이지 분노가 성희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기분이 풀리도록 달래주면 되는, 또는 저절로 기분이 풀리게 되어있는,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 취급이라니. 사무실을 다 부셔버리는 건데, 아주 잘할 수 있는데, 무엇에 씐 사람처럼 얌전하게 진술서를 쓰고 또 쓰기만 했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최근 성폭력 사건들을 보며 그동안의 내 접근에 대해 생각했다.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해서, 나는 성별을 떠나서 성폭력상담기관에서 지원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 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답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를 향하는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공신력과 전문성이 있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통합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게 성폭력상담기관이라는 내 판단은, 내가 겪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다. 다르게 지원을 시작하더라도 종국에는 성폭력상담기관을 통해서 하게 되는 부분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동성 간 성폭력이라고 해서 ‘다르게 여겨져야만 할 이유도 없다’. 동성 간이라고 사소하게 생각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성소수자혐오로 인해 사건해석이 왜곡되거나 사건 자체를 특별히 더 끔찍한 것으로 규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여성들로부터도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주로 여성들 속에서 살아간다. 동성 간 성폭력이 전부터 숙제 같이 여겨졌는데, 그동안 어떤 진전도 하지 못했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다.

성폭력상담기관에서 시행하는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주위에 권한 적이 많지 않다. 일명 100시간 교육. 지난 몇 년간 주위에 꽤 권했지만, 그럼에도 성소수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내 지인 대부분에게 권한 적이 거의 없다. 왜였지?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친화적인’ 곳에서 하는 교육이라도, 성소수자와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해 3시간을 할애하면 많은 편이다. 섹슈얼리티 과목이 있더라도 이성애주의는 언급되지 않고 젠더정체성과 젠더표현도 다루지 않아서, 성소수자와 관련성이 없는 과목으로 보였다.

비성소수자들 틈에서 강의를 듣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그것이 자기를 열어야 하는 교육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만 내 이야기를 터놓을 수 없는 상황이 주는 소외감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기’가 가장 중요한 그곳에서 가장 입을 열기 힘든 사람 가운데 하나가 성소수자다. 아마도 그래서 선뜻 100시간 교육을 권하지 못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피해가 전부는 아니다. 누구나 성폭력 피해를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나’를 우리는 90% 이상 여성으로 알고 있고 상상한다. 내 경험을 피해로 해석하는 것이 나를 여성으로 드러내는 일이 되는,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고통스러운 젠더퀴어는? 수치심이 매우 ‘여성적’ 감정으로 여겨져 수치스러웠냐는 질문을 견딜 수 없는 피해자는? 불쾌했다면 성폭력이지만, 가해자가 여성이면 그렇게 무서울 것도, 화날 것도, 못 견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성상담원과 맞닥뜨린 피해자는?

난 반성폭력운동을 하는 곳에서 일했다. 그래서 내가 조금은 더 아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문제가 되자 난 무지했고, 아직도 내 경험을 뭐라 설명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성희롱인가? 또는 내가 이름을 찾지 못한 다른 괴롭힘인가? 그럼 조직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가? 나와, 내 동료와, 내가 했던 운동은 거기서 실패하기 시작했다.

남성 간 성폭력이 피해자의 남성성을 해치지 않는다는 위로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가 그 이후 ‘동성애자가 된’ 데 동성애혐오를 표출하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정강간’이 한국사회에서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교육에서 고민할 수 있고, 성폭력이 상대를 여성화하는 폭력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수치심’ 용어사용 배격도 필요하지만, 다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치심은 ‘여성성이 훼손된 감각’이 아니라 성적 존재로서의 내 자존감이 입은 상처일 수 있고, 내가 내 자신이기 때문에 갖는 감각 자체일 수도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동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지만, 모두에게 유용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의의 과정 자체가 타인에 대한 침해가 되지 않도록 훈련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성적 불쾌감’이 침해, 성폭력의 근거인 것이 적절한가? 그렇다면 성소수자의 존재만으로 불쾌함을 호소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계속해서 처벌대상으로 남게 되지는 않을까? 성폭력이 ‘젠더위계구조’ ‘젠더권력’으로 발생한다고 설명되어 왔는데, 동성 간 성폭력이 이와 같거나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다르다면 그건 무엇인가?

