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종현을 잘 알지 못한다. 팬도 아니었고 그의 노래를 열심히 들은 적도 없으며 라디오 애청자도 아니기에 나는 그와 그의 동료들을 더욱 몰랐다. 하지만 다른 이슈들로 그를 기억한다. 종현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안녕하십니까?>라는 이름으로 각양각층의 사회적 고통과 갈등을 드러내는 작업을 소개했었다. 특히 그가 언급했던 대자보는 성소수자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연예인으로, 굳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사회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기에 용감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팬도 아니었고, 내가 아끼거나 사랑했던 사람도 아닌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내가 왜 이리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 정확히는 상처 받았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 슬프고, 그의 빈 자리가 지독히도 시리다. 내 안에 그의 자리가 본래 있었다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의 팬이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그의 죽음이 나를 관통하며 빈자리를 만들어내고, 그 틈으로 해묵은 상처와 울적한 기억들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팬이었는가, 아닌가는 그의 죽음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과 의미에 어떤 변화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십대 때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활동해온 한국의 아이돌 가수였다. 그리고 데뷔 이후 10년을 더 살지 못했다.

그는 사회적 이슈에 발담그길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자, 사람들의 비판에 귀기울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10년전 기대했다던 28살이 되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팬을 포함해 그의 팬이 아니었음에도 슬픔에 젖을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연상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이는 그의 죽음에서 정의롭지 않음을 발견하고, 어떤 이는 한국의 높은 자살율을, 어떤 이는 한국 아이돌 산업이 지니고 있는 끔찍함을, 어떤 이는 이미 자살로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했던 이들을, 이렇게 각자 그의 죽음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음울한 현실의 한 조각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추모해야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흘려보내기엔, 마침내 잊어버리고 활짝 웃기전에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글로 남긴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윌앤그레이스, 꺄!

will and grac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총 8시즌으로 막을 내렸던 윌앤그레이스가 거진 10년만에 시즌 9으로 돌아왔다. 이 시트콤의 오랜 팬으로서 새 시즌을 반가움과 약간의 걱정 속에서 기다려왔다. 걱정스러웠던 점은 시즌 8 마지막 화가 피날레로서 너무나 완벽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트콤에서나 가능한 유치하고 어거지스럽지만 우아했던 결말이었는데, 새 시즌의 시작이 이 결말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새 시즌의 1화를 보는 순간 싹 사라졌다. 그들이 정말로 돌아왔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소위 퀴어영화와 퀴어 드라마는 제법 신선했고 흥미로웠으며 흥했다. 그리고 대표적 드라마로 들 수 있는 <퀴어애즈포크>나 <엘-워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드라마들은 단순히 드라마가 아니었다. 언제나 ‘전투적’ 정치 이야기가 가득했고, 퀴어로서의 삶이 그려내는 궤적 위에 놓인 수많은 자잘하고 큰 차별과 폭력들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윌앤그레이스도 매우 가벼운 시트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류를 어느 정도는 반영했었다. 하지만 소위 ‘퀴어물’이 갖고 있던 신선함이 사라지면서 이런 인권 운동과 연루된 ‘너무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아마 ‘루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몇몇 화들은 이런 지점을 조금이나마 담아내긴 했었지만 말이다. (퀴어애즈포크에서 이런 지점을 드러내기 위해 투여했던 분량과 비교하면 극명한 차이가 있다.)

이런 변화들 속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난 2017년의 미국에서, 이 해묵은 시트콤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혹은 어떤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제작진과 배우들도 깊이 고민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지점이 초반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캐릭터들은 여전히 그 캐릭터들이지만(정의로운 척하고 싶지만 구질구질한 욕망에 휘둘리는 윌, 프로페셔널해지고 싶지만 언제나 덤벙대는 그레이스, 캐런은 여전히 부자고, 잭은 여전히  Just Jack!) 배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아마 9시즌의 이야기들 상당수가 이 변화들 속에 이 캐릭터들이 놓여질 수 있는 위치와 의미를 드러내는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이 위치 찾기는 한편으로 이 시트콤을 보며 자란 세대들(올드 팬들)의 공통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윌앤그레이스의 새로운 도전을 환영하며 이들이 그려내는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드러날 것인가, 그리고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를 기대하고 있다. 우려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채로 말이다.

