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있다

군대에 있다. 끌려왔다. 감옥은 더 힘들것 같아서 왔다. 군대는 싫다. 꼭 있어야 하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나라가 뭔데? 북한이 쳐들어올까봐? 이게 지키고 있긴 하는 걸까? 난 평화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군대가 싫다.

더이상 인간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무기로 다루어질 뿐. 내가 적용받는 법도 다르다. 헌법에 의해 우리는 민간인(인간)에게는 보장되는 권리들을 박탈당한다. 어디에만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두 정해져있다. 정치적 의사표현을 해서도 안되고,(사실 어떤 의사표현을 해도 안 된다) 외국에도 마음대로 못 나가고, “나가서 싸우다 죽어라”라고 하면 그래야 한다. 위반시 처벌받는다. 윗 대가리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유 따윈 묻지 말고. 건강한 꼭두가시를 원한다.

군대는 남성의 절대적 우위, 규칙, 계급 엄수, 맹목적 복종, 권위 존중 등과 같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모델이다. 군대는 체질적으로 여성을 혐오한다. 흔히 개인, 신체, 협조, 생명 존중, 동정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성은 군대의 규칙, 구조 목적을 파괴한다. «236쪽, 와카쿠와 미도리, 전쟁과 젠더-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특히 훈련소에서 강력하게 느꼈다. 군대가 살포하는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정상가족 이데올로기들. 그냥 “중심적”인 게 아니라, 성소수자를 성폭력가해 변태로 취급하고, 그들이 원하는 신체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병신이라 욕하고, 여성을 지켜줘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로 열등하게 만들고, 정상가족만이 ‘정상인’을 배출할 수 있다는 독설들. 군대만이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억압의 원인은 아니겠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매우 강력하고 적극적으로 차별/억압을 실천하는 공간임은 분명하다. 군대에 오는 20대의 권력을 가진 부모를 만나지 못한 비장애인 남성들. 그들은 분명 희생자다. 충분한 보상따위는 없다. 있을 수 없다.

국가와 공동체, 가족과 여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남자의 숭고한 사명이며 전쟁을 두려워하는 남자는 나약한 쓰레기라는 신화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남자 아니는 어릴 때부터 투쟁과 적의와 공포를 배우고, 힘과 승리를 추구하도록 길러진다.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이러한 인격을 형성한 남성들이며, 그들은 타인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타인이 자신의 이익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한다. 거기에 국가나 고향이라는 미명이 붙으면 남성들은 집단적 폭력을 무조건 시인하고 만다. 지금 부시 정권하의 미국에서, 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익 추구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집단은 타자와의 공존, 친밀한 관계, 평화 같은 다른 가치들을 나약한 것이라고 비웃는다. «256쪽, 위의 책»

보인다. 갇혀있는 이 곳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면 만만한 동네북이 되어 괴롭힘 당할까봐 떨고 있는 그들이. “남들 다 견딘 군대조차 못 버틴 낙오자가 될거냐”고 등 떠밀리고 있는 그들이. (뭐, 밀리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알아서 가는 이들도 있고, 신나서 앞서 달려나가는 이들도 있다.) “타자와의 공존, 친밀한 관계, 평화”와 같은 가치들을 내팽겨쳐야만 버틸 수 있음을 배우는 이 곳. 어느새 “나약함”이 되어버린 그 가치들은 이제 그들이 세상을 읽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구를” 지키는 것일까?

우리? 국민? 우리는 누구고 국민은 누구지?

리어든은 지금의 국제적인 안전보장 제도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그것이 ‘인간’이 아닌 ‘남성’ 중심의 개념에 서 있다는 것, 둘 째는 개인과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집단이 아닌 ‘국가’를 위한 안전보장이라는 것, 셋째는 진정한 안전보장이란 전 세계의 인간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지금의 안전보장은 국가 간의 분쟁이나 적대 관계만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편파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263쪽, 위의 책»

