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성적 분노

화가 났습니다. 어제부터 화가 났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여러날이 지났군요). 홍대 미술 수업에서 누드 모델의 나체를 찍어서 올린 사건이, 남성 피해자이기 때문에 피해자는 경찰의 보호조치를 받았고, 여성 가해자였기 때문에 체포와 동시에 언론에 내던져진 모습이, 화가 났습니다. 트위터를 보며 실시간으로 더 화를 냈습니다. 노홍철이 누드모델 몰카 사건이 인격 살해라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 ‘빨간 마후라’라는 강간 비디오를 복사해서 판매했던 사람입니다. 한 번 더 화가 납니다. 여성 가해자에게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다고 합니다. 또 화가 납니다. 누군가는 이 사건이 가해자를 특정하기 쉬웠기 때문에 빨리 잡힌 것이지, 여성 가해자이기 때문에 빨리 잡힌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트위터 화면을 보고,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화가 난 것은 맞지만, 이 화가 그 사건에만 집중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냥 계속 화가 나있었습니다.

1.

아마 지금 쓰고 있는 글에 더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늘 해왔던 말이지만) 위계화된 집단을 명시하지 않고 차별을 구조로서만 이야기할 때, 그러니까 “인종차별”을 이야기할 때, 백인이 어떻게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극우파의 프로파간다와 마주하면서, 우리는 구조에서 피해집단을 더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성차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은 위계적 사회 구조입니다. 차별은 문장에 빈칸 끼워넣기가 아닙니다. “인종”이나 “성별”이란 구분된 집단이 경우에 따라 이득과 손해를 보는 것이 차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글에 대고 혼자 화를 내고 있었는데, 눈 앞에 화를 낼 현실이, 정확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화를 낼 현실이 등장한 것입니다.

2.

문제는 이 현실이 현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현실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7살의 나를 성추행한 사촌을 계속 마주쳐야 하는 것, 내가 그를 고소하지 않은 것, 밤거리에서 누군가 내 엉덩이를 만진 것, 내가 욕만 하며 돌아선 것, 중학교 통학 만원 버스 안에서 내 엉덩이에 꼭 붙어서 무언가를 했던 치안,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그냥 얼른 도착해서 학교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나, 후배들을 불러놓고 원한다면 그 일자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허세의 선배가 내가 자원하자 여자가 갈 일은 아니라고 말을 흐렸던 것, 그 후 1-2년 동안 그 일자리에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을 기사로 접했던 것, 석사 졸업을 축하한다며 이제 공부 그만하고 결혼하라고 했던 노교수, 그 자리에서는 웃어넘긴 나…

너무나 흔한 서사이며, 모두가 겪은 일들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심한 피해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화는 언제나 후자에 가닿습니다. 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무언가 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렇게 피해를 나열하고 전시하는 것을 즐기고, 이 화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3.

의심은 끝이 없습니다. 피해자의 위치에서 화를 내면서, 사실은 지배집단으로서의 자신을 각성해야 한다는 의심에 시달리죠. 저는 글에서 장애차별을 예로 든 적은 없습니다. 저시력 장애인을 위해서 설치된 육교의 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고 투덜댔을 때가 기억납니다. 가해집단의 위치로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죠.

피해자의 위치는 언제나 히스테릭합니다. 차별이 차별인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주장해야 하고, 지배집단의 구분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내가 그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입니다. 차별은 차별의 결과가 차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다른 이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리적’ 주장을 합니다. 그 ‘합리성’의 반대편에 피해자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이것이 차별인지, 망상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의심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의심을 멈추면, 괴물을 들여보다가 괴물이 되어버릴 뿐입니다.

4. 나의 분노는 비이성적입니다.

우선 나의 분노는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전한 내 방에 앉아있지만, 저 모든 공격이 나를 향한다는 망상에서 화를 냅니다. 나를 개인이 아닌 특정 집단으로 치환하는 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입니까. 나는 집단이 되고, 저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사건들로 확장됩니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분노가 무엇을 해결하지도 않기 때문에,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 분노가 내 탓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합니다. 난 내 개인의 현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화를 내기 위해 핑계를 찾는 걸까요? 아니면 내 분노를 긍정해볼까요? 그런데 분노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표출하나요? 이것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펼칩니까? 분노를 원동력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다. 이미 그 의지는 분노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분노하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습니다. 분노하기 때문이 아니라,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분노는 의지의 원동력이 아니다. 분노는 나를 갉아먹고, 나를 슬프게 할 뿐입니다.

 

사실은 내 분노가 합리적이라고 정당화하고 싶어서 글을 시작했습니다만,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분노를 떨쳐내지 못하고 4일째 감당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문제가 맞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이 분노와 우울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듣고 싶습니다.