남아 있는 우려는.. 2017년인 지금 시점에서 여전히 동일한 캐릭터들만이 등장하기에 갖게 되는 지점이다. 이 부분을 추가적인 캐릭터들(단역이라할지라도)을 통해 어느 정도 보충해 나가며 2017년에 걸맞는 오래된 이야기지만 퀘퀘하진 않는 시트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퀴어, 페미니즘, 연대 그리고 여혐게이

최근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논란을 일으킨 윤김지영의 글에 대한 답글을 쓸 것을 요구받았다. 글 빚이 있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쓰기는 해야겠는데, 계속 의문이 든다. 이 글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개입해야 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써야하는 것일까? 이분법을 거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논의 지형을 평평하게 만들어버린 이 글에 굳이 삐질삐질 비집고 들어가서 답을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지금 밀린 일들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 상황에서 내 시간을 들여가며 글을 쓴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동시에 윤김지영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을 쓰고 싶었다. 따라서 이 글은 윤김지영의 글에 대한 답글이면서 동시에 답글이 아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었지만 계속 여러 가지 이유로 미뤄두고 있었던 이야기다.

  •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이 급진적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막말과 급진은 동의어가 아니다.

 

1. 퀴어와 페미니스트

나에게 퀴어와 페미니스트는 최소한 이 둘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하나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느낌이자 감각이지 하나로 가볍게 퉁쳐질 수 있는 정치적 입장, 이론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남성 페미니스트이자 남성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될 수 없었다. 남성이니까. 나는 퀴어가 될 수 있으면서 될 수 없었다. 남성 동성애자이니까. 하지만 ‘여성’으로 주체를 바꾸면 문제도 바뀌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나는 퀴어인가? 라는 질문은 여성 젠더로 자신을 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페미니즘도, 퀴어도 존재의 양식이 아니라 행위 혹은 실천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거대하다면 거대한 담론 덩어리 내부에는 다양한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들 사이에서 각 행위자는 서로의 위치에서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다. 소위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처럼 말이다. 그렇다. 불운하게도 이것도 페미니즘이다.

다양한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가 되지 않는다. 퀴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충분히 퀴어적이었다가 다른 지점에서 과도하게 규범적이기도 하다. 이런 끊임없는 진동, 교차, 그리고 횡단들 사이에서 결국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내가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나가 아닌 다수의 방향성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그리고 퀴어임을 확인하고 검토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실패도 하면서 말이다.

1-1. 한 가지 재미있는 내 삶의 경험 중 하나는 많은 비성소수자 페미니스트들이 퀴어라는 것을 탐해왔다는 것이다. 퀴어 이론 혹은 담론을 접하는 순간 시스젠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는 자신의 ‘부족함’, 혹은 ‘규범성’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치에서 당연하게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내가 만났던 많은 시스젠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했다. 소위 어느 정도 규범적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퀴어됨을 욕망함을 목격해왔다. 물론 이들은 페미니스트이기에 단순히 젠더 역할에 자신을 구속하거나 젠더 표현을 언제나 ‘특정 젠더’에 묶어 두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을 느끼며 퀴어가 될 수 없음에 잠시나마 좌절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당시에 동감하면서 동시에 화가 나고는 했다. 동감의 지점은 내가 그런 종류의 부족함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화가 났던 지점은 퀴어라고 하는 하나의 이름을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이 빼앗아가려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 퀴어가 성소수자와 동일한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국적 맥락 때문에 더욱 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성소수자와 퀴어는 동일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윤김지영의 글에서 페미니스트 여성은 퀴어가 될 수 있는데, 퀴어는 페미니스트 여성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왜 ‘여성’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동시에 이 일방적 관계가 이전의 목격들을 상기시켰다.

2. 여혐게이와 연대할 것인가?

비판적 연대 혹은 지지라는 이름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연대는 하지만 언제나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는 않겠다는 그런 방식의 연대였다. 윤김지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체적 연대라는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하면 된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연대는 그 누구와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만나지 못할 개인 혹은 집단은 없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연대할 것이며, 무엇을 이룰 것인가가 다루어져야할 중요한 논의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지점 중 하나는 연대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른 가치, 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관계를 만들고 협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연대다. 그리고 이런 연대에는 언제나 소동이 있어왔다. 논쟁과 다툼은 필수적이었으며, 상대방을 설득해 서로 간의 차이를 좁히거나 최소한 차이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 이것이 연대의 부수적 효과이자 목표 중 하나였다.