리어든이 묻듯이 “지금까지의 안전보장은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에 의한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었는가. 군사행동에 의한 환경파괴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거대 산업을 가진 국가가 그렇지 못한 지역의 환경을 파괴해왔던 것이 아닌가. 환경 정책을 세우는 데 기업의 편이 아닌 인간, 민간 여성이 어느 정도 참여해왔는가” “생활과 복지에 대한 공공 예산의 분배는 적절한가. 개발이 가져다주는 이익의 분배는 공정한가. 남녀 간의 자원 분배, 노동의 기회 균등은 실현되고 있는가. 경제활동과 개발에서 젠더의 차별은 없는가” “국가는 어떤 때 군사적으로 대응하는가. 국가 차원에서는 어떤 대책이 세워지고 있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군사적으로 대응할 때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이런 질문은 과연 “누구”를 지키는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나에게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난 이란에서 처형당하는 동성애자들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북한에서(그리고 남한에서) 굶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된 안전 설비 없이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군대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무엇일까?

‘국가는 상상의 산물이다. 현실적으로 불평등과 착취가 존재함에도 국민을 항상 수평적이고 깊은 동지애를 지닌 존재로 상상한다. 이 상상의 산물 때문에 과거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이 서로 죽이고 때로는 스스로 죽어간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는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층적인 다양성과 신분제도의 비등질성, 각각의 가정의 개별성을 부정하여 균질적인 개인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85쪽, 위의 책»

앤더슨은 “국민이란 마음속에 그려진 상상의 정치 공동체”라고 말했다. 그것은 국경에 의해 한계가 그어지고, 국경 너머에는 다른 국민이 있다고 여겨진다. 국민은 문화적 창조물이며, 출판 자본주의, 국어의 제정, 순례 등의 요인이 그 일체감을 유지, 강화해왔다. 물론 국기와 국가는 국민에게 내셔널리즘을 불어넣는 상투적인 수단이다.(……)”종교적 공동체가 세계의 세속화에 의해 사라져 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집단화해 국민으로 형성된다. 이 집단의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으로 생겨나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근대의 ‘종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내셔널리즘의 언설이 대량으로 발생하며, 사람들은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 패쇄된 내셔널리즘의 언설 공간이 젊은이가 국가를 위해 생명을 내걸고 전쟁터로 나가는 충동을 발생시키는 장이 된다. 이 장 안에 들어가면 언설에 불과한 정치적 허구가 자명하게 보인다. 장군들이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그들이 이 폐쇄적인 언설 공간의 외부를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셔널리즘의 선전에 등을 돌리는 것은 충성을 버리는 것이므로 때로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179쪽, 위의 책»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에서 “나라”는 국가를 말하는 건가? 나에게 “나라”는 조선을 연상시킨다. 일제에 침략당한 역사로 상상되는 나라. 독도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월드컵, 올림픽에서 상징되는 나라. 태극기. made in Korea, 세계수출 몇위의 한국. 지금 써놓은 것만 보자면, 국가/나라는 나에게 그리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나? 아! 군대. 이건 직접적으로 국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전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국가는 분명해진다.

군대 동원 방식-채찍과 당근

정말 거의 대부분은 군대에 오기 싫어한다. “남자는 군대에 가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군대에 이미 갔다왔거나,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당신이 가지 그래?”라고 하면 금새 말이 달라질 걸. 그러니 군대에 안 가려는 사람들은 감옥에 쳐넣고, “국민의 의무이기에/가족을 지키기 위해/여자친구를 지키기 위해/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진짜 사나이가 되기 위해”서라며 억울함을 잠재우려 한다.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전쟁론>에서 이제는 옛날처럼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으라고 젊은이들을 선동한다. 그는 ‘개인을 넘어서는 용기와 긍지’라는 장에서 젊은 남성들에게 묻는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그리고 원피스를 입은 10대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남자하고만 결혼해야 한다.” «99쪽, 위의 책»

훈련소에서 고무신들이 보내온 영상편지를 모두에게 보여주는 시간이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이상화된 ‘여자친구’를 통해 이 고생을 보상받고 싶게 한다. 스파르타처럼 동성애를 군대에 적극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전쟁시 더 열심히 싸우고 군생활도 즐겁게 하지 않겠습니까? 아님 같이 손잡고 도망가려나? 하긴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두고 싸우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동원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구로부터” 지키는 것일까?