 

: 경험 말하기의 윤리

« 그린리프 » : 경험 말하기의 윤리

 

  1. 드라마 « 그린리프»

 

드라마 « 그린리프 »는 흑인 커뮤니티의 대형 교회 « 트리엄프 »를 운영하는 목사 그린리프 집안을 배경으로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배포되는 이 드라마는 흑인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하여, 등장 인물 중 흑인이 아닌 배우들은 한 손에 꼽을 수준이다. 주인공은 그린리프 집안의 장녀 그레이스다. 성인이 되자 집을 나갔던 그녀는 여동생 페이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그녀가 집을 나갔던 이유는 페이스가 외삼촌 맥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알렸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페이스의 죽음이 여전히 그 성폭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 집안에 남기로 한다. 홍보 문구를 생각해보자면,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기독교 커뮤니티 내의 성폭력 사건을 다시 보는 드라마다. 이런 드라마는 « 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보기 시작했다.

 

주요 서사는 이러하다. 어릴 적, 페이스는 그레이스에게 외삼촌 맥이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백했었다. 그레이스가 부모에게 알렸지만, 부모가 페이스에게 다시 사실을 확인했을 때, 페이스는 부인했다. 그레이스는 외삼촌을 모함하는 거짓말쟁이로 몰리고, 20살에 집을 떠난다. 그레이스가 떠난 집안에서 페이스는 맥을 늘 마주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페이스가 자살했다.

돌아온 주인공의 눈에 거대한 저택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은 온통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때 가장 큰 적은 그레이스의 엄마 메이다. 드라마의 가장 큰 신경전은 그레이스와 엄마 메이 사이에서 일어난다. 메이는 그레이스가 이기적으로 자신의 도덕성만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불행을 가져온다고 비난한다. 이에 맞서 그레이스는 가족 사업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가장하는 엄마를 위선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페이스의 성폭력 사건을 믿지 않은 것도, 화목한 가족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위선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레이스는 맥의 성폭력을 공론화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내고 그를 신고하라고 설득한다. 서사는 명백해 보인다 :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건을 해결하려는 주인공, 그리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커뮤니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전형적인 성폭력 서사다.

맥의 성폭력 사건은 고소 접수되었지만, 그는 협상을 통해 법망을 피해간다. 그레이스는 집요하게 맥의 주위를 떠돌며 그가 아동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린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몸 싸움을 하게 되고, 그레이스는 맥을 죽인다.

 

  1. 경험이 드러나는 순간

 

가족 내부에는 이미 자살한 단 한 사람의 성폭력 피해자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즌이 끝날 무렵에 우리는 두 사람의 성폭력 피해자를 더 만나게 된다. 엄마 메이와 그레이스다. 두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이지만, 서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메이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성적 학대를 당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메이의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예쁨 받음으로써’ 메이가 가족 내 학대나 가난에서 혼자 벗어났다고 비난한다. 여동생이 질투하는 메이와 아빠의 나들이가 성적 학대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모른채 말이다. 딸 그레이스 역시 메이가 고통을 모르는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메이는 자신의 여동생과 딸에게 자신의 학대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가해자의 처벌을 기대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방관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두 여성에게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처럼 보였다. 그래서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메이는 두차례에 걸쳐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한다. 첫번째는, 메이가 페이스의 자살 1주년 추모식을 앞두고 딸에 대한 기억에 젖어있을 때였다.[1] 그레이스는 페이스가 자살하기까지 그 모든 상황을 방치한 부모가 다시 페이스에 대한 추억에 잠겨있는 것이 위선적이라고 비난한다. 메이는 « 너는 나와 페이스가 겪은 고통을 몰라 ! »라고 외친다. 그렇지만 « 대체 어머니가 무슨 고통을 겪었는데요 ? »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두번째로, 메이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남편에게 말한다. 이 고백은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라기 보다는, 다른 말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로서 사용된다. 자신의 딸 그레이스가 정당방위로 자신의 남동생이자 딸의 강간범인 맥을 살해한다. 메이에게는 남동생으로서의 맥을 추모할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자살한 딸과 죽을 뻔한 딸에 대한 분노로 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남편에게, 그 공간과 시간을 요청하기 위해서, 메이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정확히 말하면 동생과 공유하고 있던 유년 시절을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남동생이 아동성폭행범이 된 것을 자신이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외삼촌 맥에게서 성폭행을 당할 뻔했었다. 페이스가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기 1-2년 전에 그녀 역시 같은 상황에 처했었다. 그녀는 페이스의 증언이나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 없이도 외삼촌 맥의 가해를 증명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과 연대를 실천했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털어놓을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털어놓는 순간이었다. 그레이스는 이 이야기를 관계의 진전을 위해 털어놓는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남자친구에게 용기를 얻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다.

