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통은 아픈거다.

download


배가 부풀어 올랐다. 어쩐지 어제부터 골반바지 위로 뱃살이 한겹 턱하니 올라와있더라니. 부풀어오른건 단순히 뱃살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자궁이다. 양 옆으로 늘어난 자궁은 어느때보다도 상세히 그 부피와 무게와 움직임이 느껴진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일정한 압력이 있고, 자궁에 손이 하나 들어가있는 것 같다. 손이 벅벅 내벽을 흝는다. 오래 앉아있다가 서면 괜찮다. 오래 서있다가 앉아도 괜찮다. 한참 서 있다가 걸어도 좋다. 이렇게 4시간을 학교에서 버텼다.

결국 2시간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뛰듯이 들어와서 자켓을 벗고 가방을 정리하고 책을 꺼내서 침대에 눕는다. 그러다 누우면 더 아프다가도 한참 배를 부비고 있으면 나아진다. 중요한 건 그러다 움직이면 안된다는 거다. 살짝 골반을 움직여 자리를 매만지려하니 손가락이 자궁을 꾸욱꾸욱 누른다. 자궁에 박힌 젓가락은 찌릿찌릿 통증을 잘도 전달한다.

나는 열심히 버텼다. 한 수업은 이미 결석이 많고, 한 수업은 진도를 따라가기 어려웠다는 것이 핑계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생리통이 없던 그 시절에는 참으로 뻔뻔한 마음가짐으로 생리결석계를 주장했었는데, 생리결석계를 쓰려고보니 내 성적을 쥐고 있는 뻔뻔한 표정의 교수들에게 종이 한장 내미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생리결석계, 학교에서 받으라니까 받을게요.”라고 말하던 교수도 떠오르고, 신종플루에 걸려도 학교/학원은 빼먹지 않는다는 중고등학생들 기사도 떠오르고.

남자화장실

  남자화장실에 가는 일은 늘 고역이다.
  남자끼리 뭐 어때, 라는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게 옷을 내리고 몸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 오줌이 변기에 떨어지는 소리, 가래 뱉는 소리, 힘 주는 소리, 그 어떤 소리조차 가려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소리를 숨기기 위해 애쓰는 사람 따위는 없다, 고 말해도 좋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내가 있고,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직장 건물에 있는 다른 사무실들과 함께 쓰는 공용 화장실은 좁다. 소변기 두 개에 좌변기 두 개. 문이 없어서 소변기가 있는 공간은 밖에서도 다 보인다. 소변기 사이에 칸막이 따위는 물론 없다. 복도를 오가거나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그 소변기에서 남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는 것이 시원하다, 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걸쭉한 소리를 내며 볼 일을 다 보고 커단 행동으로 몸을 떠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혐오라기보다는 공포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저들이 무섭다. 아무렇지 않게 내 몸을 만지는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몸을 내보이고, 당연한 일이라는 듯 남의 몸을 보려는 사람들. 남자끼리, 라는 동질감과 남자끼리, 에서의 경쟁심이 묘하게 섞인 그 시선들의 사이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공포다. 그런 그들을 보는 일이 물론 혐오스럽고 구역질나는 일이지만, 그 이전에 공포가 먼저 있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
  오늘도, 마치 보란 듯이 소변기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는 바지를 내리고 있는 어느 남자의 뒤를 지나 좌변기가 있는 칸으로 들어간다. 좁은 화장실에서 자리를 넓게 차지한 그와 혹시라도 몸이 닿을까 나는 두렵다. 사실 그가 나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싶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왠지 우스운 일이다. 밖에서 기다린다 해도 그의 온갖 행동과 소리들이 보이고 들리기는 마찬가지기도 하다.
  손대기 싫은 좌변기 커버를 발끝으로 들어 올리고 볼 일을 본다. 혹시라도 쪼르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날까 두려워 긴장한다. 에티켓 벨이 있으면 좋겠지만, 남자들은 그게 뭔지도 모른다. 겨우 몇 백 씨씨의 오줌을 내리기 위해 버려지는 십 리터의 물이 아깝다.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혹은 추상적인 공포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물을 낭비해도 좋은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다.
  남자의 몸을 하고 있지만, 여자니까,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도 좋은 어느 나라를 상상한다. 혹은, 남녀 구분이 없는 화장실―모든 변기에 칸막이가 있는 어느 화장실을 상상한다. 그곳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여자 앞이니까 남자끼리 하는 그런 짓들을 하지 않으려 조심할까, 여자 앞이니까 자신의 남성성을 자랑하려, 혹은 여자들의 당황을 조롱하려 부러 더 크게 움직이고 더 크게 소리를 낼까. 그들이 나는, 두렵다.

