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문제가 없다.

‘바이 논란’에 대해서는 주워듣기만 했다.(성소수자 모임은 완전변태가 처음이다.) 남성을 사랑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남성과 연애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택한―혹은 확인한― 레즈비언 정체성을 부정당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래봐야 한 때 일이고, 언젠가 결혼할 거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들었다. 여고만 졸업하면 남자한테로 관심이 돌아갈 거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섹스를 할 때 페니스를 사용하면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낀다. 사용하지 않을 때, 혹은 최대한 소극적으로 사용할 때의 기분이 더 좋다. 하지만 대개는 사용한다. 내 몸에 있는 몇 안 되는 성감대 중 하나인 걸. 단순히, 페니스 달린 여자, 가 아니게 되는 순간 혼란을 느낀다. 정체성의 혼란은 아니다. 그냥 죄책감이다. 누구에게 무슨 죄를 짓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죄책감인 것 같다.
여성의 몸과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서, 여성 정체성을 가진 남성의 몸과 연애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 사람의 사랑이, 혹은 연애나 섹스가, 이성애인지 동성애인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알기 어렵다기보다, 말하기 어렵다. 나는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일 테다.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성 정체성을 가진 남성이라니, 에이 그냥 변태잖아, 하면 그만이겠지.
언니네 홈페이지에 글이 하나 올라 왔(었)다. 레즈비언인데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사랑일가요, 하는 질문이었다. 몇 개의 댓글들,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레즈비언이라면 남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바이겠지요. 조금 고민하다가 댓글을 달았다. 남자를 사랑하는 레즈비언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게시판에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여성으로 등록된 아이디가 필요했다. 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에 만들었던, 남성으로 등록된 아이디를 탈퇴 처리하고 아이디를 새로 만들었다.
성별 란에는 남성, 여성, 이렇게 두 가지가 있었다. 고민했지만 결국 선택했다. 죄책감을 느낀다. 페니스가 달려 있기 때문인지 페니스를 사용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선택했다. 평소에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이름을 써 넣고, 여성을 선택하고, 아이디를 만들었다. 남성을 사랑하는, 혹은 남성을 사랑했던, 남성과 연애하는, 혹은 남성과 연애했던 사람도 레즈비언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선택하는 거니까요. 물론 어디에선가 욕을 들을지도, 정체성을 부정 당할지도, 그래서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생각해요.
나는 아직 애인을 누나라고 부른다. 야, 라고 부를 때도 있고 이름을 부를 때도 있지만 아무튼 누나라고 부른다. 가끔씩 언니라고도 부르지만 다른 느낌이다. 나는 애인을 누나라고 부르고 페니스를 사용해 섹스한다. 하지만 나는 동성애를 하고 있고 동성과 연애하고 있다. 나는 여성 정체성을 갖고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또 죄책감을 느낀다. 이번에는 어쩌면 그냥 민망함일지도 모른다. 나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 무심결에 누나, 라고 그를 지칭했다가 다시 그 사람, 으로 고쳐 말한다.
몸과 정신의 정체성이 다른 것이 문제라면 수술을 하면 해결이 되는 걸까. 페니스를 없애 버리면 나는 괜찮아 지게 될까. 수술을 하면 나는 여자가 되는 건가. 아니면 그냥 트랜스 젠더가 되는 건가. 수술 후의 나를 가끔 상상해 본다. 나는 여성이 될까 수술한 사람이 될까. 수술을 해야겠다, 수술을 하면 되겠다,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엇이 될지는커녕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니라 지향이다, 라고 애인의 수첩 어딘가에 적혀 있다. 여전히 남자 옷을 입고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고 페니스를 사용해 섹스를 하는 애인에게 혹시나 하게 될지 모를 실수를 생각하며 썼을 것이다. 그는 내게 실수를 하지 않지만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누구에게 무슨 죄를 짓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것은 죄책감인 것 같다.
그러니까, 라고 쓰고 싶다. 실은 하지만, 이지만, 본심은 아무튼, 이지만, 그래도 왠지 그러니까, 라고 쓰고 싶다. 남성을 사랑하는 레즈비언도, 페니스를 사용해 섹스하는 여성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유도 없는(실은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죄책감을 느끼는 것만 뺀다면 인생은 꼬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래도 또 어딘가 꼬일 것도 알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니라 지향이다, 라고 애인의 수첩 어디엔가 적혀 있다.