 

우리가 성폭행 피해 경험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기대되지 않고 조절되지 않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기도 하고, 다른 비밀들 중에 하나로 교환하기도 한다. 고백이란 그러하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그 고백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돌파구/관계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남동생을 추모하기 위해 메이는 고백했다. 여동생과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녀는 고백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1. 알지 못하는 경험을 마주하여

 

다시, 메이가 자신의 경험을 내비치려고 했던 순간을 되새겨보자. 그레이스는 페이스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보는 메이에게 화를 낸다. 그레이스에게는 페이스의 죽음 뒤에 이어지는 추모들이 모두 위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때 메이는 소리를 지른다. « 넌 너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나와 페이스가 겪은 고통에 비해서 넌 아무 것도 아니야 ! » 메이에게 페이스는 자신의 딸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고통을 받은 여성이다. 그레이스는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여성이다. 그레이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레이스에게 메이는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죽은 페이스를 우아하게 추모할 수 있는 “운 좋은 여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 대체 어머니가 무슨 고통을 겪었는데요 ? » 라고 되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을 없다고 선언한다.

성폭력 피해는 말해지는 것만으로 화자와 청자에게 모두 위로와 연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폭력 피해가 피해자만을 비난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드러나는 경험만으로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경험으로도 위로와 연대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말해지지 않는 경험은? 우리는 알지 못하는 타인의 경험에 대해서 어떤 윤리적 태도를 취해야 할까 ? 우리는 어떻게 알지 못하는 타인의 경험에 믿음과 존중을 드러낼 수 있을까 ?

 

우선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를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미 페이스의 죽음이라는 경험이 그들의 경험을 뒤덮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한 침묵일까 ? 거대하고 절대적이 되어버린 어떤 것에 압도 되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레이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레이스는 페이스와 같은 피해를 겪었다. 페이스의 입을 빌리지 않고서도 그레이스는 맥이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페이스의 말하기에 기댔다. 지금 진행되는Me too 운동은 타인의 말하기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 힘을 모으고 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하기를 통해, 페이스의 피해를 증명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면 그것은 미수에 그쳤기 때문에, 피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겪지 못한 경험이 있고, 자신은 피했다고. 자신이 피했기 때문에, 페이스가 당했다, 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레이스는 자신의 경험에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메이의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성폭력 생존자이자, 다른 성폭력의 방관자였다. 메이의 말하기는 메이를 성폭력 생존자로서 위치시키며, 그레이스를 배제시켰다. 이 비난은 타인의 경험에 대한 무지이자 무시였다. 그렇지만 그레이스가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메이의 위치를 확인하려 할 때, 메이가 선택한 말하지 않기는 페이스의 피해 경험에 대한 존중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신의 고통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당장 자신의 고통의 서사를 대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의 즉각적인 침묵이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침묵을 이어가는 것에는 판단과 결정이 있다. 메이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페이스에 대한 애도인 동시에, 그 애도를 분노로 표출하는 그레이스에 대한 존중이었다. 말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공백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메이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레이스가 택한 비난 방식[2] 때문이기도 하다. 이 방식은 메이의 바로 그 전 발화[3]와도 같다. 메이와 그레이스가 상대를 비난한 방식은 자신을 피해자 위치에 세우고, 상대를 그 위치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난에서 두 가지를 구분하기란 어렵다. 상대에 대한 분노는 상대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선언 위에서만 존재한다. 메이가 혹은 그레이스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면, 이 경험은 각자가 가진 분노를 잠재울 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게 그 분노를 받치고 있는 피해자성을 흔들고 공격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릴 것이다.

 

불행 배틀은 타인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생각되는 내 고통을 통해, 더 많은 지분을 점유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것과 비교하고, 순서 매기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 공간은 공유되지 않고, 점유되기 때문이다. 메이에게 그레이스는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운이 좋은 여성이고, 그레이스에게도 메이는 운이 좋은 여성이다. 메이의 여동생에게도 메이는 운이 좋은 여성일 것이다. 그 오해의 골에서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은 것은 침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는 피해자이고, 너는 아니다”라는 선언을 위해서 자신의 경험 말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않는 것이 터부이기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이 사용되는 상황을 피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말하지 않기로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해 경험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에서, 말하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말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 때, 어떤 말하지 않기는 타인의 이야기에 공간을 주기 위해 선택될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한 비난과 타인의 경험 말하기가 뒤섞였을 때, 비난을 감수하고 타인의 경험이 말해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윤리적인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주하는 사람의 고통을 언제나 알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을 알기란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공유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고, 보이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알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 공백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고통이 타인을 평가하고, 타인과 나를 가르는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나만이 고통받는 존재, 나와 같은 고통을 받는 자만이 고통받는 존재라는 태도는 같은 고통 아래에서도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하긴 이런 태도 아래에서는 “같은 고통”이란 존재할 수 조차 없다.

