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기 출판 기념회!

<어떤 일기 vol.1> 출판기념회 - 클릭하면 다운로드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이미지 속 텍스트 –시작]

(바위 위에 앉은 후광 비치는 사람 사진과 <어떤 일기 vol.1> 표지 이미지)

독바위에  올나 앉아
일기 쓰기를 마치니
문득 휘황한 빗치
하늘을 뒤덮으메
평생을 일기 쓰던
노나메는 사라지고 업더라

2010년 8월 22일 오후 3시
<어떤 일기 vol.1> 출판 기념회
at 홍대 미용실 까밀라 / by 위탁판매자 완전변태

ticket : 10000원 + 당신의 일기 한조각

작가 약력

-출생
-독바위 등반
-일기 작성
-행방 묘연

프로그램

+일기 낭독회
+작가 사인회
+축하 공연
+먹고 마시고

문의

wanbyun.org
wanbyun@wanbyun.org

*독바위는 ‘장독을 닮은 바위’라는 뜻으로, 서울 지하철 독바위역과는 무관합니다.

*노나메 씨는 완전변태에 일기만을 전달한 후 행적을 감추셨기에,  완변에게 아무리 물으셔도 인적사항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사진은 노나메 씨와 무관합니다.

[이미지 속 텍스트 — 끝]

[어떤 일기 vol.1 – 가만히 앉아 있다]

독바위에서 일기 쓰시는 노나메 씨의 20년 인생이 담긴 <어떤 일기 vol.1 – 가만히 앉아 있다>를 공개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pdf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종이책으로 보고 싶으시면 완변에 문의해 주세요. 완변에서 위탁 인쇄/판매를 맡고 있습니다. 찍어 놓은 거 엄청 많아요. 참고로, 진짜 일기에요, 선생님 멘트가 달린 학창 시절 일기 포함.

 


어떤 일기 vol.1 커버 이미지

우리들과 그들

영등위는 에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렸다. 김조광수 감독은 청소년들이 볼 수 있게 하려고(청소년 관람가 판정을 받으려고) 섹스신에서 팬티도 입혔고 엄마도 등장시켰다며 어이없어 했다. 커밍아웃한 게이 감독으로서 이런 일에 항의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찬 바람이 불었다. 법원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김조광수 감독은 영등위 판정은 명백한 동성애 차별이라고 선언했다.

법률 지원을 맡은 변호사가 나와서 법적 해석을 제시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할 것 같습니다, 에게 이게 뭐야(섹스신이 약하잖아) 하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좀 낯설거나, 불편하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낯섦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역시 낯선 내용이었지만, 그들(동성애자들)이 우리들과 …

거기까지만 들었다. 변호사의 감상도 더는 듣지 않았고, 법적 해석도 듣지 않았다. 나는 그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낯설어 하지도 않을 것이고 실망하지도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변호사가 입에 담은 ‘그들’에도 ‘우리들’에도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변호사의 양 옆에는, ‘그들’이 서 있었다. 변호사는 자신의 일행을 모두 떼어 놓고, 다른 어디에선가 ‘우리’를 만들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변호사 역시 ‘그들’에 속하는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 알고서도, 남의 말을 따라 그렇게 나누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에도 ‘우리들’에도 나는 없다는 사실이고, 변호사에게 ‘우리’였어야 할 사람들은 한 순간에 ‘그들’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쩌면 단순히 영화 속 인물들만을 묶어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자리에 ‘의미 있는 낯섦’으로 그 영화를 받아들일 사람들은 없었음을 또한 나는 안다.

나는 망했나?

나는 망했나?

연애세포가 요즘 쪼끔~살포시~ 두근두근~ 피어오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 주변에 연애하고 싶은, 연애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조차 없다. 생각해보니 이건 여성주의 탓이다. (꺄~) 여성주의를 익히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는야 남성! 마초! 멋쟁이! 음하하하!”하는 인간들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떤 의미에선 약간의 혐오와 경멸마저 지니게 되어버렸다. 뭐.. 여성주의를 익히기 전에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연애의 가능성 정도는 어느 정도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철회한 정도? 무슨 못볼 꼴을 보려고…덜덜.