1차 세계대전 초기였던 1914년 크리스마스 때 영국군과 독일군이 선언한 비공식 휴전은 내장의 감정이 도덕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다. 원래 양국 군대의 의도는 크리스마스를 지낸 뒤 전쟁을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전 기간 동안에 양국 군인들은 서로를 알게 되었고 일부는 크리스마스 식사를 함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군인들은 상대를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게 되었다. 결국 군인들은 크리스마스 휴전이 끝난 뒤에도 더 이상 서로를 죽일 수 없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가 2002년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에서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우선 상대방을 비인간화하지 않고는 비인간적인 전쟁에 직접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144쪽, 개리 마커스, 클루지»

그에 따르면 전쟁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가 아니라 이미 누가 적인가 하는 정치적 결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전제 위에서 독자적으로 행동과 사고를 규정하고 적대의 가장 극단적인 현실인 전쟁을 일으킨다. 친구-적 관계를 근거로 인간들은 피를 흘리고, 생명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을 살육하도록 강요당한다. 그렇다면 평화란 무엇인가. “이 같은 전재의 가능성이 남김없이 제거되고 소멸한 세계, 최종적으로 평화로워진 지구란 친구와 적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즉 정치가 없는 세계다.” «114쪽, 와카쿠와 미도리, 전쟁과 젠더-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적이 정해지면 어느순간부터 분노, 혐오, 경멸, 공포, 파괴, 지배욕, 광기와 같은 감정들이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되면서 “왜 적인지”, “적일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적은 적이 아닐 때도 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을 위해 가장 훌륭한 최선책이 전쟁일 수는 없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더 많이 얻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친구와 적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유토피아 중에서도 유토피아 인 것 같아 상상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친구와 적 사이의 그 넓은 공간을 채워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어떠한 것들이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질수 있을까? 그렇게 나누어지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왜 적이고 왜 친구일까? 적이 친구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적이 되기도 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렇게 친구와 적이 상황이나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까?

“군대는 보다 민주적이어야 한다”만을 주장하면 되는 걸까?

사토 후미카는 몇 편의 논문에서 여성 병사에 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밀하게 분류하고 있다. 전쟁과 여성을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상징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매우 흥미로운 분류다. 먼저 전통적인 남녀차별론자, 역할 분담론자들이 있다. 전쟁은 남자의 일이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야 한다는 이분법에 따라 여성의 군대 참가를 부정하는 것이다.(……)둘째는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남녀 역할에 근거한 평화주의자들이다. 여성의 모성적 본성에 입각해 비무장과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는 군 간부 여성, 내셔널리스트, 평등파 페미니스트, 애국 여성들이다. 이들의 구성은 다소 복잡하지만 군 내부에서의 남녀의 평등한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것은 물론 전쟁의 전면적인 긍정에 바탕을 둔 남녀평등이다. (……)사토가 분류한 마지막 그룹으로 그녀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반군사적 페미니스트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합법적이고 국가적인 폭력 조직인 군사 체제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249쪽, 위의 책»

그런 걸 상상했었다. 광주항쟁 때의 민병대처럼 민주적이고 자발적인 예비군. 거기에 성소수자라던가, 여성, 장애인처럼 사회적 소수자의 배재가 없는 우리를 지키는 조직. 국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합법적인 폭력조직일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는 사토 후미카의 분류에서 셋째에 가까웠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마지막 그룹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반군사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관심이 많다.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키기 위해 폭력은 필수적이고 그 자체를 문제시하면 이상에 빠진 몽상가일까?

폭력은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옳은지 그른지만 물으면 되는 것인가? 폭력 자체가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폭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자연법과 실정법이 그것이다. (……) 자연법은 “목적의 정당성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지만 실정법은 “수단의 적법성이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한다”. “현대 유럽의 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은 개인이 지닌 폭력을, 법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으로 간주한다.” 반면 국가가 지닌 폭력은 합법화되어 있으며 종종 ‘정의’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모순을 폭력 그 자체가 지닌 모순은 아니다. 폭력은 개인이 행사하면 범죄가 되고, ‘자폭 테러’나 ‘게릴라’에 대해 미국이 말하는 것처럼 ‘악마의 행위’가 된다. 그런데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면 왜 정당한 것이 되는가? «170쪽, 위의 책»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꽤 오래전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전쟁터에 발가벗고 플룻을  불며 평화를 호소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왜 발가벗는 건지. 영화 미션과 포카혼타스의 영향인가?) 이게 해결책이 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리 쉽게 “폭력은 수단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에게 분명한 건 폭력자체에 대한 고민을 멈추는 순간, 아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여지가 커진다는 것이다.