 

  1. 하고 싶은 말

 

경험을 말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자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트위터는 좋은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은 뜬금없는 선언이나 고백, 말하기가 가능한 공간이다. 어떤 말은 불같이 퍼지기도 하고, 어떤 말은 적절한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말은 그냥 흘러가기도 한다. 시간에 따라 흘러가기도 하고, 사라지는 것도 같지만,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다.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은유성으로 피해자들의 연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말하기가 점유의 게임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 뜬금없는 선언과 고백, 말하기의 위치가 뒤틀리고 있다. 배타적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말하기의 목적이 되어버리고, 연대는 배타적인 공간을 점유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어진다. 지금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래디컬 페미니스트(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로 정체화하는 사람들, 소위 TERF의 말하기 방식이 그렇다.

TERF는 자신의 고통을 타인이 공유할 수 없는 배타적인 공간에 위치시킨다. 자신의 경험을 배타적으로 위치시키기 위해선, 타인의 경험 없음을 함께 선언해야 한다. TERF는 타자로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이용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선언함으로써, TERF라는 집단의 배타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공간은 다른 경험들마저도 위계적 질서 안에 가둔다. 나의 경험과 동일한 경험만이 공간에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나의 경험과 다른 것은 서열화되어 우선 순위를 매기려 든다. 그래서 “챙기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연대의 헐거운 고리는 등호와 부/등호로 도식화된다. 그 도식에는 다른 이야기가 들어갈 틈이 없다.

‘진짜 여성’을 찾아내서 그들의 고통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TERF는 다른 사람의 말하기를 가로 막을 수 밖에 없다. 상대를 타자로 만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나와 같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운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어떤 경험을 말하더라도 그 경험의 ‘예외성’, ‘운 좋음’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피해의 범주에서 제외시켜버릴 수도 있다.

 

자신의 피해를 절대화시키기 위해 타인의 경험을 함께 선언해버리는 방식은 비윤리적이다. 그럼에도 그 비윤리성이 지적받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되어온 것은, 그 말하기 방식이 경험의 말하기와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경험 말하기를 존중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당신은 그 침묵이 당신의 말하기의 승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침묵은 누군가 연대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그 경험이 윤리성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타인이 내어준 공간이다.

[1] 그린리프 2시즌, 7번째 에피소드

[2] « 대체 어머니가 무슨 고통을 겪었는데요 ? »

[3] « 넌 너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나와 페이스가 겪은 고통에 비해서 넌 아무 것도 아니야 ! »

트랜스 혐오의 정의 (Transyclopedie 발췌)

트랜스혐오(Transphobie)

 

  1. 정의

« 트랜스혐오(Transphobie) »라는 개념은 트랜스정체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과 장애, 고의적 침묵을 지적한다. 트랜스혐오를 트랜스정체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적의라고 정의하면, 트랜스혐오는 성기 재지정 수술을 받은 사람에 대한 차별로 한정된다. 그렇지만 트랜스혐오는 일반적으로 트랜스가 경험했거나 느낀 차별과 편견으로 재구성된다. 다른 포비아와 마찬가지로 트랜스혐오는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트랜스혐오는 동성애혐오나 성차별주의의 형식을 택하여 나타나고, 트랜스정체성에 대한 명백한 적대의 형식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트랜스혐오는 법률 문서에 찾아볼 수 없고, 동성애혐오나 성차별 개념과 연결되어 드러난다. 최근에는 수많은 트랜스 차별 사례 (특히 직장 관련)들이 동성애혐오나 성차별 행위와 구분되지 않은 채로 인지되어왔다. 2012년 7월 « 성정체성 »에 근거한 차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12년 7월 유럽인권위의 « 인권과 젠더정체성 » 에서 토마스 함마르버그(Thomas Hammarberg)는 « 젠더정체성 » 개념을 도처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 성정체성 » 개념이 낯설 수 있다) 또, 트랜스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장애물은 때때로 겹쳐서 나타난다. 성차별과 트랜스혐오는 서로 얽혀있고, 그것을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성별의 변화에 따른 배제인지, 일반적인 젠더 이질성에 따른 배제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트랜스혐오에서 차별의 첫 단계는 직접적으로 트랜스정체성에 기인한다. 트랜스로서 인정되거나 감지되면 차별 행위가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 재현은 중첩되고, 넘치는 의심으로 만들어진 의혹은 차별 대우, 즉 공격의 주요 원동력이 된다.