그러다보니 그냥 소위 게이사회와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 게이들을 찾기도 사실 쉽지 않았고 이런 멀어지는 과정에서 진정 리얼 마초는 역시 게이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성의 생존과 행복은 자신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닐 수 있는 집단이니까. (물론 꼭 그런 것도 아니고 알파걸을 비롯한 여성 마초도 많다. 그냥 내가 데인 게 많아서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된 것이겠지.) 종로와 이태원을 안 간지 백 만년.. 가더라도 나는 레즈비언 언니들과 함께 갔다. 이태원의 클럽을 가도 언니들과 노느라 바빴다. (그게 더 재밌고 편했으니까) 그랬더니 옆의 레즈언니들이 나보고 귀엽단다. ;a; 심지어 요즘 내가 너무 멋져!라며 나름 심각하게 하악대는 사람들도 간지부치언니들이다. ‘a’~랄라. 난 망했듬….

그래서 장난삼아 여성주의 땜에 난 망했듬.. 이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장난삼아이다. 여성주의는 나에게 현실을 보여준 것뿐이다. 현실을 보여준 게 죄는 아니잖아. 그걸 볼 수 있음에도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나쁜 거지. 아.. 나와 연애할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언제나 노력해서 피곤에 쩔은 인간 어디 없나..

아 – 그리고 아까 말한 멀어지는 과정에서 중학교 때부터 쌓아올린 나의 게이 정체성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요즘은 “나 게이야”라고 말하기 껄끄럽기 조차 하다. 그 말이 왠지 나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소위 게이 사회내의 문화를 나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고 견디기도 싫은데 한꺼번에 묶여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싫어졌다. 그래서 다른 말을 찾고 싶은데.. 찾기는 힘들고 찾아야 되나 싶기도 하다. 그냥 ‘나‘면 안 될까? 안 되겠지?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또 다시 풀어내고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아마도. 그래. 망했다.

남성들 간의 스킨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해석당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이대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겉으로 보기에) 이성간의 스킨쉽 대부분은 매우 쉽게 에로틱한 영역에 빨려들어간다.

반면 동성간의 스킨쉽은 어떤 방식의, 누구에 의해 일어나는 스킨쉽이냐에 따라 다른 해석들이 경합하기도 한다.

군대를 오는 스킨쉽을 좋아하는 게이들에게 팁을 주자면,

1. 일단 남성간의 스킨쉽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남성들간의 가장 쉽게 용납되는 스킨쉽의 종류에는 어깨동무(긴 시간은 무리), 뒤에서 한번 풀어보라며 꽉 껴안기, 주물러주기, 간지럽히기, 손아귀 세게 잡기, 서로 레슬링을 하며 뒹굴기 정도가 있다. 장난의 맥락에서 통용되는 스킨쉽들이다. 장난과 괴롭힘의 아슬한 경계에서 “공격”의 의미로 성기를 친다거나 뽀뽀를 한다거나 하기도 한다.(때리고 도망가는 거랑 비슷하다.)

그 다음으로 사람에 따라 살짝 긴장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 만한 스킨쉽으로 팔짱끼기, 어깨에 머리 기대기, 손잡기, 엉덩이 찰싹 때리기, 머리쓰다듬어 주기 정도가 있다. 대부분 긴 시간은 무리다. 치고 빠지기를 자연스럽게 해야 된다.

마지막으로 상대를 잘 골라가며 해야되는 스킨쉽으로 주변에서 조금 이상하게 볼 수 있다. 오랜시간 껴안고 있다거나, 이부자리하고 누워 있는데 위에서 덥치기, 살 만지작만지작 거리기.

이보다 수위가 높은 것들은 다루지 않겠어요.