다른 누구보다 성소수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하지 못했다. 이제라도 같이 100시간 교육을 수강할지 고민했다. 이에 대한 주위의 의견은 다양했지만, 나는 우리가 더 많이 같이 배우고 토론했으면 좋겠고, 당연히, 100시간 교육도 유용하다. 기본을 검토해야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공감하거나 비판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서 공감과 비판은 그렇게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몰라서’ 생기는 게 아니라(잘 아는 단체는 잘 알기 때문에 피해자의 입을 효과적으로 막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고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필요한 건 ‘재고하기’다.

평등을 지향하는 과정은 사회가 규정하는 ‘성적 불쾌’를 삭제하는 과정이 아니며, 우리의 가장 큰 힘인 유머감각을 잃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름 아닌 바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힘껏 평등해야 한다.

[웹진 글로컬포인트 4호] 동성애만 범죄가 되는 한국

대선 TV토론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후보는 ‘동성애에 반대’했다. 그리고 사과 명목으로 ‘군대 내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다시금 말했다. 그것은 군형법상 추행죄 존속에 한 표를 행사한 것이고, 동성애 범죄화에 ‘찬성’한 것이다. 홍준표는 의기양양하게 ‘동성애자 엄벌’을 말했고, 곧 수년 간의 군형법상 추행죄 적용사례를 웃도는, 대대적인 동성애자 군인 색출 사건이 불거졌다. ‘야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인권침해 사건이.

동성애라는 성범죄

군형법 ‘제15장 강간과 추행의 죄’는 군형법상 추행죄(군형법 92조의6)를 제외하면 모두 성폭력범죄다(92조 강간, 92조의2 유사강간, 92조의3 강제추행‧준강제추행 등). 군형법상 추행죄는 강간도, 유사강간도, 강제추행‧준강제추행도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2013년에 남인순 의원이 대표발의 한 군형법 일부법률개정안은 당시 ‘계간이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현행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앞에 ‘의사에 반하여’를 삽입하는 것이었는데, 기존의 군형법상 강간이나 강제추행과 변별성이 없다는 이유로 통과되지 않았다.

군형법상 추행죄는 동성애를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라고 보고,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를 보호법익으로 한다(대법원 2008도2222). 따라서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하여 그의 인격권을 짓밟는 모욕적 언행을 일삼고도 개의치 않는다. 사회가 주장하는 가치를 수호하는 것(성적 순결, 가족 이데올로기, 군 기강, 사회질서, 국가이익, 경제 활성화……)이 인권침해를 정당화 하고, 이성 간 상당수의 성폭력은 ‘나쁘지만’ 용납되는 동시에(낮은 기소율과 처벌률), 동성애는 성범죄가 된다.

이제 겨우, 강간이 ‘가정파괴범죄’ ‘정조를 빼앗는 일’이던 시절을 건너 성폭력은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말은 할 수 있는 시대에 당도했다. 그것은 여성이 여성답지 않게 밤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사람을 강제입원 시키지 않아서 강간이 ‘일어날 만했다’고 말해지는 것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성폭력 공포 조장이 소수자 통제‧처벌의 수단으로 쓰이지 못하게 막는 것은 반성폭력운동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처벌하지 않아서(처벌법이 미비해서)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성폭력이다. 반성폭력운동의 급선무는 법제도 보완 이전에, 법 집행자들의 호모포비아 극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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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쓴 것 같은데 10월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 웹진을 통해 발행됐다.
완전변태스럽게 쓴 글 같아서 여기에 올려둔다. 늘 그렇듯이 거칠고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