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분노: 질문

 

 

지원서를 작성하다가 [관심 있는 인권 분야 및 이유]라는 항목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가 관심 있는 인권 분야는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이다.) 나는 정말 이 모든 것을 4-5줄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유? 이유라고???

 

나는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그건 상대방의 중의적인 말들을 스스로가 견딜 수 없는 강박증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스스로도 중의적인 말들을 많이 뱉어내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들을 일의적으로 바꾸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병이라도 걸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쉽게 해결해버리고 싶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거나(10%)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거나(0.5%) 예의 없게 그냥 질문(89.5%)을 한다. 간단하게 그냥 나를 질문러라고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그러한 질문을 할 권리가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나 그것이 민감한 질문일 때 말이다. 하지만 민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 만난 사람과는 각자의 민감한 부분에 대한 합의는 갓 로드 불가능하며 몇 년간 알아온 친구라 하더라도 민감한 부분은 진화하기 때문에(그것은 심지어 바뀐다.) 당신은 평생 알 수 없다. 그러니 포기하라. 민감한 부분을 걱정한다면 아마도 절대 누구에게도 그 어떤 질문도 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민감한 질문이라면 대답을 기대할 수 없겠지. 어쨌든 나는 질문러이지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질문하는 사람들(대게 그것은 질문의 형식을 띄지만 사실은 질문이 아니라 설교이며 상대방의 대답을 들으려는 의도는 눈꼽 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한바탕 휘젓고 뱉어버리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래서 말인데, 그렇다면 이 질문은 대체 뭘까.

 

1. 관심 있는 분야와 이유를 묻는 것은 아마도 정말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2. 이것은 마치 위의 대답이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라도 되는 양 성의 없는 답변들 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한 진정성을 묻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이것은 이러한 강의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진 인권 ‘감수성’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인 것이다. 아마도 대개의 사람들은 인권 ‘감수성’이라는 말에 위화감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감수성인가?

 4. 인권에 대해서 감수성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지? ①동정심이 있다. ②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는 지각능력이 존재한다. ③많은 다른 사람들이 공감을 표한다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능력이 있다. ④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고 그 의미를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있다 = 이 주제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있다] ???를 논증으로 강화하라. 하지만 어떻게?

첫 째로는 이 문제에 ‘관심’을 표할 수 있는 사람들과 나와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면서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이 인권 ‘감수성’이라고 말하는 그 케이스를 내 삶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여실히 느낀다. 대체 나는 무엇을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내가 여성과 성소수자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내가 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면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이를 주장하는 것이 되는가. 언제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없지. 그럼에도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그냥 이 질문을 눈으로 읽었거나 흘려들었으면 이렇게까지 위화감이 들면서 종국에는 파워분노를 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려고 하니 막막해진 것이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왜 설명하고 있지. 그래서 이걸 상대방이 감당할 수는 있나.

 

그래서 나는 영리한 방법으로 질문을 피해간다. 나에게 과거(설명)가 힘든 것이라면 미래(계획)를 적으면 된다.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 하고 싶은 것을 늘어놓기로 한다. 그래도 한 번 달아오른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 이 질문은 나한테 그렇다. 너무 ‘쉽게’ 질문하지 마세요. (이는 칸의 배정이 4-5줄인 점을 고려해서 보았을 때 내릴 수 있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

 

*복잡하게 살지 말자. 난 2013년에도 이 짓을 하고 있다. 앜

 

어떤 무대



오늘은 저의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담배가 한 대 두 대 세 대

아, 아 마이크 테스트


그리고 빵

오후 OO시 OO동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동네냐고


5초전에 일어났어야 하는 일을 지금 하면 안되지.

5초전의 일은 5초전에 끝났는데요.


설명을 하려고 하지마.

무슨 설명이요.

변명이겠지.

화자는 몇 명일까.


제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하세요.

무슨 립스틱을 칠했을까.

마이크가 줄이 짧은데요.


거기에서 시계를 한 번 봅니다.

감독님 조명이 너무 밝아요

내가 아까 5초전의 일은 5초전에 끝났어야 된다고.


여기서 눈을 클로즈업하세요.

징그럽게요?

그 때 왜 눈을 깜빡였을까.


눈물이 나지 않으면 어떡해요?

그래서 그 친구가 누군데요?

오케이라고만 쳤는데 왜 글자수가 6개야.

설명이 안되는 건 그냥 설명이 안되는거야.

그래서요?


그 자리에서 즉사.

너 거기서 뭐해.

범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필 이럴 때

수갑을 차고 있는 모습입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지.


그 친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됐어요.

조명이 너무 밝은데요.