뭘 할 수 있을까?

우선 군사화는 정치·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가능성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군사화는 군국주의로 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산업화, 사회화, 글로벌화 등과 같은 어떤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저지할 수도 있다.” 이 군사화는 “자민당 후보나 군사기지에 있는 자치단체의 수장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의 미세한 과정, 어떤 영화나 패션, 또는 마음이 끌리는 남성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왜 전쟁 이야기가 매력적인지, 어째서 그것이 강한 어조와 높은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지, 거기에 어떤 용기가 묘사되어 있는지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군사화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상상력조차도”. «259쪽, 위의 책»

리어든은 그 답은 시민운동에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보다 많은 시민이 전쟁을 막는 운동에 참여할 것, 안정보장을 탈군사화, 다시 말해 비폭력과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 개념을 바꿀 것,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할 것을 요구한다. 다양한 운동에 관계하고 있는 여성들은 그를 위해 장기적인 시야를 지니고 국경을 넘어서 서로 도와야 한다고 리어든은 말한다. 여기에서 리어든이 제안하는 환경보호, 인권 문제 개선, 성폭력 근절, 인종차별 철폐, 아동 복지, 평화 옹호, 여성의 주류화 등을 위한 모든 운동은 언뜻 제각각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기존의 권력 지배적·폭력주의적·이익 우선적 특징을 지닌 가부장제적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간 중심의 협조적 패러다임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요구와 연대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266쪽, 위의 책»

 사실 한참 무기력/무관심했었는데, 요즘은 같은 부서가 아니지만 신병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웃음 띈 표정을 더 던지는 편이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는 편지를 써줬다. 내가 신병 때 어떠했는지, 내가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기를, 잠 잤으면 좋겠다고, 같이 힘내자고. (내가 잘 안 먹는 간식)이 나오면 신병들을 먼저 챙겨주려 한다.

권위주의에 무심하게(대놓고는 못하니까) 저항하고, 약자에 공감하는 거. 평등한 친밀감 속에서 즐거움을 만들어 가는 거.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평화를 만들어 가는 한 방식이 되지 않을까.

 

-천안함 실종자와 남기훈 상사, 그 가족들, 구조되었지만 상처받은 생존자들, 그리고 뉴스에 나오지는 않지만 군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 상처만 받고 위로받지는 못한 많은 사람들. 이 순간 진심을 담아 그 고통을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아이고 삭신이야 1

차근차근 군대갈 준비를 하는 중인 것 같아.

눈물도 안나올 만큼 아파도 안갔던 치과에 가서 검진도 받았고
평생 안가던 헬스클럽에서 1:1 트레이닝도 받고 있어.

아이고 삭신이야. 군대 가기전에 사람하나 잡겠네 싶어.

이빨 상태를 보니 사랑니 네개에, 신경치료 세개에, 자잘하게 손볼 이빨들이 스무개가 넘는대. 안건드려도 되는 이빨이 딱 하나 있다나.

건강 상태를 보니 허리는 굽었고, 휘었고 왼쪽 어깨는 한눈에 봐도 오른쪽 어깨보다 1,2cm가 높대.

왓더헬 내 몸은 어쩌다 요기까지 온거지?

남성들 간의 스킨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해석당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이대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겉으로 보기에) 이성간의 스킨쉽 대부분은 매우 쉽게 에로틱한 영역에 빨려들어간다.

반면 동성간의 스킨쉽은 어떤 방식의, 누구에 의해 일어나는 스킨쉽이냐에 따라 다른 해석들이 경합하기도 한다.

군대를 오는 스킨쉽을 좋아하는 게이들에게 팁을 주자면,

1. 일단 남성간의 스킨쉽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남성들간의 가장 쉽게 용납되는 스킨쉽의 종류에는 어깨동무(긴 시간은 무리), 뒤에서 한번 풀어보라며 꽉 껴안기, 주물러주기, 간지럽히기, 손아귀 세게 잡기, 서로 레슬링을 하며 뒹굴기 정도가 있다. 장난의 맥락에서 통용되는 스킨쉽들이다. 장난과 괴롭힘의 아슬한 경계에서 “공격”의 의미로 성기를 친다거나 뽀뽀를 한다거나 하기도 한다.(때리고 도망가는 거랑 비슷하다.)