 

트랜스혐오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현상이 결합되어야 한다. 트랜스 몸(혹은 트랜스정체성의 표현)의 법적/기술적 생성과 젠더 정치, 젠더 규범의 재인지 시스템이 그 두 가지 현상이다. 따라서 트랜스혐오는 다음 두 요소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의 충돌의 표현이다. 한편으로는 이분법적이고 고정된 젠더/성별 헤게모니(남성=남성적 ; 여성=여성적)의 실천과 표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 남성적 » = 남성 = 남성성의 성별 공식을 교란하는 표현과 실천의 몸이 대립하는 것이다. 즉, 트랜스혐오가 나타나는 것은 « 트랜스 몸 »과 « 젠더 규범 »의 충돌에서 트랜스혐오가 나타나는 것이다.

 

  1. 트랜스혐오인가 « 시스젠더중심주의»인가

트랜스혐오 반대는 프랑스 트렌스젠더 운동에서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때로는 LGB그룹의 편에서 트랜스혐오 반대의 어휘와 행동을 공개토론에서 강제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동성애혐오 문제처럼, 트랜스혐오 개념도 완벽하게 전복, « 반전 »을 말한다. 이 « 반전 »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정신과 의사가, 심리 상담가가, 의사들이 혹은 재판관들이 트랜스 현상에 대해 자주 질문했다면, 이제는 트랜스현상이 젠더 관계와 규범 관계에 대해 질문할 차례라는 것이다. « 호모포비아는 다른 젠더에게 부과된 자질을 보이거나 혹은 그 자질을 보인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다 » (W.Lang, 1994). 더 자세히 설명하면, « 이 정의는 젠더 개념에서 병행하는 성차별주의와 동성애혐오를 연결하고, 또 그들을 차별 당하게 만드는 개인에게 부과된 특성을 탈-본질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혐오를 식별할 수 있고, 이성애정상성에서 구분할 수 있다. 다니엘 벨젤 랑(Daniel Welzer Lang)의 정의에 따르면 이성애정상성은 다음과 같다.

 

개인이나 기관에 의한, 동성애와 공존하는 초월성과 이성애의 우월성의 끊임없는 “홍보”. 이성애주의는 다른 의견이 없는 한, 모두가 이성애자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트랜스혐오의 정의는 트랜스혐오와 시스젠더중심주의으로 나뉜다. 트랜스혐오는 법률적으로 차별을 드러내는 것, 다르게 말하면, 차별의 방향성과 원인을 트랜스정체성의 인식의 직접적 책임으로 돌리는 행위를 말하고, 시스젠더 중심주의는 더 일반적이고 현실적으로, 비천하고 비정상적인 젠더 이질성을 분열시키는 것, 그리고 트랜스정체성의 실행과 표현을 방해하는 장애물의 총체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트랜스혐오와 시스젠더중심주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낸다면, 이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어떤 것들이 쉽게 분리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 배제 논리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차별과 배제의 미끄러짐(glissement)에 관련된 것이다. 의미적으로 뿐만 아니라, 원인-결과로서의 미끄러짐 말이다. 트랜스혐오 개념으로 혐오되는 대상(le phobisé)이 아닌 트랜스공포증(phobie)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트랜스 정체성 표현의 자격을 박탈시키는 시스젠더 문화의 « 인정 »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도미니크 슈나퍼의 제안처럼, « 단순히 평가만 할 것이 아니라, 관찰된 지형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2005) 혐오와 혐오의 방식을 고발하는 것은 문화적 가변성들을 연결시키지는 못하고, 순서가 뒤바뀔 수 있는 법적 대립들을 연결하게 된다.

트랜스와 트랜스혐오에 대한 연구는 미국이 프랑스보다 앞섰다. 2002년 힐(Hill)은 트랜스혐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사회의 젠더 표현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적 혐오감 » 힐은 « 트랜스혐오 »와 « 젠더 지우기 »를 강조한다. 이는 젠더 이질성에 대항한 토벌대 파견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공격이나 괴롭힘이다 » 힐은 이 배제 논리를 « 젠더리즘 »이라고 명명한다. 즉,

 

« ”섹스”와 “젠더” 사이의 불일치 혹은 젠더 부적합성에 부정적 인상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 이것은 전형적인 방식의 “남성” 혹은 “여성”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판단하는 문화적 구조와 믿음이다. “젠더리스트”는 젠더의 사회문화적 표현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리학의 타격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성애성차별주의도 마찬가지이다 … »