히틀러.

전구역 금연입니다.

그럼 커피값 돌려줘요.


고객님.

죄송하지 않은 거 아니까 그 말은 꺼내지도 말아요.

변명이겠지.

하나님이 그 친구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또 5초전에요.


하나님이 그의 죄를 사하시니

커피에 물탔지.

놀랍게도 범인은 16살 미성년으로 밝혀졌습니다.

총은?

그래서 동네가 어디래.


원래는 여기에서 박수가 나와야되는데

왜 하고많은대로 놔두고 맨날 머리를 때려요 머리를

사람 죽이는데 이유가 어딨겠어요.

 인터뷰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여러분도 그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근데 왜 립스틱을 칠했을까.

치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뭔가 부족하지 않아요?







배설

(1)

애초에 ‘이끌림’, ‘관계적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점점 모든 것에 회의를 하게 된다. 나는 그저 내가 성욕을 관계적 욕망을 통해 풀어내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그리고 성욕 자체의 존재에 회의를 품을 때, 그러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로맨틱한 관계에 동경을 느낄 때, 그 모순과 위화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지, 혹은 설명할 수 있을지, 혹은 설명되지 않음을 납득할 수 있을지, 혹은 그래도 ‘괜찮다’고 위안하는 것의 감정작용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지, 차분히 생각해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대체 성욕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2)

전에 철학 수업을 들었을 때, 그때에도 ‘욕망’이라는 부분에서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욕망 자체에 대한 의문이라기 보다는 욕망의 상호작용에 대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원점은 ‘그 욕망은 원래부터 존재했나?’(아니, 그렇지 않다.)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되어가는 과정’,’타인의 욕망에 대한 자발적 수용’,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간의 상호작용’을 신체에 대한 조작, 강제로서의 ‘다이어트’를 통해서 풀어본다면 어떨까에 대한 생각이었다.


다이어트에 대한 욕망, 자발적 행위로서의 신체에 대한 가학/피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특히나 그 다이어트에 대한 욕망이 자신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를 구별하고 싶었던 것은 그 욕망이 ‘자발적’인 행위를 낳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욕망이라고 혹은 그 욕망은 모두의 욕망이자 누구의 욕망도 아니라고 깨닫는 순간에, 자발적인 몸에 대한 조작을 그만둘 수 있는 해방/자유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수업의 영향으로) 지금은 좀 다르다. 내가 받아들인 것의 원점이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 욕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신체적인 조작에 해당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타인의 욕망이 ‘허구’의 것으로서 내안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허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타인의 욕망이든 나의 욕망이든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중요’하게 된다.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라고 납득하게 되었다. 이것을 다른 욕망, 혹은 감정들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은 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타인)의 욕망이다. 하지만, 그것(타인의 욕망)의 영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허구의 욕망으로서 ‘나’의 안에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타인의 욕망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간다. 욕망은 욕망의 주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일까? 그것이 누구의 욕망이든 상관없이 어떤 욕망이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영향을 미치고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모든 것은 무수히 다른 다양한 방향에서 ‘실재’하고  그것들은 상대적이 된다는 의미일까.

왜? 혹은 어떻게? 응?

왜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성행위를 하는 것일까. 왜 이들은 ‘사랑’이라는 감정, ‘가슴이 두근두근함’을 느끼는 것일까. 이 감각은 실존하는 것일까? 사람들마다 동일하게 느껴 본 경험이 있다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마다 ‘두근두근’의 경험이 다르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연애는 지상과제가 되었고, 감각적이 되었고, 쾌락의 수단이 되었고,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되었을까? 될 수 있었을까? 이 관계가 가지는 특별함은 뭘까? 


로맨스의 각본은 굉장히 평범하며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각각의 개인에게는 특별한 경험으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왜 로맨스적인 관계에 특별함을 부여했을까. Sex sells. 성(성행위, 여성, 포르노,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 등을 주로 의미하는 성)은 팔린다. 그리고 로맨스도 팔린다. 이렇게 보면 로맨스는 성의 카테고리에 속해있는 작은 챕터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성과 로맨스를 반대의 포함관계라고 생각한다. 로맨스⊂성이 아니라, 로맨스⊃성이라고 말이다. 과연 그럴까?