그 다음으로 사람에 따라 살짝 긴장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 만한 스킨쉽으로 팔짱끼기, 어깨에 머리 기대기, 손잡기, 엉덩이 찰싹 때리기, 머리쓰다듬어 주기 정도가 있다. 대부분 긴 시간은 무리다. 치고 빠지기를 자연스럽게 해야 된다.

마지막으로 상대를 잘 골라가며 해야되는 스킨쉽으로 주변에서 조금 이상하게 볼 수 있다. 오랜시간 껴안고 있다거나, 이부자리하고 누워 있는데 위에서 덥치기, 살 만지작만지작 거리기.

이보다 수위가 높은 것들은 다루지 않겠어요.

2. 계급관계, 권력관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후임이 선임에게 하는 말은 진실할 수가 없다. 선임이 듣길 원하는 말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워낙에 권력관계가 계급에 따라 철저한 곳이다 보니. 선임에겐 장난이 후임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 후임은 싫어도 싫다고 못하고 강제로 웃으면서 놀아줘야 하니까. 그렇기에 후임에게 하는 스킨쉽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폭력이 될 수 있다. 개인이 아무리 동등한 관계를 후임과 만드려고 해도 군대 시스템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하지만 동기와는 권력관계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 장난이 장난일 수 있다. 선임에게 하는 스킨쉽도 상대방의 의사를 쉽게 알 수 있다. 불편하다면 곧바로 “꺼져!”라고 할 거다.

3. 커밍아웃은 스킨쉽의 해석을 힘들게 한다.

위에서 말한 대부분의 스킨쉽은 왠만해서 (진지하게) ‘동성애’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불편함(또는 두려움)을 불러온다. 알아서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다. 즉 모든 종류의 남성간 스킨쉽은 둘다 이성애자라는 가정하에서만 이해되는 범위에 놓인다. 워낙에 이성애중심주의가 쩌는 이 사회에서 “게이의 스킨쉽”은 매우 쉽게 ‘변태’의 영역에 쳐박힌다. 커밍아웃을 하고도 대놓고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전에 하던 스킨쉽을 그리 크게 거부하진 않을 거다. 그렇지만 오묘한 긴장이 새로 자리하게 될 거다. 그리고 아마 그 긴장을 게이가 좀 더 신경쓰게 될 것이다.  ‘어깨동무 이 정도하는 건 별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군.’ ‘뒤에서 껴앉는 건 조금 무리겠지? 몸이 경직될지 몰라.’ ‘얘가 이제 나한테는 (스킨쉽을 포함한) 장난을 안 치네.’ 등등.  사람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새롭게 잡히는(또는 계속 변하는) 스킨쉽 해석의 경계가 혼란스럽다. 


요즘 스킨쉽이 완전 고프다.

군대는 워낙에 권력관계가 쩌는데, 그런데서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나에게 불리하다. 게다가 난 서로 치고 박으며 장난치는 ‘남성적인’ 놀이문화에 익숙하지 못해서 불리하다. 스킨쉽을 하기가 불리하다. 그래도 한명 있다. 나보다 선임인데 스킨쉽을 좋아해서 어깨도 기대고, 팔짱도 끼고 그런다. 자주 볼 수 없어서 문제지. (자주봐도 문제다. 아마 서서히 ‘사랑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 댈 테니까.)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후임 한명이랑도 스킨쉽을 하고 싶은데, 이 아이는 호모포비아가 조금 있다.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내가 내 스킨쉽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무척 애쓴다. 난 주로 뒤에서 꼭 껴안고 싶을 때가 많다.(날 먼저 안아주진 않아서 일까?) 그 압박감, 따뜻함이 편안하다. 근데 이게 성욕인 걸까? 아님 그냥 친밀감의 표현인 걸까? 여자친구들이랑도 자주 껴안고 그걸 좋아하지만 (맘에 드는) 남자를 껴안을 때 더 좋긴 하다. 근데 그 감정의 차이가 싹뚝 잘려있지는 않고 이어져 있다. 이 친구를 안고 싶은 건 어디쯤 인 걸까? 100%친밀감이면 괜찮고, 성욕 충족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면 안되는 걸까? 이 친구는 어떤식으로 받아들일까? 자신이 성욕 충족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낄까? 너무 길게 ‘느끼는 듯이’ 안고 있지만 않으면 괜찮은 걸까? 