웹진2 내몸이다

여자방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여러 사람과 산다. 그리고 좋아하는 아역배우는 서울 오기 전에 좋아한 친구와 똑같이 생겼다. 공교롭게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틈에 그래서 사진도 여러 장 모아두고는 했다. 무슨 연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아역배우의 여드름 역시 꽤 오랫동안 조용한 금기. 중학교 교무실을 좋아하고 지하철에서 본 열 살 아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기장에 장황하게 쓴다면 아무래도 변태인 걸까? 공동생활은 어려운 걸까? 지금 이 문단은 커밍아웃인 걸까?
“바이논란”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소수자의 개념, ‘이성애자 아닌 것’의 폭을 ‘우리’도 고민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왜 다수의 이성애자는 트랜스섹슈얼과 호모섹슈얼을 구별하지 못할(않을)까? 그들에게 ‘레즈비언 아닌 성소수자’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성애자 아닌 것’은 그대로 동성애자로 간주되는 이분법이 날 항상 돌아버리게 했다. 그 단순명료함 아니 단일함 앞에 어떤 말도 무력하게 느꼈다. 결코 동성애자도 ‘쏘쿨한’ 이성애자도 아니었다. 왜 구멍이 될 수 없었을까? 왜 경계에 걸터앉아 짓뭉갤 수 없을까?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은 진부한 기존의 담론 안에 흡수되고 말았다. 오히려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말려들고 답습하며 대수롭지 않은 풍경 하나. 우리 안에 다른 분류를 만들어내든 우리 밖으로 튀어나가든, 알맹이는 잃어가면서 껍질만 단단해진다는 기분이 나날이 두터워져갔다.
내가 무엇일까? 자기자신을 알기 위해 말을 입기도 한다. 그간 숱하게 집어든 말들이 그랬고 스스로 허락했던 문장들이 그랬다. 하나. 둘. 더해서 부피를 키우고 무게를 늘렸다. 또한 자기자신을 명료하게 하고자 말을 벗기도 한다. 셋. 넷. 덜어내고 밀치고 버리며 앙상한 나만의 핵심을 남기려 했다. 그래서 난 무엇이 되었을까? 덧셈과 뺄셈은 날 어떻게 만들었을까? 스스로 부를 수 없는 덩어리가 되거나 숫자 영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니. 소리를 내기가 참 힘이 든다. 공동생활 속에서 내가 아주 간단한 절차를 거쳐 ‘여성’으로 판명날 때. 그것은 ‘편의’라는 옷을 입었고 이성간에는 같은 방을 쓰기 곤란하다고 발언한다. 그것은 그저 배워서 익힌 습관이다. 하지만 이제 ‘누구하고라도 비슷하게 곤란한 일’이라 말하기는 그만뒀다. 나는 지금 ‘여자방’을 쓰고, 앞으로도 쓰기를 원한다. 또는 내가 쓰는 방을 ‘여자방’이라고 부르고, 앞으로도 부를 것이다. 두 문장의 순서조차 정할 수 없고 그 ‘여자방’이 동거인들 사이에서 나를 ‘여성’으로 인식시키는 요인인지도 명확치 않다. 다만 ‘여성’과 ‘이성애자 여성’은 아주 많이 닮은 말임을 안다. 둘 다 이성애중심주의와 긴밀한 연관 속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입을 다문다. 만약 누군가 “(너는 이성애자 여성이다, 그러니 당연히)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느냐 물어온다면, 그 질문 안에 나는 없다. 아마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지워지고 있어 여기 있으면서도 없어지고 있어 아무리 소리친대도 그것이 중차대한 절박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때때로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만이 절박한 것이 문제도 아니요 내가 얼마나 떠든들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두 문장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고립과 해결불가능은 그저 동시적인 별개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너에게 독방을 줄게’ 라고 누군가가 제안한다. 난 되묻는다. 그러면 ‘여성’이 아닐 수 있는 거야? ‘개인’이 되는 거야?
상황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난 어쩌면 어디서도 별로 튀지 않고 잘 섞여들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남성’을 ‘남성’으로 지칭하면서 그런 대로 연애를 하고 함께 살 궁리를 하게 된 지금, 내가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안개 속이다. 고민들은 전혀 뭉개지지 않았고 사실인즉 많은 것들 훨씬 선명해졌지만 ‘여성’ 또는 여성 아닌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절로 줄어들어간다. 피할 수 없었던 질문조차 이제 다가오지 않는다. 항상 ‘여자방’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남자친구’와 섹스할 수 없는 방이기도 하고 ‘여자’기 때문에 레즈비언섹슈얼리티가 삭제될 수도 있는 공간이다. 또한 ‘여자방’이 아닌 공간에서 위축될 가능성도 심어진 장소다. 늘, 늘 그런 작은 방이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던 길 ‘노출증’이, 혐오범죄를 행사하던 내 뚜렷한 대립항이 나타나기 전에도 그랬다. 기꺼이 들어가야 하는 방, 조금은 어울리고 조금은 불편한 그 방은 ‘나만의 방’ 이전부터 버티고 있었다. 콜록.
웹진2 내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