2. 계급관계, 권력관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후임이 선임에게 하는 말은 진실할 수가 없다. 선임이 듣길 원하는 말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워낙에 권력관계가 계급에 따라 철저한 곳이다 보니. 선임에겐 장난이 후임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 후임은 싫어도 싫다고 못하고 강제로 웃으면서 놀아줘야 하니까. 그렇기에 후임에게 하는 스킨쉽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폭력이 될 수 있다. 개인이 아무리 동등한 관계를 후임과 만드려고 해도 군대 시스템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하지만 동기와는 권력관계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 장난이 장난일 수 있다. 선임에게 하는 스킨쉽도 상대방의 의사를 쉽게 알 수 있다. 불편하다면 곧바로 “꺼져!”라고 할 거다.

3. 커밍아웃은 스킨쉽의 해석을 힘들게 한다.

위에서 말한 대부분의 스킨쉽은 왠만해서 (진지하게) ‘동성애’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불편함(또는 두려움)을 불러온다. 알아서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다. 즉 모든 종류의 남성간 스킨쉽은 둘다 이성애자라는 가정하에서만 이해되는 범위에 놓인다. 워낙에 이성애중심주의가 쩌는 이 사회에서 “게이의 스킨쉽”은 매우 쉽게 ‘변태’의 영역에 쳐박힌다. 커밍아웃을 하고도 대놓고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전에 하던 스킨쉽을 그리 크게 거부하진 않을 거다. 그렇지만 오묘한 긴장이 새로 자리하게 될 거다. 그리고 아마 그 긴장을 게이가 좀 더 신경쓰게 될 것이다.  ‘어깨동무 이 정도하는 건 별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군.’ ‘뒤에서 껴앉는 건 조금 무리겠지? 몸이 경직될지 몰라.’ ‘얘가 이제 나한테는 (스킨쉽을 포함한) 장난을 안 치네.’ 등등.  사람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새롭게 잡히는(또는 계속 변하는) 스킨쉽 해석의 경계가 혼란스럽다. 


요즘 스킨쉽이 완전 고프다.

군대는 워낙에 권력관계가 쩌는데, 그런데서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나에게 불리하다. 게다가 난 서로 치고 박으며 장난치는 ‘남성적인’ 놀이문화에 익숙하지 못해서 불리하다. 스킨쉽을 하기가 불리하다. 그래도 한명 있다. 나보다 선임인데 스킨쉽을 좋아해서 어깨도 기대고, 팔짱도 끼고 그런다. 자주 볼 수 없어서 문제지. (자주봐도 문제다. 아마 서서히 ‘사랑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 댈 테니까.)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후임 한명이랑도 스킨쉽을 하고 싶은데, 이 아이는 호모포비아가 조금 있다.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내가 내 스킨쉽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무척 애쓴다. 난 주로 뒤에서 꼭 껴안고 싶을 때가 많다.(날 먼저 안아주진 않아서 일까?) 그 압박감, 따뜻함이 편안하다. 근데 이게 성욕인 걸까? 아님 그냥 친밀감의 표현인 걸까? 여자친구들이랑도 자주 껴안고 그걸 좋아하지만 (맘에 드는) 남자를 껴안을 때 더 좋긴 하다. 근데 그 감정의 차이가 싹뚝 잘려있지는 않고 이어져 있다. 이 친구를 안고 싶은 건 어디쯤 인 걸까? 100%친밀감이면 괜찮고, 성욕 충족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면 안되는 걸까? 이 친구는 어떤식으로 받아들일까? 자신이 성욕 충족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낄까? 너무 길게 ‘느끼는 듯이’ 안고 있지만 않으면 괜찮은 걸까? 

나”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게 이성애중심주의다. 나”만”에서 짜증나기도 하지만 이런 고민 자체는 재밌다. 완전 변태 같다.

사실 누가 좀 덮쳐줬으면 좋겠다. 근데 나이가 많고 내가 워낙에 만만한 포스를 안 풍기는 지라 그렇게 과감한 자는 없다. 아참. 내가 그냥 별로 안 땡길 수도 있구나.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