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논란을 일으킨 윤김지영의 글에 대한 답글을 쓸 것을 요구받았다. 글 빚이 있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쓰기는 해야겠는데, 계속 의문이 든다. 이 글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개입해야 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써야하는 것일까? 이분법을 거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논의 지형을 평평하게 만들어버린 이 글에 굳이 삐질삐질 비집고 들어가서 답을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지금 밀린 일들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 상황에서 내 시간을 들여가며 글을 쓴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동시에 윤김지영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을 쓰고 싶었다. 따라서 이 글은 윤김지영의 글에 대한 답글이면서 동시에 답글이 아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었지만 계속 여러 가지 이유로 미뤄두고 있었던 이야기다.
-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이 급진적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막말과 급진은 동의어가 아니다.
1. 퀴어와 페미니스트
나에게 퀴어와 페미니스트는 최소한 이 둘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하나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느낌이자 감각이지 하나로 가볍게 퉁쳐질 수 있는 정치적 입장, 이론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남성 페미니스트이자 남성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될 수 없었다. 남성이니까. 나는 퀴어가 될 수 있으면서 될 수 없었다. 남성 동성애자이니까. 하지만 ‘여성’으로 주체를 바꾸면 문제도 바뀌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나는 퀴어인가? 라는 질문은 여성 젠더로 자신을 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페미니즘도, 퀴어도 존재의 양식이 아니라 행위 혹은 실천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거대하다면 거대한 담론 덩어리 내부에는 다양한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들 사이에서 각 행위자는 서로의 위치에서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다. 소위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처럼 말이다. 그렇다. 불운하게도 이것도 페미니즘이다.
다양한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가 되지 않는다. 퀴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충분히 퀴어적이었다가 다른 지점에서 과도하게 규범적이기도 하다. 이런 끊임없는 진동, 교차, 그리고 횡단들 사이에서 결국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내가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나가 아닌 다수의 방향성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그리고 퀴어임을 확인하고 검토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실패도 하면서 말이다.
1-1. 한 가지 재미있는 내 삶의 경험 중 하나는 많은 비성소수자 페미니스트들이 퀴어라는 것을 탐해왔다는 것이다. 퀴어 이론 혹은 담론을 접하는 순간 시스젠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는 자신의 ‘부족함’, 혹은 ‘규범성’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치에서 당연하게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내가 만났던 많은 시스젠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했다. 소위 어느 정도 규범적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퀴어됨을 욕망함을 목격해왔다. 물론 이들은 페미니스트이기에 단순히 젠더 역할에 자신을 구속하거나 젠더 표현을 언제나 ‘특정 젠더’에 묶어 두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을 느끼며 퀴어가 될 수 없음에 잠시나마 좌절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당시에 동감하면서 동시에 화가 나고는 했다. 동감의 지점은 내가 그런 종류의 부족함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화가 났던 지점은 퀴어라고 하는 하나의 이름을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이 빼앗아가려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 퀴어가 성소수자와 동일한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국적 맥락 때문에 더욱 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성소수자와 퀴어는 동일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윤김지영의 글에서 페미니스트 여성은 퀴어가 될 수 있는데, 퀴어는 페미니스트 여성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왜 ‘여성’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동시에 이 일방적 관계가 이전의 목격들을 상기시켰다.
2. 여혐게이와 연대할 것인가?
비판적 연대 혹은 지지라는 이름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연대는 하지만 언제나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는 않겠다는 그런 방식의 연대였다. 윤김지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체적 연대라는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하면 된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연대는 그 누구와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만나지 못할 개인 혹은 집단은 없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연대할 것이며, 무엇을 이룰 것인가가 다루어져야할 중요한 논의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지점 중 하나는 연대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른 가치, 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관계를 만들고 협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연대다. 그리고 이런 연대에는 언제나 소동이 있어왔다. 논쟁과 다툼은 필수적이었으며, 상대방을 설득해 서로 간의 차이를 좁히거나 최소한 차이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 이것이 연대의 부수적 효과이자 목표 중 하나였다.
연대는 만남이었고, 만남을 통해 서로 간에 변화를 촉구하는 적극적 정치 행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위험한 행위이기도 했다. 많은 연대가 “이것이 연대란 말이냐?!”라는 외침과 함께 중단되었던 것은 특정한 가치 혹은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는 위계적 질서가 현장에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연대는 적극적 투쟁이기도 했으며, 협력과 비판은 언제나 긴장 관계 속에서 현장에 공존했다. 그렇다면 연대의 거부는 무엇일까?
2-1. 연대의 거부와 비판, 그리고 낙인
연대 거부는 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페미니즘과 관련 없이 올바르지 않습니다만, 올바르지 않다는 말은 부족하네요.” 연대 거부는 이것을 일종의 비판 전략으로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략적으로 논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보아야한다. 성소수자의 인권이다. 특정한 사람의 인권이 보호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가 흥정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올바르지 않음’이라는 비판이 ‘낙인’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슬퍼지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슬퍼지는 것은 ‘낙인’이라는 말이 연대 거부에 대한 비판이 갖고 있는 함의를 삭제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며, 동의하는 지점은 ‘올바르지 않음’이라는 표현 또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맥락과 관계들을 가볍게 퉁쳐버리는 발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욱 정교하게, 혹은 길고 길게 비판할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말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소수자 정치의 필수요건 중 하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말이다.