훈련소에서

오늘 첫 이론시험을 봤어. 조금 여유가 생겼어. 그래서 잊기 전에 이 곳의 끔찍함을 쓰고 싶어. 나에게 익숙해지기 전에.
조교들이 하는 말 중에, 아니 욕 중에 ‘병신’이란 말이 있어. 다리를 다쳐 기합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리병신들, 빠져!”라고 하지. 오늘은 이런 말도 들었어. “여기 공군에 뽑힌 사람들은 다 정상이니까 너희가 정신만 차리면 다 할 수 있다고.” 여기에 들어온 친구들 중에 어리버리한 친구들이 있어. 눈치가 느린거지. 차렷하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 움직여서 기합받고 조교한테 겁먹어서 더 실수하고. 어느 한 사람이 잘못해도 다 같이 기합받긴 해. 그렇다고 서로 도우며 사는 방식을 배우는 것 같진 않아. (조교와) 똑같이 병신이라 욕하고 경계를 그어버리지. 군대는 명확히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만을 원해. 대놓고 그러지. 교육시간에 4급을 받은 남자가 수술을 해서 공군에 자원 입대한 이야기가 나왔어. 그 사람이 군대에 오고 싶게 한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유였을까? “대한민국 남성은 군대에 다녀와야 정상”이란 공식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봤어.
군대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획일적이고 일방적이야. 여기서 사회를 배우는 거라면 사회에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와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군대에서 배우는 인간분류체계는 이런 거 같아.
as
물론 이 사회를 제대로 굴리는 사람들은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으로 상정되지.
역사시간에 6.25 이후 대한민국을 이렇게 성장시킨 할아버지, 아버지들에게 박수를 치자며 다같이 박수를 쳤어. 웃기지.
여기온 친구들 대부분은 엄마가 너무 보고싶데. 아빠는 별로 보고싶지 않나봐. 어쩌다 아빠들은 아들과 그런 관계밖에 되지 못했을까? 나도 그런가?
여성들을 보는 방식도 매우 단순해. “따먹느니” “걸레”라느니, 물건처럼 이야기하지. 연예인처럼 이쁘면 되는거야. 사람으로 볼 생각이 없지. 뭐 여기선 그냥 농담따먹기의 소재가 될 뿐이야. 자신의 성매매 경험을 맘껏 이야기하지만 그녀들의 삶을 상상해보진 않지. 자신을 괴롭히는 교관은 더 힘들거라고 걱정을 해주기도 하면서 말이야.
여기 들어와서 하루인가 이틀 째인가, 소대장이 들어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후에 “아 그리고 여기 혹시 동성애자 있나? 그래. 있어도 대답안하겠지. 밖에서는 동성연애가 불법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불법이야”라고 하더라. 시험보는 문제지에도 병사간의 동성연애는 불법이다라고 나오고 심리검사에는 동성애가 도착증이라고 나와. ‘남성의 항문을 보면 흥분되는지’ 뭐 이런 항목도 있어. 성희롱 교육 비디오에는 남성간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을 성적소수자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대에서 동성애자는 비정상일 뿐이다. 존재는 하지만 비정상. 농담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한번은 소대장이 동성애자들에게 군대는 꽃밭이라고 하자 다들 웃더라. 꽃밭일까? ‘건강’하고 ‘젊은’ 남성의 벗은 몸을 실컷 볼 수 있긴 하다.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게 내 동성애 정체성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에게 동성에자는 크게 두가지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것 같다. ‘여성스러운’ 남성(남성이 여성스러우면 나약하고 징그럽다 여기며 혐오의 대상이 된다)과 성폭력 가해자(자신보다 강한 힘을 지닌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신에게 동성간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초변태, 도착증 환자).