연대는 만남이었고, 만남을 통해 서로 간에 변화를 촉구하는 적극적 정치 행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위험한 행위이기도 했다. 많은 연대가 “이것이 연대란 말이냐?!”라는 외침과 함께 중단되었던 것은 특정한 가치 혹은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는 위계적 질서가 현장에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연대는 적극적 투쟁이기도 했으며, 협력과 비판은 언제나 긴장 관계 속에서 현장에 공존했다. 그렇다면 연대의 거부는 무엇일까?

2-1. 연대의 거부와 비판, 그리고 낙인

연대 거부는 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페미니즘과 관련 없이 올바르지 않습니다만, 올바르지 않다는 말은 부족하네요.” 연대 거부는 이것을 일종의 비판 전략으로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략적으로 논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보아야한다. 성소수자의 인권이다. 특정한 사람의 인권이 보호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가 흥정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올바르지 않음’이라는 비판이 ‘낙인’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슬퍼지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슬퍼지는 것은 ‘낙인’이라는 말이 연대 거부에 대한 비판이 갖고 있는 함의를 삭제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며, 동의하는 지점은 ‘올바르지 않음’이라는 표현 또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맥락과 관계들을 가볍게 퉁쳐버리는 발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욱 정교하게, 혹은 길고 길게 비판할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말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소수자 정치의 필수요건 중 하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말이다.

연대를 하는가, 안 하는가는 어찌되었든 선택이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 또한 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들, 혹은 단체들은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지 않는다. 성명서만 발표하고 그치거나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대 거부 발화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것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연대 거부 발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연대가 존재하기는 했는지, 연대할 의지가 이전에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해당 운동이 갖고 있는 의미가 자신들의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위계를 선언한다는 점이다. 이전에 페미니즘 운동이 수많은 연대의 자리에서 마주했던 그러한 위계를 말이다.

3. 여성혐오와 게이 문화

게이 문화가 여성혐오적인가? 그렇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화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게이 남성은 세상이 여성을 혐오하는 만큼 여성을 혐오한다. 세상이 여성을 혐오하는 만큼 여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것뿐일까? 그렇지 않다. 게이 문화가 지니고 있는 갈등적 위치는 그렇기에 더욱 중요하며,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가볍게 여성혐오라는 이름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단어들, 대표적으로 ‘년’ 혹은 ‘끼순이’가 갖고 있는 함의는 여성비하적이면서 동시에 남성비하적이며, 특정한 젠더에 자신을 고정할 수 없는 게이 남성의 갈등이 드러난다. 남성 동성애자는 남성으로 간주되지만 남성을 욕망한다. 이 말은 단순히 남성이면서 남성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점 혹은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성을 욕망한다는 것은 게이 남성을 남성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동시에 남성으로 간주되기에 여성이 될 수 없는 모호한 위치에 게이 남성을 위치시킨다. 그렇기에 ‘년’ 혹은 ‘끼순이’가 단순히 게이 남성 내부의 여성성이 발현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좁혀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소위 남성성/여성성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젠더이분법에 기초해 있으며, 이것만으로 세상이 나뉠 수 있다고 믿을 때 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여성 젠더로 간주되는 표현들인가? 그리고 왜 하필 비하적 언어인가? 타자의 원형이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추방된 자가 자신을 부를 수 있는 방식이 ‘비하적’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때 타자의 원형으로서의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으로 불리지만 여성이 아니며, 오히려 여성이 그만큼 지울 수 없는 위치에 있기에 최소한 경계에 남을 수 있었던 여성을 포함한 다양한 타자들의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타자는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어딘가로 이미 추방되어버렸기에, 이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이름을 빌려야만 했던 것이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멸칭이 여성비하적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이런 이유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하적 언어인가? 비하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추방된 자기 위치성에 대한 확인이자 동시에 그 위치성에 대한 긍정이기 때문이다. 수치의 확인과 자기 긍정의 언어는 동시적일 수 있다. 두 감정 자체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게이 문화 내부의 여성 혐오적 코드는 퀴어적이면서 퀴어적이지 않다. 단순히 특정될 수 없는 지점을 방황하는 언어라는 점, 이런 발화들이 지니고 있는 기존 젠더에 대한 위협과 해체적 의미에서 퀴어적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와 타자라는 위계, 남성과 여성이라는 권력관계를 이용하고 있기에 퀴어적이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 퀴어적인가, 아닌가를 단 한 순간, 한 지점으로 고정한 채 판단내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선일 것이다.