연대를 하는가, 안 하는가는 어찌되었든 선택이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 또한 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들, 혹은 단체들은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지 않는다. 성명서만 발표하고 그치거나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대 거부 발화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것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연대 거부 발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연대가 존재하기는 했는지, 연대할 의지가 이전에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해당 운동이 갖고 있는 의미가 자신들의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위계를 선언한다는 점이다. 이전에 페미니즘 운동이 수많은 연대의 자리에서 마주했던 그러한 위계를 말이다.
3. 여성혐오와 게이 문화
게이 문화가 여성혐오적인가? 그렇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화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게이 남성은 세상이 여성을 혐오하는 만큼 여성을 혐오한다. 세상이 여성을 혐오하는 만큼 여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것뿐일까? 그렇지 않다. 게이 문화가 지니고 있는 갈등적 위치는 그렇기에 더욱 중요하며,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가볍게 여성혐오라는 이름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단어들, 대표적으로 ‘년’ 혹은 ‘끼순이’가 갖고 있는 함의는 여성비하적이면서 동시에 남성비하적이며, 특정한 젠더에 자신을 고정할 수 없는 게이 남성의 갈등이 드러난다. 남성 동성애자는 남성으로 간주되지만 남성을 욕망한다. 이 말은 단순히 남성이면서 남성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점 혹은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성을 욕망한다는 것은 게이 남성을 남성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동시에 남성으로 간주되기에 여성이 될 수 없는 모호한 위치에 게이 남성을 위치시킨다. 그렇기에 ‘년’ 혹은 ‘끼순이’가 단순히 게이 남성 내부의 여성성이 발현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좁혀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소위 남성성/여성성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젠더이분법에 기초해 있으며, 이것만으로 세상이 나뉠 수 있다고 믿을 때 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여성 젠더로 간주되는 표현들인가? 그리고 왜 하필 비하적 언어인가? 타자의 원형이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추방된 자가 자신을 부를 수 있는 방식이 ‘비하적’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때 타자의 원형으로서의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으로 불리지만 여성이 아니며, 오히려 여성이 그만큼 지울 수 없는 위치에 있기에 최소한 경계에 남을 수 있었던 여성을 포함한 다양한 타자들의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타자는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어딘가로 이미 추방되어버렸기에, 이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이름을 빌려야만 했던 것이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멸칭이 여성비하적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이런 이유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하적 언어인가? 비하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추방된 자기 위치성에 대한 확인이자 동시에 그 위치성에 대한 긍정이기 때문이다. 수치의 확인과 자기 긍정의 언어는 동시적일 수 있다. 두 감정 자체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게이 문화 내부의 여성 혐오적 코드는 퀴어적이면서 퀴어적이지 않다. 단순히 특정될 수 없는 지점을 방황하는 언어라는 점, 이런 발화들이 지니고 있는 기존 젠더에 대한 위협과 해체적 의미에서 퀴어적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와 타자라는 위계, 남성과 여성이라는 권력관계를 이용하고 있기에 퀴어적이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 퀴어적인가, 아닌가를 단 한 순간, 한 지점으로 고정한 채 판단내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선일 것이다.
3-1. 그래서 여성혐오인가/아닌가
성소수자 혐오라는 비판을 낙인이라 부른 윤김지영과는 다르게 여성혐오라는 비판을 낙인으로 부를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정당한 비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맥락을 삭제하는 것이라고 지적은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야할 지점들이 분명 존재함에도 여성혐오인가/아닌가라는 질문만이 끝에 남는 현재 상황이 불만족스러울 뿐이다.
여성혐오인가/아닌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여성’이 질문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이 혐오당하고 있는 것인가? 그 여성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이 충분해지지 않는 한 나는 이런 질문 구도에 계속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게이 문화 내부의 여성비하적 언어는 젠더이분법으로는 제대로 포착할 수 없는 지점에서 작동하고 있는데, 그 지점을 놓치고 가는 것은 내 경험을 삭제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나는 이런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네, 여성혐오적입니다. 그렇지만… 블라블라” 우리는 말이 더 많아야 한다. 더 많은 말 속에서, 말들의 교환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3-2. 하지만 역시 남성 동성애자들이란..
하지만 역시 게이 남성 문화는 여성혐오적이다. 세상과 마찬가지 수준이라고 하지만, 게이 남성이기에 더 열 받는다. 어떻게 소수자로서 차별과 비하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둔감할 수 있는지, 그 점이 언제나 날 열받게 한다. 그리고 이런 이들과 내가 같은 이름으로 묶인다는 점도 화가 나게 만든다.
변화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 속에서 게이 문화라는 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런 고민과 담론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는 점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여성혐오인가/아닌가, 그래서 사용 가능한 언어와 사용 불가능한 언어를 나누는 방식의 접근에는 동의할 수 없다. 게이 문화 내부의 파열지점을 드러내는 것, 나는 그것이 더욱 중요하며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456789..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새벽이고,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은 글에 대해 빚 때문에 쓰는 것이니까 이정도로 줄이겠다. 다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여성혐오/성소수자 혐오라고 하는 단순한 이름 붙이기가 현명한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한다는 것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우리를 어찌되었든 서로 만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찌되었든 말이 많아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