 

« 트랜스혐오와 동성애차별의 상관성에서의 성차 (Gender differences in correlates with homophobia and transphobia) »(2008)에서, 줄리 나고시(Julie Nagoshi)와 캐서린 아담스(Katerine Adams)는 힐의 이전 정의로 돌아와서,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혐오를 교차로의 교란 요소와 같은 젠더 이질성의 프리즘으로 마주하기를 제안한다. 줄리 나고시와 캐서린 아담스에 따르면, 이 배제에는 이중적 표현이 존재한다. 한 편에는 트랜스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향하는 트랜스혐오와, 다른 편에는 동성애혐오를 성차별주의와 연결시키고, 성차별주의를 트랜스혐오와 연결하는 젠더 이질성 배제의 막연하고 위험한 논리이다.

 

Thomas, Maud-Yeuse, Karine Espinera, and Arnaud Alessandrin. La Transyclopédie: Tout savoir sur les transidentités. Lulu. com, 2012, p292-294.

[기사번역] 모든 테러리스트가 무슬림인가? 전혀

원문 : http://www.thedailybeast.com/articles/2015/01/14/are-all-terrorists-muslims-it-s-not-even-close.html

 

모든 테러리스트가 무슬림인가? 전혀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지는 테러 공격 중 몇 퍼센트나 무슬림에 의한 소행일까? 맞춰보시죠.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보세요. 다시, 또 다시…

 

DEAN OBEIDALLAH

01.14.15 11:45 AM ET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입니다.” 이 말을 몇 번이나 들어봤나? 폭스 뉴스의 브라이언 킬메아드(Brain Kilmeade)가 하는 말이다. 이것은 시청자들을 바보로 만들려는 폭스 뉴스의 계획의 일부이다. 지난 주말에는 테러리스트 “전문가”인 스티브 에머슨(Steve Emerson)”은 영국 버밍험이 비무슬림에게 닫혀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심지어 이성적인 몇몇 사람들조차도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다음 질문을 덧붙이게 한다. 왜 우리는 기독교, 불교, 유대교 테러리스트는 찾을 수 없는 걸까?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생각하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 무슬림은 그들의 행동이 신앙에 기초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기인한다고 증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슬림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사실이 있다. 그러니까 먼저 심호흡을 하는 것이 좋다.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지는 테러 공격이 무슬림의 소행인 경우는 압도적으로 적다. 충분히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좀 주겠다.

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미디어를 탓할 수 있다. (그렇다, 사라 펠린(Sarah Palin)과 나는 이 하나의 사실에는 동의한다. 주류 미디어는 썩었다는 것.)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유럽부터 시작하자. 지난 5년간 테러 공격 중 무슬림의 소행인 경우는 몇 퍼센트나 될까?  틀렸다. 당신이 2% 이하라고 답하지 않은 이상.

유로폴에 의하면, 유럽연합의 사법당국은 작년 보고서에서 유럽에서 일어난 테러 공격의 대다수가 분리주의자 집단에 의해 자행된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2014년 유럽에서는 152 건의 테러 공격이 있었다. 이 중 오직 2건만이 “종교적 동기”로 이루어졌다. 84건은 민족국가주의 혹은 분리주의 신념에 의해 발생했다.

코르시카 섬의 독립을 지지하는 FLNC(코르시카 민족해방전선)와 같은 집단 말이다. 2013년 12월, FLNC 테러리스트들은 두 프랑스 도시의 경찰서에 로켓 공격을 동시에 벌인 적이 있다. 그리고 2013년 연말 그리스에서 좌파 과격인민혁명군대(Militant Popular Revolutionary Forces)이 우파 Golden Dawn의 당원 두 명을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아나키 그룹 FAI가 기자의 집에 폭탄을 보내는 동의 수많은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이 테러 공격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의 테러 공격을 벌인다면, 미디어가 이것을 다룰까? 대답할 필요도 없는 수사적 질문이다.

심지어 2011년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테러 공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르웨이에서 앤더스 브레이빅(Anders Berivik)이 자신의 성명서에서 밝혔듯이 반무슬림, 반이민자, “기독교 유럽”에 대한 지지를 알리기 위해 77명을 대량학살했을 때, 얼마나 많은 미국 언론에서 이를 다루었나? 물론 다루어졌지만, 무슬림 테러리스트 사건을 다루는 방법과는 달랐다. 게다가 우리는 테러 전문가가 케이블 뉴스에 나와서 미래의 기독교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질문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사실, 브레이빅이 “기독교 테러리스트”였다는 암시조차 많은이들, 특히 폭스 뉴스 빌 오렐리(Bill O’Reilly)의 공분을 샀다.