3-1. 그래서 여성혐오인가/아닌가

성소수자 혐오라는 비판을 낙인이라 부른 윤김지영과는 다르게 여성혐오라는 비판을 낙인으로 부를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정당한 비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맥락을 삭제하는 것이라고 지적은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야할 지점들이 분명 존재함에도 여성혐오인가/아닌가라는 질문만이 끝에 남는 현재 상황이 불만족스러울 뿐이다.

여성혐오인가/아닌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여성’이 질문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이 혐오당하고 있는 것인가? 그 여성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이 충분해지지 않는 한 나는 이런 질문 구도에 계속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게이 문화 내부의 여성비하적 언어는 젠더이분법으로는 제대로 포착할 수 없는 지점에서 작동하고 있는데, 그 지점을 놓치고 가는 것은 내 경험을 삭제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나는 이런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네, 여성혐오적입니다. 그렇지만… 블라블라” 우리는 말이 더 많아야 한다. 더 많은 말 속에서, 말들의 교환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3-2. 하지만 역시 남성 동성애자들이란..

하지만 역시 게이 남성 문화는 여성혐오적이다. 세상과 마찬가지 수준이라고 하지만, 게이 남성이기에 더 열 받는다. 어떻게 소수자로서 차별과 비하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둔감할 수 있는지, 그 점이 언제나 날 열받게 한다. 그리고 이런 이들과 내가 같은 이름으로 묶인다는 점도 화가 나게 만든다.

변화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 속에서 게이 문화라는 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런 고민과 담론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는 점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여성혐오인가/아닌가, 그래서 사용 가능한 언어와 사용 불가능한 언어를 나누는 방식의 접근에는 동의할 수 없다. 게이 문화 내부의 파열지점을 드러내는 것, 나는 그것이 더욱 중요하며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456789..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새벽이고,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은 글에 대해 빚 때문에 쓰는 것이니까 이정도로 줄이겠다. 다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여성혐오/성소수자 혐오라고 하는 단순한 이름 붙이기가 현명한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한다는 것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우리를 어찌되었든 서로 만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찌되었든 말이 많아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씁쓸함

오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낯설다. 별로 친했던 사이도 아니고 SNS 너머로 간간이 소식을 듣던 이의 죽음이 자아내는 이 낯섦이 언제나 낯설다. 마치 입 안에 쓰고, 신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뱉어내고 싶지만 뱉어낼 수 없고, 결국 꿀꺽 삼켜야만 한다. 하지만 죽음은 공백이고, 죽음을 삼키는 것은 내 안에 구멍이 하나 뚫리는 것과 같다.

너무 많은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면,

너무 많은 죽음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잊혀지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전장의 기억들, 여성 혐오 범죄를 기억한다는 것.

전장의 기억들, 여성 혐오 범죄를 기억한다는 것.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범인은 조현병이 있는 한 남성이었다. 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될 것처럼 얼핏 보였다. 하지만 이 일은 사람들의 기억을 자극했고 그녀가 살해된 장소와 가까운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 장소가 마련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글과 꽃을 남겼다. 서울 시장과 구청장도 방문해 추모 장소의 보존을 약속했으며 앞으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추모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강남역에서의 추모식이 ‘남성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며, 핑크 코끼리 옷을 입고, 핑크 보자기를 쓰며, 괴이한 문구가 쓰여진 피켓을 들고 왔다. 이들의 짓거리들을 하나 하나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들은 결국 사라질 것들이며, 이 사람들은 결국 사라져야만 한다. 사라질(사라져야하는) 것들에 대해 길게 쓰고 싶지 않다. (물론 이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만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남겨질 것들, 기억되어야 하는 것들, 그리고 이것들을 기억하는 방식에 관해서이다.