이야기가 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섹슈얼리티, 성적지향, 성적 충동 등의 이야기로 돌아가 버린다. 왜 그렇게 ‘성’이 중요한 것일까. 왜 성적인 무언가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며 친밀한 관계에서만 가능한 행동 양식으로 자리잡은 것일까. 다른 욕구들과는 다르게 친밀성의 확인과 교환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왜일까? 누구나 공공연한 장소에서 성적인 욕망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면, 성적인 욕망을 말하는 것과 개인에 대한 판단이 다른차원의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된다면, ‘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성’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아질까? 성이 중요하지 않아지는 것은 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할까? 우리가 끊임없이 나의 ‘변태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것이 당신만큼, 딱 당신이 이상한 만큼 ‘이상한Queer’ 거라고 얘기하는것이, 그리고  끊임없이 커밍아웃하는 것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더 많은 이름들을, 성의 카테고리들을 얻어낼 뿐일까. 성적 소수자로서 ‘인정’ 받으려는 것과 ‘인정’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과 ‘인정’ 받지 않으려는 것의 사이에서 어떤 다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이미 그에게 주어진 것은 ‘소수자’라는 이름인데 말이다. 우울해지기 전에 뭔가 말을 꺼내보자면, 그래도 그것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존재’로서 다르다고 할지라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역시 어떤 변화도 이루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FTM남성은 분명 ‘존재’로서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그 ‘다름’에서 ‘다음’, ‘변화’를 이끌어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애자로서 ‘기능’하는 것을 먼저 본다면, 이성애자 남성들간의 무수한 차이만큼 이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FTM남성과의 차이를 인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 안에 갇힌 구도, 이성애주의와 그 외의 성적지향으로 양분된 구조 안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으로 구도를 바꾸어낼 수 있을까? 여전히 성에 대한 욕망들은 벽장 안에 갇힌 채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연애와 로맨스에 대한 고민은 성에 대한 고민으로 그리고 다시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흘러간다. 흘러간다. 흘러서. 응? 으로 끝난다.



그게 당신의 욕망입니까.

이전에 인터넷 상에서 ‘야동을 보는 남동생에 대한 누나의 고민’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고민 해결을 위한 조언 댓글의 대부분은 ‘남자라면 다들 야동을 보니까, 그냥 놔두는 게 좋다.’였고, 소수의 의견이 ‘몰래 야동을 지우고 모른척을 해라’ 등이 였다. 이러한 댓글에 나는  ‘야동을 볼 필요없이 그냥 상상해서 하면 되지 않나’ 라는 댓글을 달았었다. 그러자, 내 댓글에도 또 다른 댓글들이 달렸는데, 대부분이 ‘무슨 상상을 하느냐’, ‘그게 더 변태같다.’, ‘네가 한 번 상상하면서 해봐라’ 등의 격한 폭언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재미를 위해서거나 자기만족을 위한 비아냥과 폭언의 배설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느껴져서 더욱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아마도 포르노영상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욕망으로, 스스로의 성욕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포르노산업에는 포르노영상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제작자가 존재한다. 포르노는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처럼 제작자(포주라고 부르고 싶다.)에 의해 창작된다. 포르노영상물에서 보여지는 욕망들은 제작자의 상상에서 나온 고유의 욕망이거나, 혹은 제작자가 상상하는 소비자들의 욕망일 것이다. 포르노 영상물에 표현되어 있는 욕망을 특정한 누군가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있다면, 도대체 누구의 욕망일까?  모두의 욕망이거나 누구의 욕망도 아니라는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욕망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의 상상(을 할 거라고 상상하는 상상)에 기생하여 존재하는 욕망은 허구일까, 실재일까? 그것이 허구로써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실재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 채 욕망하는 것,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혹은 그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욕망하는것, 금지 된 것 자체를 욕망하는 것들은 순수하게 당신의 욕망인가? ‘순수하게’를 빼고 나면 당신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혹은 무엇을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가, 혹은 무엇을 욕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박적으로 욕망하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포르노가 우리에게 강요된다는 말을 듣는다. 원하지 않아도 원하게끔 만들어지는 상황에 너무나도 쉽게 놓여진다고 말이다. 당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스스로를 쉽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는 것과 나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보는 이유를 ‘자연스럽게’라고 혹은 ‘본능’이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이미 누군가를 설명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설명한다. 그것이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본다고 말이다. 그 욕망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스스로를 쉽게 열어두었거나,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했다고 착각했거나(발견했다면, 그것은 새롭거나 아니거나 그전의 그 욕망의 존재를 부정하는것이 된다.인식되지 않은 것을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무수한 욕망들을 건너다니면서 대체하고 갈아치우거나 하는 동안 그 욕망은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당신이 그것을 보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또 다시 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욕망이 되어가지만, 그것이 원래 당신의 욕망이었는지는 더이상 상관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당신의 욕망입니까?’라는 물음이다. 


전에 썼던 글인데, 그냥 한 번 올려봅니다. 정제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씹어삼키세요. Deal with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