섹슈얼리티가 뭘까란 고민이 들었다. 훈련소에서 우리 호실을 같이 쓰던 동기중 하나는 엄청 잘생긴 조교를 보고 너무 좋다며 눈을 뗄 수가 없다고 그랬다. 나가서 싸이를 찾아보겠다느니, 그 조교 후임으로 들어간다느니. 그 사람말고 이쁘게 생긴 다른 조교는 따먼어야 한다느니. 대놓고 자기는 잘 생긴 남자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항상 음담패설을 하고 여자를 물건처럼 농담 소재로만 다루는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변태로 통했지만 그가 자신을 게이라 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여자친구도 있고 워낙에 남성중심적인 음담패설을 많이 했으니까. 오히려 이 친구가 나에게 날 처음 봤을 떄 여성스러워서(보통 남자들은 다른 사람이 바닥청소를 해도 다리를 벌리고 그냥 앉아있지 나처럼 다리를 모아서 들어주거나 하지는 않는다며) 게이인줄 알았다고 그랬다. 물론 (되게 미안해하며)”그럴 줄 알았다고” 형이 진짜 그렇다는 건 아니고 라는 뉘앙스를 막 풍기면서 말하기는 했다. 옆에 있던 ‘착한’애는 왜 그러냐며, 내가 정상이라고 ‘대변’해줬다. 그 애는 나한테 “아닌 줄 알아요. 형 건강하죠?”라고 물었고, 난 “응, 건강해”라고 대답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아도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게이로 의심되다니.
훈련소에서 보면 동성애의 욕망이 있다. 농담처럼 이야기되서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내가 써놓고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별별 소리를 다한다. 스킨쉽 욕망도 많고(하지만 스킨쉽은 서로 이성애자라는 확신아래에서도 군대내 동성연애 금기로 서로 조심하는 것 같다.)동성간 스킨쉽=동성애자=변태(비정상) 공식이 성립하는 거 같다.
아참, 물론 무성애적인 사람도 있고, 성보수주의적인 사람도 있고, 철저히 여성만을 욕망하는 100%이성애자들도 있다.
어찌보면 어떤 게이들에게는 이곳이 정말 천국일 수 있겠구나 싶다. 몸과 행동이 ‘남성성’으로 무장된 남성들이 깔렸으니. 동성간 스킨쉽이 금기가 아니었던 예전에는 더 좋았겠지. 몸만을 욕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많은 곳도 없지 않을까?  그럼 난?
훈련소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영상을 보여줬다. 고무신이 보내온 영상. 아이들의 반응와 교관의 멘트들. 이성애자만이 보이는 이곳. 눈물이 났다. 한참 정체성을 만들어가던 그 때, 전국국제영화제에서 한 영화를 보고 나와 콧물까지 줄줄 흘리며 울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영화 내용은 이스라엘에서 유색인종이자 비유태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소수자로서의 삶. 너무도 당연해서 꿈꾸지도 않던 ‘정상적인’ 삶. 누구나 그래왔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갈 기쁨과 슬픔, 고통과 지루함이 반복될 삶. (이성)결혼을 해서 애를 낳고 가정을 꾸리며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살아가는 거. 그걸 놓는다는게 쉽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었다. ‘정상’만을 보도록 ‘정상인’사이에서만 살아왔다도 굳게 믿던 나에게 도대체 넌 누구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막막했었다.

노예가 주인에게 말했다. “나는 더이상 당신의 노예가 아니야” 주인은 배신감을 느꼈다.

포인트는 배신감. 배신감을 느끼는 거야.