불교 테러리스트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극단적 불교신자들은 버마에서 많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몇달 전 스리랑카에서는 무슬림의 집과 사업장을 불태우고 네 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폭력적 광란이 일어났었다.

유대교 테러리스트는 어떤가? (감히 언급해본다) 2013년 테러리스트에 대한 주정부의 보고서의 의하면, 이스라엘 정착민들에 의해 발생한, 이른바 “가격표(price tag)”  테러는 399건에 이른다. 이 유대교 테러리스트들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공격하여, 93명에게 물리적 상해를 입히고, 기독교 교회와 모스크를 파손했다. 다시 미국에 상황을 이야기하면, 무슬림이 일으킨 테러 공격은 유럽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테러에 대한 FBI 보고서에 따르면, 1980-2005년 사이의 테러 공격 중 94%가 비무슬림에 의해 발생되었다. 42%는 라틴계열 집단에 의해 발생했고, 24%는 극단좌파에 의해 발생했다.

2014년 노스캐롤리나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911 테러 이후, 무슬림 연관 테러는 37명의 미국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같은 기간, 190,000명의 미국인이 살해당했다.

2013년, 미국인은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할 가능성보다, 유아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더 크다. 같은 해, 보스턴 마라톤 폭탄 사건에서 3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2013년에 유아에게 살해 당한 미국인은 5명이다. 모두 우연히 발사된 총에 사망했다.

그러나 우리 미디어는 똑같은 열정으로 비무슬림 테러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왜? 이것은 사업적 결정이다. “다른 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이야기가 더 잘 먹힌다. 선과 악의 대결로 포장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미국은 좋은 사람이고, 갈색 피부의 무슬림은 나쁜 사람이다.

솔직히 말해서,  낙태 클리닉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기독교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들어본 적이 언젠가? 이들이 임신/분만건강치료시설 다섯군데 중 한 곳을 공격하느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잘 팔리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소위 기독교 국가이고, 이것이 우리 국가 내부의 적을 봐야 한다고 요구하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더 나쁜 것은, 이것이 그들에게 채널을 바꾸도록 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매일 30명의 미국인이 총격 사건으로 사망하고, 매일 3명의 여성이 가정 폭력으로 사망한다는 이야기를 접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디어는 우리가 어떻게 무서운 갈색 피부의 무슬림이 더 이상 미국인을 죽이지 못하다록 토론 하기 위해서 전문가를 내세울 것이다. 냉장고가 당신의 위에 떨어져서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기사가 미디어의 사업 모델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라건데, 누군가에게 모든 테러리스가 무슬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기를 바란다. 사실, 그들은 매우 적은 비율이다. 이스람 극단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위험을 무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냉장고를 조심하라고 말할 뿐이다.

동성 결혼 합법화가 아닌 결혼 제도 폐지를 주장한다.

 

동성 결혼 합법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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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제도 폐지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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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페미니즘>의 저자 잭 핼버스템은 한 강의에서 “내가 직장에서 받는 의료보험을 내 파트너에게 줄 수 있다면, 왜 옆집의 할머니에게 혹은 어느 노숙자에게 그것을 줄 수 없느냐?”라는 물음을 던졌다.

한국에서도 개인이 가지는 국민건강보험을 같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가족관계증명서에 나타나는 친족 혹은 결혼 상대자와 그의 친족으로 한정된다. 직장에서 주는 복지 혜택이나 휴가 역시 마찬가지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수술 동의서에 타인이 싸인을 해줘야 하는데, 법적 친족 관계를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 친족 관계는 결혼을 통해 생성되기 때문에, 동성 결혼만 합법화된다면 동성 커플도 이 권리들을 가질 수 있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동성 커플 파트너가 서로의 보호자로서 수술 동의서에 싸인할 수 있고, 신혼여행 휴가를 받을 수 있고, 건강보험을 공유할 수 있고, 연금 혜택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과정 속에서 동성 커플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질문해보자. 왜 우리는 그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꼭 결혼을 해야 하는가?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주장은 사법 기관이나 행정 기관이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성별에 대한 제약 외에는 기존 결혼 제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지는 않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현재 결혼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혼인 계약은 민법에 속해있지만, 이 계약의 실효성을 따지는 이유는 대부분 상속에 대한 분쟁 때문이다. 친족 상속법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자녀에게 상속을 하지 않겠다고 문서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사후에 법적으로 정해진 만큼의 상속에 대해서 요구할 권리가 있다. 자신의 가족관계부에 돈을 벌고 있는 자녀가 존재한다면 그 자녀는 법적으로 부양 의무자로 해석된다. 가족으로, 부부로 묶여버린 관계에 대해 국가가 부당한 강제를 제시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 법 속에서 성별의 표시만 제거해서 들어가면 되는 것일까?