한편으로는 의아한 일이다. 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여성에 대한 범죄가 여성 혐오 범죄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불려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일까? 실제로 형법의 일부로서 혐오 범죄에 관한 조항이 도입될 필요가 있는가에 관해서는 여러 논쟁의 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이 범죄에 관해 현재 이야기하는 것은 대중 담론의 장이며, 이 곳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분명 (이상하지는 않지만 이유를 곧바로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의아한 일이다. 무엇이 남성들을 그토록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위협’받고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추모와 애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다.

추모 그리고 애도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애도의 대상에 관한 기억의 보존이며, 다른 하나는 애도의 대상에 대한 거리두기다. 우리는 애도를 하며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마침내 최종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한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이 결론은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언제나 갱신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애도는 그의 죽음을 확인/재확인하는 장이기도 하며, 따라서 생의 장소에서 그를 점차 (안전하게) 떠나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약 이 거리두기가 실패하면 우리는 죽음에 사로잡히게 되고 애도하는 사람의 생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만 현재 강남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는 이 두가지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죽은 이를 평상시 알지 못했던 대다수의 추모객들은 그의 생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보존할 수 있는 그에 관한 기억이 없다. 마찬가지로 살아 생전 피해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내지 못했던 추모객들에게 그와의 거리두기도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어떤 위치에서 왜 애도를 하는 것일까?

도미야마 이치로는 오키나와에서의 ‘전쟁’과 ‘기억’이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를 분석한 연구자다. 그는 2차세계대전에 관한 기억과 흔적을 조사하면서, 새로운 윤리적 발화 방법을 제안한다. 그것은 죽은 이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시신 곁에서 말하는 것이다.(이치로는 총살대에 일렬로 선 사람들로 비유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며 단순히 침묵과 무관심으로 참혹한 기억을 덮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죽은 자를 ‘대신’하여 죽은 자의 위치(빈 공백)를 내쫓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말로만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다가오는 폭력을 예감하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면서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발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에서 사람들이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며 계속해서 ‘그 날’을 이야기했던 것이 이런 방식이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강남의 살인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하고, 포스트잇을 남기는 것도 이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죽은 자의 위치를 삭제하거나 ‘대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는 살해 당한 피해자의 바로 옆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폭력을 ‘예감’하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기에 의기양양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연히) 살아 남은 사람들이었으며, 앞으로 살해 당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전장의 기억을 단순히 덮어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전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쟁박물관은 전장에 관한 기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조용하고 안락하며, 쾌적한 온도의 실내와 합리적 안내 시스템들로 가득찬 ‘일상’이다. 즉 철저하게 전장을 현재와 분리해 과거의 것으로 남겨 놓는 것이다. 이치로는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전장을 이야기해야 하며, 이를 통해 현재의 일상이 얼마나 그 전장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하루 하루가 어떻게 미래의 전장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는지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상에서 전장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일상을 불편한 것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며, 이 균열에 휘말린 사람들 또한 자신을 재구성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나에게 강남역의 애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 ‘전장’ 그리고 또 다시 겪을 ‘전장’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서울의 가장 화려한 지역 중 하나인 강남의 지하철 입구에서 과거 자신들이 겪어온 ‘전장’들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현재의 한국이 이러한 ‘전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지하철 입구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지상도 지하도 아닌, 산 자와 죽은 자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이루어진 추모)

아마도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강남역에서의 추모에 불편함과 더 나아가 위협감을 느끼는 것은 이 발화들이 갖고 있는 위와 같은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 하나 쌓여나가는 전장의 기억을 담은 포스트잇들은 현재의 한국을 이 ‘전장들’과 긴밀하게 엮어 나가는 작업이었으며, 살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법적으로든/정치적으로든) 규정하는 것은 이 끔찍한 사실을 확정짓는 일이었을 것이다. 경찰에서부터 언론까지, 일베와 오유가 손에 손을 잡고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이유, 그리고 강남역에서의 추모를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남의 이 범죄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고립된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일상과 이 범죄의 관계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모의 현장에서 (우리는 피해자의 얼굴도, 생도 알지 못하기에)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포스트잇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해 당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해 당할 사람들의 말하기, 이것은 한국 사회와 남성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미래의 ‘전장’에서 나를 살해할 것이냐?” 이 질문 앞에 노출된 남성들이 불편하지 않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마음껏 불편해하시라. 결국 당신은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은 살해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 ‘전장’ 자체를 막기 위해 여성들과 함께 할 것인가. 올바른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