군대에서 신병들이 악폐습을 조사관에게 다 이야기했어. 자질구레한 것 까지. 그래서 바뀌었어. 그런데 선임들이 배신감을 느낀다는 거야. 사실 선임들이 하는 일이 많아지는 건 아니야. 어차피 선임들 중 밑에 몇명의 일이 많아질 뿐이지. 대부분은 그 전과 생활이 그렇게 달라지지 않아. 근데 배신한게 너무 괘씸해서 복수가 시작되었지. 유치찬란한 복수놀이를 하는 중이야. 그 전에는 착하고 후임들에게 잘 해줬던 선임들도 화가 나나봐. 착한 “주인”이었을 뿐이지.

군대의 권력관계가 체화되고 세상의 진리인 사람들에게는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괘씸”한 짓이지. 나이 권력관계가 체화된 이들이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멋대로 반말하고 거기에 문제제기하면 “화내”는 것처럼. 권력은 대화와 타협으로 작동하지 않아. 군대에서 선임들은 매우 가끔 내 생각을 묻곤 하지만 결국 내 입에서 나오는 자기 생각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할 때 여전히 주인이라 생각하는 쪽과 더이상 노예가 아니라는 쪽 모두 분노와 배신감이라는 동력으로 때때로(혹은 자주) 갈등을 풀기 힘든 지점까지 몰아가곤 해. 설사 그게 그들에게 물질적인 이득이 전혀 되지 않는다더라도 말이야.

동물의 왕국-침팬지 무리에는 서열이 존재하고, 이는 음식을 누가 먼저 먹는 지로 드러납니다

 계급/서열…권력관계를 기반으로 관계맺기.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때, 서로 잰다. 외모로 재고, 배경으로 재고. 그리고선 거기에 따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런 것도 다 어렸을 때 부터 배우는 거니까.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방법, 어른을 대하는 방법, 공부 잘하는 애를 대하는 방법, 왕따를 대하는 방법 등등.

잠깐 있었던 유치장에서 느꼈다. 사기꾼 죄로 들어온 사람이 다른 사람 하나를 계속 괴롭혔다. 간수들은 관심도 없고. 나는 보는 위치에 있었다. 처음 들어가서 내가 “연세””대학생”이란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난 유치장 서열에서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너무 확연하게 드러난 나의 권력을 보고 나는 다른 생각보다 우선 감사했다.

군대는 계급/서열이 정해져 있다. 합법적으로다가. 안 지키면 영창보낸데요. 이 계급/서열은 일상적으로 아주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당연하지. 미리미리 복종을 몸에 익혀둬야 하니까.) 누가 먼저 경례를 하냐, 누가 무거운 짐을 드느냐, 누가 먼저 먹냐, 누가 말을 많이 하냐, 누가 누굴 즐겁게 해줘야 하냐 등등등.

사회도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사회에선 여러 권력들이 경쟁하고 비교적 비가시화되어 있는 반면에 군대에선 하나의 잣대만 통용되고, 다들 사회에서 인정되는 권력에는 익숙하지만 군대에서의 권력은 익숙하지 않다보니까 “잠깐” 반발하는 거 같다. 대부분의 병장들과 예비군들을 보면 익숙해진 군대의 권력 또한 별 문제없이 바라본다.

군대에서 계급 높은게 짱이긴 하지만 또 사회에서 인정되는 권력들이 완전히 빛을 바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많거나, 쌈좀 잘 하거 갖거나, 명문대생이거나 그럼 개중에 조금 대우해주기도 한다. 잘 못 걸리면 더 찍어 누르려고도 하지만. 많은 군인들의 큰 두려움 중의 하나는 후임에게 ‘먹히는’ 거다.(먹히는 게 뭐냐면 좀 친구 같아지는 거다.) 자기가 먹히는 게 아니라도 대부분 후임에게 ‘먹히는’ 꼴을 못 봐준다. 사실 좀 친구같아지면 슬슬 다른 권력들이 끼어들긴 한다.(남성들 관계는 항상 서열을 만들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렇기에 보통 거기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어 왔던 이들은 ‘먹히는’ 게 엄청 두려울 수 있다. 군대의 서열관계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거다. “왕따가 꼽창(괴롭히는 선임)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맥락인 거 같다. 물론 참 신기하게도 괴롭히는 걸 순수하게 즐기는 인간들도 있다. 혼나야 돼. 

서열/계급/권력을 기반으로 관계 맺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근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