나”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게 이성애중심주의다. 나”만”에서 짜증나기도 하지만 이런 고민 자체는 재밌다. 완전 변태 같다.

사실 누가 좀 덮쳐줬으면 좋겠다. 근데 나이가 많고 내가 워낙에 만만한 포스를 안 풍기는 지라 그렇게 과감한 자는 없다. 아참. 내가 그냥 별로 안 땡길 수도 있구나. ㅡㅡ;

물론 이 사회를 제대로 굴리는 사람들은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으로 상정되지.

유격을 받는데 교관이 하는 말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생각해라. 이것도 못하냐” 라고 하더니,

힘들어서 제대로 못하는 애보고는 “너 고아냐? 고아야?”라고 윽박을 질렀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지르는 가운데 분노가 솓구치며 “삐리리야,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를 고아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저라나.” 싶었다.

“한국 군대는 나라를 지키기에 적합한 남자들과 그렇지 않은 남자들을 구분하기 위해 여러 범주를 사용한다.  내가 1988년부터 병무청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인 <병무>를 시대순으로 검토한 바에 따르면, 배제 대상의 범주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예를 들어, 1970년대초까지 학력은 면제 기준이 아니었는데, 대중의 교육 수준이 급격히 높아지자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가져야만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그 기준이 더 높아져서 고졸 이상이어야 현역병으로 입대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다음 범주에 속하는 남자들은 병역을 면제 받았다. 학력미달, 수형자, 고아, 혼혈인이 그 범주였다.

왜 이들이 배제 대상으로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떤 종류의 남자들이 믿음직한 국민, 따라서 바람직한 군인으로 간주되는지를 알 수 있다. 학력 미달자는 질이 떨어지는 인력으로 여겨지므로, 군대는 인력이 충분하다면 이들을 받아들이길 원치 않는다.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벌어진 징집에 관한 논쟁에서, 다른 ‘ 부적합자’ 범주에 대해 병무청장과 국회의원들 간에 질문과 대답이 오간 적이 있다. 그 논의에 따르면, 아주 어릴 때 부터 또 5년 이상 국가시설에서 성장한 고아는 ‘성격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단체 생활과 군대 병영의 안전을 혼란케 할 위험이 있다.  ‘외관상 식별이 명백한 혼혈인’도 감면 대상인데, 이들은 한국인들로부터 소외된다고 느끼기 쉬우므로 무기를 남용하고픈 충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병역에서 배제된다고 한다. 한국은 미군 주둔의 역사가 있어서 혼혈인이라고 하면 보통 미군 군인과 한국인 성 노동자 사이의 자녀라고 이해된다. 기지촌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무척이나 심하다. 이 두 범주는 수적으로는 비중이 크지 않지만, 그들이 배제 대상에 속한다는 사실 자체가 남성국민을 구성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네 대한 숨은 가정을 드러내준다. 특히 외모에서 식별이 가능한지를 잠재적 위험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나라의 경계가 인종에 따라 뚜렷이 나뉨을 보여준다. 대다수 한국 남자와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무기를 소지하게 할 만큼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배제대상과 달리 면제대상이 되는 또 다른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군대에 가지는 않아도 되는 범주다.(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입대를 선택할 권리도 없는 배제와는 다른다.) 그것은 젠더와 성 정체성에 관련된 것으로,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규얼은 군 복무 면제를 요청할 수 있다.(이런 용어는 최근까지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성전환 수술을 했거나 여성 복장을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 그들이 면제를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단은 심한 정신 질환, 정신 지체, 왜소증, 간질, 그 외  ‘신체적 비정상’과 함께 ‘신체장애’범주로 취급한다. 이런 병역 면제는 생물학적/문화적 성 정체성이 유동적인 개인, 생물학적인 성이 확정되지 않은 즉 규범적인 성 이분법에 맞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들은 병역에 적합한 ‘정상적인’ 남자가 아니라고 본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모호하지 않고 명백한 생물학적 남자, 즉 남자의 몸이 병역에 적합한지를 판다하는 데 중요하다. 남자의 몸은 남성성을 단단히 고정하는 닻이라고 여겨진다.3) 남성의 병역 배제와 면제의 매우 복잡한 논리는 국가가 계속해서 남성 개인을 국가 이익을 위한 동원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기본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3)’신체적 비정상’ 중에 또다른 흥미로운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무정자증’이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정자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경우를 일컫는데 이런 남자는 병역에서 면제된다. 그러나 이 신체적 ‘결함’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므로 이 범주에 속하는 남자들은 보통 병역을 이행한다. 그러나 그런 범주 자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성의 의무인 병역을 구성하는 데 생식력 있는 (이성애적) 남성의 몸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승숙,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180~181쪽에서 인용