게다가 동성 결혼 합법화는 종종 두루뭉술한 로맨틱의 환상 속에 파묻힌 듯 보인다. 결혼의 의미를 되묻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결혼의 환상, 즉 사랑하는 두 사람의 지상 최대의 로맨틱 쇼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 이슈를 가장 크게 알린 김승환-김조광수의 결혼식은 결혼‘식’, 결혼식‘케잌’, 축의금1) 등 한국의 일반적인 결혼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 결혼식에서 가장 현실적이었던 것은 다음의 현수막이었다. “주여! 동성커플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 – 한국기혼자협회.” 난 이 현수막만큼 지금의 동성 결혼 합법화 운동을 잘 설명하는 문구는 보지 못했다. 우리는 바로 그들의 지옥으로 가고 있다.

김승환-김조광수의 결혼식 행사와 영화는 계속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필요충분조건의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반드시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결혼한다고 반드시 사랑하는 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 물론 이성 커플은 결혼과 비혼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반면, 동성 커플에게 비혼은 선택이 아닌 권리 없음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이 권리 없음의 상태에서 이성 결혼 커플과의 동일화 전략을 택한다. 그리고 “한국기혼자협회”의 지옥으로의 환영사를 듣고 있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일종의 제도 싸움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권리에 대한 법적 보장을 요구한다. 동성 커플 간의 재산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고,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며, 유사시 재산 상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돈에 대한 이야기다. 친족상속법에서 보장하는 돈이 오갈 수 있는 가족 관계에 대한 국가 개입을 다시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의 개입과 한정은 어떤 문제들은 가족과 부부의 범주 안에서만 해결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다. “배우자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까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는 한탄은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노년을 전혀 보호하지 않는 현실과 맞닿는다. 따라서 우리의 가족 구성권에 대한 요구와 동시에 노년층에 대해 가족 외의 보장 장치가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 혼인 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현실은 우리 모두에게 부당한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성 커플, 비혼을 선택한 커플들, 결혼이나 혈연관계가 아닌 커뮤니티를 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의 권리 획득을 원한다.

많은 국가들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구체화되고 법제화되는 반면, 또 동성 결혼 합법화의 법제화도 매우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는 상대적으로 보장된 길일 수도 있다. 동성 커플이 결혼 제도에 진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견고한 이성애 중심적 결혼 제도를 흔들어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만큼이나 균열이 생길까? 미국의 레즈비언 리얼리티 쇼 <The real L word>를 보면, 레즈비언 주인공이 자신의 파트너를 가족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의 결혼을 원하는 가족과 안정을 원하는 파트너는 주인공에게 결혼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설파한다.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 결혼할 것을 요구받고, 임신 혹은 입양을 종용당하며, 이성 커플과 동등한 ‘의무’(?)를 짊어진 삶이 레즈비언 주인공에게 펼쳐지고 있었다.

 

결혼은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특정한 관계의 두 사람에게만 한정시킨 부당한 제도에 불과하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동성 커플의 권리와 부양가족을 벗어나 독립하고자 하는 장애 퀴어의 삶을, 자식과 배우자 없이 홀로 지내는 노년의 삶을 보장받고자 하는 퀴어들을 삭제할 것이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여러 운동들 중에 하나의 전략이지만, 이 전략이 다양한 퀴어의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동성 결혼이 아닌 방식의 삶도 포괄할 수 있을 때 획일적이지 않은 퀴어들의 권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여전히 걱정은 있다. <이티비티티티 위원회>1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급진적 레즈비언 단체를 지향하는 이티비티티티 위원회는 결혼제도 폐지를 외친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요구하는 퀴어 단체와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 보수 단체의 대립하는 계단 중앙에서 결혼제도 폐지를 외치던 이티비티티티 위원회는 양쪽 단체에서 계란을 맞고, 메인 뉴스에 호모포비아 단체로 둔갑하여 소개된다. 멤버들은 경악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더라.2

 

 

 

  1.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인걸>의 감독, 제이미 배빗의 2007년 작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10대 레즈비언 주인공이 급진 페미니스트 펑크 그룹 이티비티티티위원회에 가입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렸다.
  2. 라는 것은 뻥이다. 사실 영화에서 그들은 미국의 전쟁기념탑을 성기모형물로 만들어, 발사 및 폭파 시키는 장면을 공중파 탈취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영한다. 그리고 체포된 일부 회원이 감옥에서 이티비티티티위원회 지부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