한번은 단체로 기합을 받는데, 교관이

“남자새끼가 그거하나 못해서 여자친구 보기 쪽팔리지도 않냐?

여기에 여자친구가 있다고 생각하고 해라. 그래갔고 지켜주겠냐?”라고 윽박질렀다.

일어서서 “됐거든요.”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엎드려 뻦쳐 있었다.

과연 다른 애들은 저 소리를 듣고 힘이 나긴 했을까? 쪼금 궁금하다.

훈련소에서

오늘 첫 이론시험을 봤어. 조금 여유가 생겼어. 그래서 잊기 전에 이 곳의 끔찍함을 쓰고 싶어. 나에게 익숙해지기 전에.
조교들이 하는 말 중에, 아니 욕 중에 ‘병신’이란 말이 있어. 다리를 다쳐 기합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리병신들, 빠져!”라고 하지. 오늘은 이런 말도 들었어. “여기 공군에 뽑힌 사람들은 다 정상이니까 너희가 정신만 차리면 다 할 수 있다고.” 여기에 들어온 친구들 중에 어리버리한 친구들이 있어. 눈치가 느린거지. 차렷하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 움직여서 기합받고 조교한테 겁먹어서 더 실수하고. 어느 한 사람이 잘못해도 다 같이 기합받긴 해. 그렇다고 서로 도우며 사는 방식을 배우는 것 같진 않아. (조교와) 똑같이 병신이라 욕하고 경계를 그어버리지. 군대는 명확히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만을 원해. 대놓고 그러지. 교육시간에 4급을 받은 남자가 수술을 해서 공군에 자원 입대한 이야기가 나왔어. 그 사람이 군대에 오고 싶게 한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유였을까? “대한민국 남성은 군대에 다녀와야 정상”이란 공식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봤어.
군대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획일적이고 일방적이야. 여기서 사회를 배우는 거라면 사회에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와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군대에서 배우는 인간분류체계는 이런 거 같아.
as
물론 이 사회를 제대로 굴리는 사람들은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으로 상정되지.
역사시간에 6.25 이후 대한민국을 이렇게 성장시킨 할아버지, 아버지들에게 박수를 치자며 다같이 박수를 쳤어. 웃기지.
여기온 친구들 대부분은 엄마가 너무 보고싶데. 아빠는 별로 보고싶지 않나봐. 어쩌다 아빠들은 아들과 그런 관계밖에 되지 못했을까? 나도 그런가?
여성들을 보는 방식도 매우 단순해. “따먹느니” “걸레”라느니, 물건처럼 이야기하지. 연예인처럼 이쁘면 되는거야. 사람으로 볼 생각이 없지. 뭐 여기선 그냥 농담따먹기의 소재가 될 뿐이야. 자신의 성매매 경험을 맘껏 이야기하지만 그녀들의 삶을 상상해보진 않지. 자신을 괴롭히는 교관은 더 힘들거라고 걱정을 해주기도 하면서 말이야.
여기 들어와서 하루인가 이틀 째인가, 소대장이 들어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후에 “아 그리고 여기 혹시 동성애자 있나? 그래. 있어도 대답안하겠지. 밖에서는 동성연애가 불법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불법이야”라고 하더라. 시험보는 문제지에도 병사간의 동성연애는 불법이다라고 나오고 심리검사에는 동성애가 도착증이라고 나와. ‘남성의 항문을 보면 흥분되는지’ 뭐 이런 항목도 있어. 성희롱 교육 비디오에는 남성간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을 성적소수자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대에서 동성애자는 비정상일 뿐이다. 존재는 하지만 비정상. 농담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한번은 소대장이 동성애자들에게 군대는 꽃밭이라고 하자 다들 웃더라. 꽃밭일까? ‘건강’하고 ‘젊은’ 남성의 벗은 몸을 실컷 볼 수 있긴 하다.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게 내 동성애 정체성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에게 동성에자는 크게 두가지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것 같다. ‘여성스러운’ 남성(남성이 여성스러우면 나약하고 징그럽다 여기며 혐오의 대상이 된다)과 성폭력 가해자(자신보다 강한 힘을 지닌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신에게 동성간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초변태, 도착증 환자).
섹슈얼리티가 뭘까란 고민이 들었다. 훈련소에서 우리 호실을 같이 쓰던 동기중 하나는 엄청 잘생긴 조교를 보고 너무 좋다며 눈을 뗄 수가 없다고 그랬다. 나가서 싸이를 찾아보겠다느니, 그 조교 후임으로 들어간다느니. 그 사람말고 이쁘게 생긴 다른 조교는 따먼어야 한다느니. 대놓고 자기는 잘 생긴 남자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항상 음담패설을 하고 여자를 물건처럼 농담 소재로만 다루는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변태로 통했지만 그가 자신을 게이라 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여자친구도 있고 워낙에 남성중심적인 음담패설을 많이 했으니까. 오히려 이 친구가 나에게 날 처음 봤을 떄 여성스러워서(보통 남자들은 다른 사람이 바닥청소를 해도 다리를 벌리고 그냥 앉아있지 나처럼 다리를 모아서 들어주거나 하지는 않는다며) 게이인줄 알았다고 그랬다. 물론 (되게 미안해하며)”그럴 줄 알았다고” 형이 진짜 그렇다는 건 아니고 라는 뉘앙스를 막 풍기면서 말하기는 했다. 옆에 있던 ‘착한’애는 왜 그러냐며, 내가 정상이라고 ‘대변’해줬다. 그 애는 나한테 “아닌 줄 알아요. 형 건강하죠?”라고 물었고, 난 “응, 건강해”라고 대답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아도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게이로 의심되다니.
훈련소에서 보면 동성애의 욕망이 있다. 농담처럼 이야기되서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내가 써놓고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별별 소리를 다한다. 스킨쉽 욕망도 많고(하지만 스킨쉽은 서로 이성애자라는 확신아래에서도 군대내 동성연애 금기로 서로 조심하는 것 같다.)동성간 스킨쉽=동성애자=변태(비정상) 공식이 성립하는 거 같다.
아참, 물론 무성애적인 사람도 있고, 성보수주의적인 사람도 있고, 철저히 여성만을 욕망하는 100%이성애자들도 있다.
어찌보면 어떤 게이들에게는 이곳이 정말 천국일 수 있겠구나 싶다. 몸과 행동이 ‘남성성’으로 무장된 남성들이 깔렸으니. 동성간 스킨쉽이 금기가 아니었던 예전에는 더 좋았겠지. 몸만을 욕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많은 곳도 없지 않을까?  그럼 난?
훈련소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영상을 보여줬다. 고무신이 보내온 영상. 아이들의 반응와 교관의 멘트들. 이성애자만이 보이는 이곳. 눈물이 났다. 한참 정체성을 만들어가던 그 때, 전국국제영화제에서 한 영화를 보고 나와 콧물까지 줄줄 흘리며 울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영화 내용은 이스라엘에서 유색인종이자 비유태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소수자로서의 삶. 너무도 당연해서 꿈꾸지도 않던 ‘정상적인’ 삶. 누구나 그래왔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갈 기쁨과 슬픔, 고통과 지루함이 반복될 삶. (이성)결혼을 해서 애를 낳고 가정을 꾸리며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살아가는 거. 그걸 놓는다는게 쉽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었다. ‘정상’만을 보도록 ‘정상인’사이에서만 살아왔다도 굳게 믿던 나에게 도대체 넌 누구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막막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